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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51화 (51/141)

< -- 51 회: 4> 제로 섬. -- >

머릿속,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는데 감각이 전해주는 많은 이야기와 상세설명은 이시현을 납득케 했다. 이시현이 눈을 뜨고 대뜸 입을 열자 강주희와 남민아가 눈 아래가 빨갛게 된 채로 달려들었다.

“자기야!”

“오빠!”

그리고 초췌한 안색의 단미애와 여전히 딱딱한 SP의 모습도 보였다. 이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이었다. 이 병실은 이시현이 알고 있는 곳이었다. 태양그룹의 회장이 머물던 곳과 거의 흡사했다. 만들어진 게 일인실이기에 태양그룹 회장과 같은 방을 안 쓰는 것이 천만다행.

이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칼빵을 놓은 곳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거즈로 감싸고 붕대를 감은 듯 하다. 조금 눌러보니 저릿저릿한 것이 꽤 아팠다. 하지만 칼침을 맞은 것치고는 상당히 무난하다. 한 번만 찔린 후 방심한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결과다.

“자기, 아프지 않아?”

“아파. 하지만 참을 만 해.”

이시현은 환자복을 들어 올리고 상처를 살피다가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을 보며 학학 대는 두 명에게서 배를 지웠다. 환자복을 내리자 강주희와 남민아가 몹시 아쉬워했다.

“오빠도 칼빵 같은 거 맞을 때가 있네요. 완전 무적인 줄 알았는데.”

“그러는 게 좋다고 생각됐거든.”

“네? 칼빵 맞는게?”

“응. 상대가 칼을 들고 있었고 전력을 다해서 찌르려 하더라고. 음, 좀 찔러본 듯한 솜씨였지. 혹시나 빠질까봐 그걸 양손으로 붙잡고 자신의 몸까지 가져가는 식으로 시야를 가렸으니까. 이럴 바에야 목숨에 지장이 없는 곳에 한 번 찔린 후에 방심한 그에게서 칼을 빼앗는 편이 낫겠다 싶었지.”

입을 벙긋 하고 벌리며 남민아는 진짜냐고 묻는 듯 했다.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됐어. 찌르고 나니 좀 방심하게 된 그놈을 차서 칼을 떨어뜨렸거든. 이것 봐, 다른 곳은 아무런 이상이 없잖아.”

“보통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싸워요? 남자는? 오빠만 그런 거죠?”

“다른 놈들 생각이야 어떻게 알겠어.”

이시현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는 곧 강주희와 남민아를 물러나게 했다. 물러나기 싫다고 악을 썼지만 그것도 잠시 뿐. 결국 병실을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여성 SP와 단미애 뿐이었다. SP가 입을 열었다.

“사흘 후에는 퇴원해도 된다고 한다.”

“사흘이나 걸리나.”

“위치가 위치니까.”

“과연.”

이시현은 납득했다. SP는 곧 강주희와 남민아가 빠져나간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이야기가 필요하겠지. 부를 일이 있다면 호출해라.”

SP도 용케 자리를 비켜주었다. 단미애는 혼자 남아서 대단히 불안해했지만 곧 이시현이 본인을 바라보자 엉거주춤 일어났다.

“미안해요.”

“네? 아, 아니요. 죄송한 건 오히려…….”

“그런 놈들에게 이렇게 다치고 걱정이나 끼쳐드리다니, 웃기군요.”

“저, 절대로 우습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지만.”

이시현은 피식 웃고는 배를 문질렀다. 상처를 봉합한 부분과는 다른 곳이었다. 단미애는 조금 느슨하게 풀어진 상의 단추 때문에 얼핏 보이는 조각 같은 몸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배가 좀 고픈 것 같은데…….”

이시현이 은근히 돌려 말했다. 단미애가 병실에 있는 과일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누가 따로 사온 것은 없지만 이만한 병실이다. 없는 것이 없다.

“좀 깎아주시겠어요?”

“네, 네.”

단미애가 과일바구니의 화려함에 잠깐 놀랐다가 이내 과도와 과일을 들고 깎기 시작했다. 칼침을 맞는 것을 보았는데도 많이 해오던 동작이라는 듯, 과일의 껍질을 깎을 때만큼은 칼을 들었을 때의 머뭇거림은 남아있지 않았다.

과일은 꽤 예쁘게 깎였다. 손재주가 좋은걸.

이시현이 작게 썰린 과일을 먹었다. 몇 개만 먹고는 금방 질려버렸지만.

다 좋은데 입맛이 너무 까다로운 게 문제다. 이 만한 등급의 과일도 없을 텐데, 한 개를 전부 먹지 못한다.

“실례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시현은 먹는 게 질렸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 말을 걸었다. 단미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자신의 현 상황임을 깨닫고 말을 주저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두세요.”

이시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당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당신을 도울 힘이 있어요.”

“으…….”

“무슨 일을 겪고 있던, 어떤 일이 있었던 금전 관계든 상황이 꼬였든. 이 세상에서 그런 문제를 가장 명쾌하게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저 뿐이라는 겁니다.”

그의 말은 몹시 진지했다.

그리고 단미애는 그런 말에 넘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통스럽고 지치고 힘들었던 날. 누구 하나 위로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난처한 상황을 목격하고 구해주려던 이가 상처까지 받았다. 그녀의 정확한 현재 심정은 미안하고 공수하며,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싶다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말해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시현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사정을 듣고 도망치지 않아요.”

