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3 회: 5> 죽음의 게임. -- >
이시현은 그 사실을 조금은 알고 있다.
흑공자 게인과 백공자 샤를, 둘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를 퀘스트를 통해 조금 풀어버렸기 때문에.
이시현은 그들이 적으로 나타났을 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시현,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난다면 분명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좋게 끝난다는 말은 기적으로 가장 큰 고통과 가장 깊은 나락에 굴러 떨어졌다가 죽음조차 없이, 구원조차 없이 영원히 고통 받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이시현이 킬 더 킹에 참여한 후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지기 전까지 그들에게 들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시현은 게임의 초보. 이제 막 시작한 사람.
하지만 흑공자 게인과 백공자 샤를은 10년간 다른 경쟁자들을 죄다 제압하고 올라온 강자들이다. 비교할 수가 없다. 다행히도 이시현 또한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 되었다. 지닌 능력은 충분하지만, 아직 능력의 진정한 개화는 멀었다.
이시현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미지연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물어볼게 있어.”
“뭐냐, 머저리. 아니, 묻지 마. 내가 왜 뭐냐라고 되물었지?”
“슬슬 내게 익숙해진다는 증거지. 네 욕설이 내게 익숙해지듯이.”
이시현은 실신하듯 쓰러진 단미애의 알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면서도 단미애가 느끼는 듯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미지연은 입으로 욕설을 퍼붓는 것을 허락받았다.
물론 여전히 이시현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건 그녀의 중추에 심어진 제약이니까. 하지만 입으로 퍼붓는 욕설에 간혹 움찔거리고, 진짜 화를 낼때도 있다는 사실은 미지연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겼다. 그녀는 떠오르는 대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너무 화가 났을 때 이시현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10분간, 너 자신을 매도해.”
미지연은 자신의 입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말로 채웠다. 스스로의 말에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의 말이었다.
“나 미지연은 고기변기입니다, 보지는 언제나 자지를 환영합니다, 씨발, 씨발! 개자식! 개자식도, 쓰레기도, 노숙자도, 원숭이나 말, 개나 소의 자지에 환장합니다! 정액이 주식입니다!”
그 후 미지연은 나름대로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욕설을 퍼붓는 것조차 알지 못하게 제약이 걸려버린 것이다. 물론 강제는 아니었다. 그저, 타인을 매도하게 된다면 자신을 매도하는 말도 버텨야 한다는 결말을 받아들여야 했을 뿐. 그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자신을 비하하는 게 더 마음이 아팠던 미지연은 그나마 있던 욕설에도 익숙해진 이시현을 보며 신음했다.
“너 같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적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하겠어?”
“내가 말할 것 같냐.”
흥미로운 주제기는 하다만. 미지연이 속으로 되뇌었다.
이시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지. 어때? 그러면 제대로 된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뭐? 진짜로?”
“농담이야.”
미지연이 눈을 부릅떴다.
“이 개자식이……누굴 가지고 놀리냐!”
“응.”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는 놈이 한 놈 있어.”
“무슨 말이야?”
“내 적.”
이시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미지연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한없이 진지해지자 보는 미지연 또한 당황하고 말았다. 이 자식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거야? 그보다 적이라니 그건 도대체…….
“너는 알아야 될 것 같아서 그래. 그리고 나름대로 조언을 해줄 수 있겠지.”
“……무슨 말인데.”
“한 놈은 사이비교주 같은 놈이야.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목표를 ‘나락까지 굴러 떨어뜨려’. 그리고 나락에서 절망하고 있는 이를 손수 구해줘. 그리고 그를 따르게 하지. 그리고 몇 번이나 지독한 고난을 안겨. 내가 방금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어. 뻥이지만’ 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러. 그럴 때마다 구해주고,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느냐, 그렇게 힘겹게 구해준 나를?’ 하면서 도리어 슬퍼하지. 상대는 결국 모든 기준이 무너지고 붕괴되어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해.”
“그런 인간이 존재하긴 하나?”
“내 적이지.”
이시현이 말하자 미지연은 아주 조금이지만 납득했다.
이런 자식에게 적이 있다면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놈이어야 하겠지. 미지연은 그런 놈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 그리고 납득했다는 자신에 대해서도 꽤나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시현이 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인간과는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다른 무장이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 적을 물리치는 방법을 묻는 거냐?”
“적은 하나가 아니야.”
“하나가……아니라고?”
“그래.”
이시현은 남은 적을 말했다.
“극상의 사디스트가 또 한 놈 있어. 그에게 걸리면 말 그대로 살아있을 때까지 고문 받을걸. 고통 받고 고문 받고, 집요하고 매우 집착하는 성격이지. 그런 주제에 능력마저 초월적으로 뛰어나. 그래서 그에게 걸리면 죽었다고 봐야 해.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떠안겨줄 놈이거든. 죽여달라는 말이 그에게는 인사 같은 거야.”
