< -- 64 회: 6> 승부. -- >
6> 승부.
어스 엠파이어의 인간들은 대개 도박을 즐긴다.
도박이 인간 본연의 마음을 자극하기 때문일지도 몰라서 그렇다. 다만 제국에서는 자기파멸까지 치닫는 성격은 대개 없는 터라 ‘의외로’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적다. 이를테면 세븐 포커에서 스페이드 10, J, Q, K를 쥐고 있을 때 스페이드 A만을 바라며 돈을 베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
그들은 지기 위한 게임이 아닌 한 굉장히 빨리 돌아가는 머리로 확률을 계산하고, 뱀의 차가운 피와 냉정한 판단력으로 승리를 가져간다.
덕분에 그들의 게임은 거대한 정보전이며 눈치게임이며, 무지막지한 두뇌싸움이 된다.
이시현은 문득 호텔에 비치된 컴퓨터로 게임을 했다.
게임이라고 해도 다른 건 아니고 그저 포커가 전부.
세븐 포커를 두는데 예전에 만들어준 아이디가 살아있었다.
“쉽군. 너무 쉬워.”
상대 세 명의 드러난 패를 보고 자신의 패를 보고 남은 패를 계산하고 다음 패가 들어올 확률을 계산하며 짜 맞추는 게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전망이 없으면 그냥 포기. 게임을 재미없게 한다는 타박을 좀 듣지만 확실히 승을 쌓아가고 있었다.
“흠. 게임이라.”
이시현이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리고 빙그레 웃었다.
단미애는 호텔을 자기 집처럼 청소했다.
미지연이 타박을 주고 나서야 머뭇거리면서 침대 위에서 손을 꼬고 꼬무락댔는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미지연 또한 직업이 없어졌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신체단련을 했다.
알몸에 낙서. 게다가 씻지도 못하는 상황. 어디선가 가져온 매직으로 이런저런 곳에 음란한 낙서를 해놓고 보고 즐기던 이시현 때문에 아침이 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옷을 입지 못했다. 몇 번이나 씨발거리고 나서야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는데, 입을 거리는 정장 밖에 없었다.
결국 정장을 입고 밖으로 나가 트레이닝복까지 사온 후에야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미지연의 심정으로는 진짜 사기 같은 몸이었다.
자신의 몸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컨트롤이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귀에도 신경이 있어서 귓바퀴가 움찔거리게 만들 수도 있고, 머리털이 쭈뼛 서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일깨우니 머리칼이 눈에 보일 정도로 길어지고 손톱 또한 그렇게 된다.
타고난 재생력. 재생력에 덧붙여 세포하나하나를 활성화 시키는 힘.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가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주먹을 움켜쥐자 으드득, 소리가 난다. 쇳덩이도 손안에서 찌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 거대한 공장에서나 사용되는 압축 프레스의 압력을 인간의 손으로 구현할 수 있다. 초인의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기, 병기에 가까웠다.
이제는 미지연도 호텔을 붕괴시킨 이들이 무장 둘에 의한 것이라는 걸 믿었다.
한 명은 무장보다 고강한 존재인 ‘장군’의 무구를 가진 존재. 다른 한 명은 그런 이에 맞설만한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이. 둘이 부딪친 결과는 거대한 호텔을 붕괴시킬 정도다.
장군에 대해서도 들었다.
장군의 정보를 알려준 이는 이시현이 아니라 단미애에게서였다.
단미애가 본 장군은 잭 더 리퍼. 이름만 그런 게 아니라 시간여행이든 뭘로 해서든 그의 유전자를 얻어 그의 성향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살인마의 이름을 따다니 장군이라는 표현이 수치다, 미지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잭 더 리퍼가 한 짓을 들어보면 저도 모르게 반문하게 되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잭 더 리퍼로서 사용하는 무기인 메스. 분자결합을 끊을 정도로 가늘고 예리한 메스를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고, 크기도 바꿀 수 있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현실침식.
결계니 마법진, 뭐 그런 옛 이야기 같은 능력을 통해서 주변의 공간을 자신이 바라는 현실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단미애가 이런 것에 거짓말 할 리는 없으니 그건 명백한 진실.
미지연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런 것들을 데리고 있는 이들과 싸워야하는 이시현을 동정했다. 물론 그런 생물병기와 정작 싸우는 건 이시현이 아니라 자신이겠지만.
단련이 즐겁다.
원하는 대로 성장한다. 자신의 상상력이 빈곤해질 정도로 육체는 잘 따른다.
검지손가락 만으로 팔굽혀펴기가 가능하다. 보통의 방식과는 달리 미지연은 ‘다리마저도 들고 있는’ 상태에서, 표현 그대로 검지만으로 몸을 지탱하고 팔굽혀펴기를 한다.
고통도 있고 피곤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것이 가능하다. 조금 쉬면 또 통증이 사라지고 피로도 잊힌다.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지나치게 빠르고 몸 곳곳에 쌓인 젖산의 분비도 급격히 줄어들고 체내에서 사라진다. 피로를 모르는 몸.
단련할수록 강해지는 육체.
이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미지연은 이시현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곧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경악해서 이를 갈아댔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몸이라는 소리다. 물론 그런 육체의 한계만큼 멋진 것은 달라진 미모. 가슴의 크기는 일정하고 손바닥을 붙였을 때도 어디가 길고 한 부분이 없다. 얼굴의 좌우를 반으로 갈라 대칭시켜 보았을 때도 다른 점이 하나도 없고, 쌍꺼풀에, 눈 트임에, 코까지 오뚝해졌다. 성형의 흔적도 없이 말 그대로 우월하신 몸이 되어버렸다.
