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 회: 4> 제로 섬. -- >
“그런데 오빠, 왜 불렀어요?”
“부른 이유? 아, 맞아. 그걸 깜빡했군.”
“그걸 깜빡하면 어떡해.”
“나도 깜빡할 때도 있지. 뭐 좋게 말해주자면 너희들의 몸을 보고 다른 걸 다 잊었다고 해도 좋고.”
그건 나쁘지 않군. 강주희가 씩 웃었다. 남민아도 피식 웃었다.
“미나야. 너 고교생이지?”
“현역이죠.”
“고교생에게 힘든 일은 뭐야?”
“삶 그 자체요.”
강주희와 이시현은 1초도 안 되어 나온 남민아의 말에 깊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뭔가 회한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민아는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 때도 저랬던가, 강주희와 이시현은 고교생활을 떠올려볼 지경이었다.
“너희들 중에 왕따 같은 것도 있어?”
“아, 저 일진 아니라니까요 오빠. 그런 거 몰라요.”
“누가 일진이래? 너는 좀 잘나가는 부류였잖아. 그런 반면 좀 무시 받고 이러는 애들 없었냐고.”
“있겠죠? 물론 지금은 없지만.”
남민아는 ‘지금은 없지만’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진애들 죄다 어딘가 부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거기서 태양그룹 법무팀과 맞딱 뜨려서 지금 완전 멘붕왔어요. 졸라 인생 끝장났다는 표정 짓고 있다던데. 후후. 오빠 이제 어떡해요? 일진애들은 오빠에게 고소를 하려고 했는데 오빠쪽에서 온 법무팀이 그네들 일을 죄다 늘여놓아서, 오빠 금방 부자 되겠더라고요.”
“멘붕이 뭐냐.”
“멘탈 붕괴. 이건 딱히 신조어도 아닌데요?”
신조어든 뭐든 모르겠다고. 이시현은 이마를 짚었다.
“그놈들 죄다 감방 보내버리지 뭐. 여기서 돈 더 벌 필요 없잖아.”
일진애들을 부추긴 건 남민아 자신이었지만 그녀만 홀랑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이시현의 섹스 파트너가 되었다.
일진들은 갑자기 무슨 폭력에 협박에 무기사용에 가택침입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무지막지한 죄를 짓는 것이 되었다. 태양그룹 법무팀이 단단히 준비를 한 덕분에 그들은 개인당 수천만 원을 주고 합의를 하던지 아니면 그대로 소년원으로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시현은 그들에게서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며 그냥 사회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안타까움에 고개를 가로젓던 남민아가 문득 눈치 채고 물었다.
“정말이지 걔네들도 인생 조졌네요. 어쩌다 오빠 같은 사람을 만나서는……그런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왕따가 왜요?”
“걔네 인생 좀 바르게 고쳐주게.”
“네?”
그의 말을 듣고 대번에 이해할 수 있을 이는 거의 없을 터였다.
이시현이 씩 웃었다.
“무장육성계획 버전 1.1을 시작하겠다, 이 말이지. 왕따가 있거나, 굉장히 소심해서 이런저런 부림을 받는 애들……젠장, 너네학교엔 이제 없잖아.”
“웬 회색머리 아저씨에게 개겼다가 뼈도 부러지고 턱이 날아가고 이빨을 죄다 잃어버렸는데도 범죄자가 된 불쌍한 애들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요. 하지만 오빠, 그거 알아요?”
깜찍한 미소와 함께 윙크를 하며 남민아가 말했다.
“이 세상에 일진이 사라진다고 학교가 맑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거. 일진에 눌려있던 이진놈들이 기어 돌아다니고 있더라고요.”
“……그런 것도 있냐.”
“사회는 계급이잖아요. 네, 학교도 사회고요.”
“뭐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시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얼굴 좀 잘난데 소심하고, 가난하다거나 환경이 안 좋다거나 해서 소외받는 애. 여자애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따먹게요?”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이시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내 계획의 일환이라. 아, 널 영업부장으로 임명하지.”
“잉?”
갑자기 무슨 영업부장? 남민아가 입을 동그랗게 하고 묻자 이시현이 대답했다.
“태양그룹 회장 영감님에게 회사를 하나 받았거든. 정확히는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거지만. 사람은 세 명이고 내가 사장이고 누나가 비서니까 넌 영업부장.”