“……무슨 고어 영화에 나오는 놈이냐.”
“아무튼 그 두 놈이 적이야. 그리고 그 둘은 나보다도 훨씬 전에 싸우고 있어.”
“너는?”
이시현이 대답했다.
“나는 중간 참가자.”
“둘은 너보다 압도적인가?”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 그리고 세력 또한 마찬가지.”
이시현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미지연의 머릿 속에서 나름의 구도가 그려졌다. 중간 참가자. 그리고 세력도, 실력도 가장 떨어지는 자. 이기는 건 쉽지 않다. 당연한 이유겠지만, 그들에게도 무장이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이시현보다는 많을 터.
“그 둘이 게임에서 승리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봐.”
“나는 최소한 인간이야.”
“그들은?”
“인간을 생물로서도 취급하지 않아. 이 세계는 승자가 된 그들에게 가장 가혹한 장난을 칠 놀이터가 될 거야. 지옥으로 변할 거야.”
미지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대답했다.
“나를 자유롭게 해줘.”
“이미 자유롭잖아.”
“이 개자식이……!”
이게 어디가 자유롭다고! 미지연이 머리끝까지 분노에 차서 화를 냈다. 이시현이 급히 말했다.
“난 너를 인정하고 있어. 충분히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무장으로 만든 거야. 그리고 무장으로서 지녀야 할 충성도 일부러 지운 거고.”
“하, 웃기는 소리하지 마. 겨우 그걸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할 것 같아?”
“인정하라고 한 말은 아니야. 나는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분명히 너에게 큰 도움을 받을 거야. 나는 매우 잘났지만 사회경험도 부족하고 쟁탈한다는 조건도 익숙지 않으니까. 문득 생각한 거지. 그 두놈에 비해서 나는 부족하구나.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대답해. 이 대답으로 하여금 나는 너에 대한 판단을 바꿀 테니까.”
“지금 같은 성노예 같은 처지에서 바뀌어봐야…….”
이건 아닌가. 이시현은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녀가 이 전쟁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소재를 떠올렸다.
“호텔 붕괴. 너와 같은 무장 둘이서 붙어서 일어난 거야.”
“진짜냐?”
“맹세할 수 있어.”
“테러리스트라고 하더니만……건물, 그렇게 큰 건물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무장 둘이서? 사람 둘이서? 겨우 둘이서?”
“그나마도 호텔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려 한 것은 아니었어. 아마도 싸우던 도중 그 여파로 붕괴된 거겠지.”
미지연은 무장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일어난 참사를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태양그룹의 호텔에서 일어난 참사. 그 참사를 일으킨 이가 테러리스트로 발표되긴 했지만, 태양그룹의 신뢰는 한없이 떨어졌다. 나락까지 떨어지지 않은 건 그 현장에 태양그룹의 회장이 있었기 때문. 그 또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으니 고의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 것이다.
“게다가 너 S대 나왔다며. 여자인데 프로인 SP에 S대까지 나온 재원. 충분히 물어볼만 하지.”
미지연은 침중하게 고민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나라면, 먹이를 놔두겠어.”
“먹이?”
“서로의 전력분석이 시작됐나?”
“아마.”
“아니, 서로의 전력을, 네가 확실히 알고 있냐고.”
이시현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지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먹이를 준비해. 정보든 인재든 보물이든 뭐든 간에. 그들이 탐내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걸로. 둘의 사이는 분명히 안 좋겠지. 그리고 신중할 거야. 누군가를 고문하는 것도 상대의 상태를 알지 못하면 금방 죽여버릴테고, 함정에 빠트리는 것도 상대의 반응을 살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최소한 전력의 중간 이상. 그 정도 되는 싸움을 일으키도록 준비해. 그러면 알 수 있을 거야. 우선 제일 필요한 건 상대의 전력이니까. 너보다 강한 이를 상대하려면…….”
이시현은 새삼 감탄했다.
그 또한 어스 엠파이어 주민으로서의 머리가 있다. 그 정도의 지모는 있다. 하지만 그걸 갑자기 물었을 때 약간 머리 굴려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도움이 된다.
미지연은 안색이 밝아지는 이시현을 보며 날카롭게 웃었다.
“도움이 됐다면 내 제약을 풀어.”
“도움이 됐어. 그러니까 부드럽게 안아줄게. 걱정하지 마, 비디오는 찍지 않아.”
미지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욕을 쏟아냈다. 이시현은 받아들였다. 한계를 넘어서도 받아들인 후, 이내 핏대가 서서 미지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자지로 입을 막은 것은 아니고, 입술끼리 겹친 것이었다.
미지연은 속으로 욕을 토하면서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이 새끼, 혀 놀림이……예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