거울을 보면 빛나는 용모에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아직도 단미애는 거울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너무 예뻐지니까 할 말을 잃어버리는 거다. 단미애의 경우는 눈의 색깔과 모발의 색깔마저 달라진 덕분에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칭을 가장한 하드한 육체단련을 끝내고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 이시현이 컴퓨터를 끄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게임 하자.”
“sex is game?”
“yeah. ……oh, no.”
이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그대로 게임. 트럼프.”
“갑자기 왜.”
“내가 하는 것도 결국은 게임의 종류니까. 게임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암퇘지.”
“꿀꿀.”
어느새 부턴가 이시현의 입에서 단미애를 부를 때의 명칭은 암퇘지가 되었다. 단미애는 자동반사적으로 꿀꿀 하고 대답했다. 이 엿 같은 관계를 보면서 미지연은 자신의 미래도 저런 꼴이 될 거라는 사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트럼프를 사와. 음, 열 개들이 세트면 될까.”
“카운터에 부탁하면 된다. 사오라고. 그리고 팁만 좀 놔두면 돼.”
“그럼 그렇게 하지. 전화 해.”
단미애가 네, 하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호텔 벽에 붙어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면서 주문을 하는 동안 미지연이 소파에 앉아서 깍지를 꼈다. 맞은편으로 이시현이 걸어와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림이 된다. 그래서 짜증이 난다. 미지연이 눈살을 찌푸리곤 말했다.
“분명히 넌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 그리고 그 게임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어.”
“그래. 확실히 기억하고 있군. 상 줄까?”
“거절한다. 자지건 입이건 치워, 이 개새끼야.”
안타깝군, 이시현은 바지지퍼로 향하던 손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주문을 마친 단미애가 마침 걸어왔고, 이시현은 손짓해서 그녀를 불러들였다. 단미애가 옆에 앉자 그녀의 옷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큰 유방을 주물렀다.
“힉, 흑, 흐윽, 흐으……!”
그리고 약속된 것처럼 단미애가 신음을 토했다.
미지연은 그의 손놀림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알고 있기에 도리어 동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단미애는 버티고 싶어도 어려울 것이다. 키스를 한 것만으로도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거기에 가슴을 직접 주무르는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너도 해줄까?”
“싫다.”
조금 애잔한 시선을 던졌더니 그게 자신도 단미애처럼 되고 싶어서인 줄 아는 모양이다. 웃기는 소리. 미지연이 고개를 가로저어 분위기를 일소했다.
“그래서 네가 하는 게임은 뭐야?”
“게임의 목적은 킬 더 킹. 왕을 죽이는 것. 그리고 게임의 종류는 보드게임.”
“보드게임?”
뜻밖의 말에 미지연이 반문했다.
“그래. 보드게임. 다만, 보드의 말판은 사람이야.”
“사람? 아, 그러니까…….”
미지연은 그것에 대해 꽤 생각했던 것만큼 금방 이해했다.
“말이 곧 무장이군.”
“그래. 이해했어? 검둥이가 선택한 보드 게임은 장기. 흰둥이가 선택한 건 체스. 그리고 그 말들은 장기와 체스에서 자신이 자리한 말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대강 알겠군. 그럼 너는?”
“나는 바둑을 할까 생각 중이야.”
“바둑? 다른놈들이 장기와 체스를 하는데 고작 바둑? 아니, 바둑은…….”
미지연이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나우 로딩’이라는 글자가 머리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깊은 생각 끝에 미지연이 말했다.
“바둑은 위치선정을 잘해야 하는 게임이야. 말의 능력보다는 우선, 집을 많이 만드는 게 목적이지. 그건 알고 말하는 거겠지?”
“그래. 잘 알지. 이곳 토박이인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게임이야. 그리고 말이지.”
이시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흑공자, 백공자에게 맞서는데 가장 좋은 구도는 역시 흑말, 백말을 사용하는 게 아니겠어? 뭐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미지연은 그가 하는 말의 속뜻을 지금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시현만이 가지고 있는 계획. 리퍼쯤 되는 장군이 ‘게임에 참여시켜도 좋겠다’고 싶을 정도의 역량을 보통의 인간일 때에도 가지고 있던 그의 진가.
아직은 모른다.
그리고 이시현 또한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게임감각을 살리기 위해서 포커를 칠거다.”
“……뭐래, 이 병신은.”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시현이 턱짓을 했다. 미지연이 으득 잇소리가 나게 입을 악물고는 눈을 부랴렸다. 이시현은 이미 숨을 못 쉴 지경이 되어 침을 줄줄 흘리는 단미애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를 보낼까, 그런 시위다.
미지연은 자신이 가면 끝날 일을 감정 때문에 미루어 타인에게 피해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은 있다. 하지만 그 자존심을 지키려다 타인이 괴로워하게 된다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 미지연은 이를테면 상당히 올바른 성격의 여성이었다.
화를 내면서도 단미애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가는 걸 보기 싫어 자신이 움직인다.
이시현은 단미애의 유방 첨단부, 유두를 비틀면서 문득 생각했다.
언젠간 자신도 저러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 힘쓰던 자신이 있었다.
‘뭐 과거니까 상관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