“못 하겠다고 손을 내젓지도 않아요.”

“무모하게 도울 수 있다고는 안 해요.”

“확실하게 도울 수 있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단미애가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긴장을 풀려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한 사정을 말했다. 이시현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또 여자를 돕고 있구나.

한 명의 여자를 도왔다가 인생이 끝장났는데도 불구하고.

절대로 누군가를 돕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와는 이름과 나이 빼고는 모두 결별하겠다고 선을 그었는데도 어느새 돕게 되는구나.

단미애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남편이 있었다. 사고로 죽었고, 다행히 들어둔 보험과 이런저런 유산이 있었다. 작은 공장을 하면서 생기는 빚은 그걸로 다 갚고도 남음이 있었고, 공장을 인수해줄 사람도 구했다. 남편이 죽은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려고 할 때, 가족 중 한 명. 옛날부터 망나니로 소문난 남동생이 찾아왔다.

엄청나게 돈을 돌려막고, 썼고, 돈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그때는 돈이 있었지만 그건 유산이나 마찬가지. 줄 수 없다고 했지만 결국은 빼앗겼다. 폭력까지 있었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엔 모든 것을 잃은 후였다. 그리고 동생의 소식은 단절되었고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궂은 일을 하면서 버텨나갈 때 동생의 전화가 있었다.

돈을 갚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살려달라고.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때부터 그들이 나타났다. 동생을 살리지도 않을 거냐고. 남은 돈이 있을 거라고. 남편이 운영하던 공장을 그녀가 대신 할 수는 없었으니 당연히 다른 이에게 인수를 했다. 공장을 판 인수 대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데 동생을 추궁하던 그들은 그런 사항마저도 알아차린 듯 했다.

순식간에 빈곤해진 가정생활에 거듭된 스트레스와 수를 늘려가며 동생을 언급하는 그들 때문에 정신까지 나갈 것 같은 상황. 인근에는 돈 때문에 위험에 빠진 동생까지 외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문에 주변의 눈초리도 지독하게 싸늘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스포츠카까지 파손시켜 차량보상까지 해줘야 했다. 다행히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이시현은 참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애초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방해꾼이. 훼방꾼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망쳐버린 것이다. 그녀는 열심히 살아가려 했다. 제법 괜찮은 가정에서 살고 있었다. 이시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해결할게요. 동생이 다시는 손 벌릴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연결고리인 양아치놈들도 다시는 찾아올 수 없도록 하죠.”

“흑……감사해서, 너무…….”

“대신.”

이시현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강하게 끌어당겨 그녀의 입술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기겁해서 물러났다. 이시현은 입술을 핥았다.

“저 좀 보살펴주시죠.”

그녀는 부끄러움과 수치심, 민망함, 기타 여러 감정들을 끌어안고 나가려했다. 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이시현의 손아귀 힘은 굉장했으니까. 손목이 붙잡힌 그녀는 나갈 수가 없었다.

단미애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굉장한 미모다.

스트레스와 피로, 이런저런 감정 때문에 안색이 어두웠지만 꾸미면 달라질 터였다.

미망인에 자신에게 끌린다는 신호도 보내오지 않는 여성. 접점은 없다. 강주희와 남민아를 안았을 때와는 상황이 명백히 다르다. 하지만 그녀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시현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왜소한 몸을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을 다시 한 번 훔쳤다.

“흐읍, 윽, 읍, 안, 안 돼요. 저, 저는…….”

“상관없어요. 어떤 문제든, 어떤 상황이든, 어떤 위치든. 지금 이 상황에 문제를 끼치는 요소는 없으니까.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시현은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어냈다.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내려다보았다.

“하룻밤의 관계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의뢰금 같은 거라고.”

“그……읏……으, 으읏…….”

뭐라 말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이상한 소리만 내면서 떨어지려 한다. 이시현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녀가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정작 달아나지는 못했다. 문가에서 주춤거렸다.

그가 정말로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하룻밤 안겨야 한다는 당황. 자신의 처한 상황. 위치. 그의 매력. 그리고 자신 때문에 난 부상의 부담.

“사흘 후 밤이 되면 찾아갈게요. 문 앞에서 전화하면 받아주세요. 물론.”

이시현은 자신의 가슴을 쳤다.

“거절한다고 해도 일은 끝마칠게요.”

“저, 정말인가요?”

“네. 전 꽁한 남자 아니니까요. 하지만 만약, 그러고 싶다면.”

이시현은 싱긋 하고 미소 지었다.

“문 앞에 있을 저에게 전화를 걸어주세요. 당신이, 직접, 먼저.”

단미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권을 준 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안 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단미애는 부담감을 덜 수는 없었다. 한 곳으로 쏠린 비중. 선택권이 주어졌다고는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문항 중에 한 개만 너무 짙었고 컸고 무거웠다. 그녀가 결정할 때를 이시현은 즐겁게 기다리기로 했다.

단미애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나가기 무섭게 강주희와 남민아가 다시 들어왔다.

SP 또한 들어왔지만 “단미애 씨를 돌려보내고 오겠습니다.” 라는 말에 수락했다. 단미애와 SP는 차량을 타고 다시 나갔을 것이다.

강주희와 남민아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 어쩌라 하는 것을 귀로 흘려듣던 이시현이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그놈들은 어떻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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