“영업부장이 하는 일이 뭔데요?”
“저 계집애는 부장이고 왜 나는 비서야!”
“내 책상 아래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을 주지.”
“강 비서라고 불러줘.”
비서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강주희의 얼굴에 거짓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남민아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럼 나도 비서할래요. 부장 싫어! 아니, 부장은 부장인데 꼴랑 세 명 뿐인 곳에서 부장이라고 해봐야 제일 낮잖아요.”
“졸병 들어오면 그때 걔를 다시 시키던지. 아무튼 미나. 학교에서 좀 그럴듯한데 운이 나빠서, 뭐 이런저런 사정으로 소외받는 애를 한 명 골라봐. 여자여야 한다.”
“으……알았어요. 뭔지는 몰라도 할게요.”
이시현이 박수를 쳤다.
“그럼 오늘 업무는 끝. 그럼 밖에 나가서 영화라도 볼까.”
“VOD나 보죠. 밖에 나가면 오빠 때문에 제대로 된 영화도 못 볼 것 같은데.”
그런가, 이시현은 잘난 얼굴도 때로는 죄가 되는군. 남들이 들으면 뒤통수를 후려칠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섹스 비디오나 찍자.”
“어…….”
“지금은 좀. 아직도 멍울이 져서 아프다고요.”
“아.”
이시현은 좋기는 한데 몸이 피로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만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여자 전화번호 있었지.”
“그 여자?”
남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강주희는 또르르 하고 눈알을 굴리더니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망할 차 사고난 아줌마!”
“응, 맞아. 그 여자와 만나야겠어. 너희들은 VOD보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따라갈래. 내가 차 몰게.”
“저도요. 나 시간 많아요.”
이시현은 이미 다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따라오지 마. 혼자만의 시간도 가져야지.”
그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두 명은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 나가.”
“오빠 없으면 이런 곳에 있지도 않아요.”
아웅다웅하면서 그녀들은 헤어졌다.
10분 후 이시현의 앞에는 여성 SP가 있었다. 검은색 벤츠를 몰고 온 여성은 선글라스를 벗고 매우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이시현이 느긋하게 그 시선을 받아 넘겼다.
“왜 부른 거지?”
“차 좀 태워달라고. 좋은 차인걸.”
“회장님이 왜 그렇게 너를 아끼는지 모르겠군.”
“그야 뭐.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겠지.”
이시현은 담담히 말하고 상체를 내밀어 그녀와 마주했다. 여성 SP가 고개를 젖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입술끼리 부딪칠 뻔 했던 것이다. 이시현이 씩 웃었다.
“그리고 당신과 잘해보고 싶다는 불타는 청춘의 말을 가련히 여겼기 때문에 당신을 내 전속으로 붙여준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흥.”
여성 SP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하고 있군, 발정난 개가.”
“그리고 당신은 곧 암퇘지로 만들어줄게. 우선은 차 좀 태워달라고.”
이시현이 차에 올라탔다.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이내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나.”
“위치를 물어봐야겠군.”
이시현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단미애.
흑공자와 백공자가 퀘스트에 속아 넘어가 전력을 밀어붙인 싸움의 희생자이자 이시현의 시야에 들어온 여성이었다.
***
퀘스트가 생겼다.
여성 SP가 모는 차량에 올라타 느긋하게 앉아있던 이시현은 어색해보이지 않을 움직임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홀로그램에서 뜨는 것은 역시 이시현이 알아볼 수 있는 글자.
하지만 그 글자가 전하는 것은 퀘스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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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킹의 주민 분께 주어지는 권리를 실행합니다.>
경고.
잠시 후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 덧붙여 군주의 후계자로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분께 위해를 가할 이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시현님이 수락하면 그들은 어스 엠파이어 식으로 처단당하게 됩니다.
처벌의 강도는 그들이 저지른 위해의 정도에 따라 나뉩니다.
이시현님은 세상을 즐기세요. 그리고 어스 엠파이어의 방식을 충분히 맛보아주세요.
처벌을 원하시면 YES, 아니면 128495736X28176156을 암산으로 해독하여 답을 적어주세요. 물론 암산이 되겠지만 적으면 곤란합니다.
터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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