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 회: 4> 제로 섬. -- >
그 후 잭 더 리퍼는 이시현과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차량 같은 것이 없어도 공간이동 같은 것들이 흔했기 때문에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행성 단위로 움직이는 이들은 말 그대로 우주시대를 본격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행성뿐만이 아니었다.
콜로니라고 해서, 행성 바깥에 떠다니는 인공구조물의 건물들도 있었다. 수십, 수백만 명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그곳들은 귀족이 아닌 이들도 돈, 그러니까 셀만 있으면 사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곳들을 둘러보고 이시현은 실로 환상을 가졌다.
이런 곳을 지배할 수 있다.
군주가 되기만 한다면.
“탐닉의 군주님께서 계신 행성을 한 번 가보실까요?”
“응.”
리퍼는 이시현과 함께 꽤나 움직였다. 일반적으로 길가에 널려있는 순간이동기계가 아니라 꽤나 대형의 건물에 들어가야 했다. 행성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과 함께 꽤 큰 규모의 ‘마법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스 엠파이어는 마법과 과학이 동시에 활용되는 문명이다. 아니, 기나 포스도 존재하고 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햐나고 물었더니 리퍼는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않고 대답했다.
“그야 황제님 세 분이 그런 유형이니까요.”
“황제가?”
“네. 세 명의 황제폐하는 각기 주력으로 삼는 분야가 다르세요. 세 분은 다들 어스 엠파이어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하지만 혼자서는, 글쎄요. 이렇게까지 키우는 건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일례로, 하늘의 황제님 같은 경우에는 무의 극의에 이르신 분이세요.”
“무의 극의?”
아니 그 무슨 무협지 같은 표현이야.
“무를 극한으로 단련하여 천선(天仙)까지 오르시고, 거기에서 무신(武神)으로, 또 인류 무예의 관리자이자 최종에 계시는 분이시거든요. 무와 기, 내공, 신비 등등. 어스 엠파이어의 인류가 튼튼한 건 다른 여러 가지 기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군주님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모든 인류에게 적법한 육체를 내린 까닭이기도 해요.”
“……그 정도면 뭐랄까, 생물이 아니라 신인거 아냐? 신 같은 느낌인데.”
“맞아요.”
리퍼는 단언했다.
“세 분의 황제폐하에게서부터 어스 엠파이어의 모든 인류가 시작됐고 완성되었거든요. 무례한 자식들은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솔직히 가능할리가 없죠.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어스 엠파이어를 지배하는 세 분의 황제님에게서 나온 거니까요.”
“나도?”
리퍼가 눈을 깜빡였다.
“나도 세 명의 황제가 가진 유전자로 완성된 몸인가?”
리퍼가 빙긋 웃었다.
“물론이죠. 시현님은 하늘의 황제님을 닮았답니다.”
몸이 튼튼하고. 혼자서도 백 명을 상대하고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며 홀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고고한 존재. 혼자만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성들은 그런 육체를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흔적만으로도 압도적인 강력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힘이 고스란히 남은 여성들은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일수에 수만 명을 죽이고 주먹으로 대지를 울리며 포효로 하늘을 울린다.
이시현은 자신의 육체가 지닌 강력함의 배경을 이제야 이해했다.
하늘의 황제라.
“다른 두 명의 황제는 누구지?”
“만물의 황제님과 죽음의 황제님이세요.”
“두 명의 성향은?”
성향. 뭉뚱그려 말했지만 리퍼는 이시현이 하고 싶은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만물의 황제님은 사상 최강의 지배자랍니다. 왕권을 창조하신 분이기도 하고요. 마도사이며 초능력자시고요. 행성 전체로 탑을 세워 그곳에서 지내시는 분이신데, 어스 엠파이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번성시킨 문명을 받아들인답니다. 마법으로 행성과 행성을 연결하는 마법진을 만들고, 하늘의 황제님이 존재함으로서 생기게 된 기와 포스를 마나와 아니마로 변형시켜 납을 금으로, 돌을 생물로 변형 시킬 수도 있는 연금술사시기도 해요. 마도사이자 사이커, 그리고 연금술사신 거예요. 덧붙여 언어를 창제하신 분이죠. 제국인은 언어에 구애를 느끼지 않아요. 시현님도 그러실 거예요. 제국어를 익히고 있는 이상 영어든 일본어든, 그 어떤 언어도 이해되고 전달할 수 있답니다.”
“무신에 마도사에……그럼 죽음의 황제는?”
리퍼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죽음의 황제님은 사후세계를 지배하며, 문명의 멸망을 부추기는 분이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음, 기계문명의 신이세요.”
“응?”
“모든 과학기술의 끝에서, 문명의 멸망을 부추기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 잔혹하고 잔악하며 생물로서 온연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음에도 기계의 힘으로 죽은 이를 되살리고, 영원히 봉사시키며, 존엄한 생명을 하나의 부품으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랍니다. 죽음의 황제님은 가장 무서우며, 두렵고, 그리고 하늘의 황제님과 만물의 황제님의 뒤에서 존재하는, 멸망의 인도자랍니다.”
결국 그런 것이다.
하늘의 황제는 생물의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일개 생물이 신까지 올라갈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말하고.
만물의 황제는 인간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며, 전인류의 사고를 하나로 엮어 ‘황제’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를 의미하며.
죽음의 황제는 폭주하는 문명의 끝에서 미소 지으며 타락을 부추기는 최종최후의 지배자다. 과학기술의 번성, 그리고 폭주. 그 끝에는 생물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하나의 일원화된 부품으로서 움직이게 될 테니까.
“……셋 다, 장난이 아니구만.”
“네. 만물의 황제 나시어 세상에 강림하사 자신과 대등한 이 불러 찾으니 우주에서 찾아온 두 분이 하늘과 죽음이었답니다. 세 분이 안 계셨다면 어스 엠파이어는 이렇게까지 강해지지 못했겠죠. 물론 다들 무서운 분이시고, 한 번 화나면 어스 엠파이어 전원이 덜덜 떨지만요.”
우주에는 이런 문명도 있다. 이시현은 새삼 각오를 다졌다. 리퍼는 그런 이시현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잭 더 리퍼와 일별했다.
그녀는 안내자로 찾아왔으니만큼 안내가 끝난 이상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녀에게 주인이 있다는 것이 샘이 날 정도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장군으로서 쓸만하다는 이유도 있고, 그녀가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가로 그녀의 입을 마음껏 사용했다. 일반적인 정액뿐만이 아닌 오물을 쏟았는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받았다. 그게 기분이 나빠져서 그만 그녀의 입에서 자지를 떼어내고 말았지만.
“이렇게 험하게 대하면 좀 싫어하는 티도 내고 그래!”
오히려 이시현이 화를 내며 외칠 정도였다.
그 말에 리퍼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싫지 않아요. 험하지도 않고요. 그거 아세요? 저는 주인님께 섹스 비디오가 찍힐 때 해체를 당했답니다.”
“……뭐?”
“스너프 무비라고 하죠? 시현님도 이제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시니 여자라는 개체를 동격의 대상으로 여기지 마세요. 생물로 여기지 마세요. 시현님은 콘돔을 가지고 애정으로 대하나요? 정액이 든 콘돔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하나요?”
이시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거예요.”
“아니. 비유를 잘 모르겠어.”
“네? 이런 비유를요? 제법 적절한 편 아니었나요?”
“콘돔을 써본 적이 없어…….”
‘이시현’이 되기 전에는 여자와는 연이 없었고, 현재 자신은 콘돔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리퍼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었다. 웃기겠지, 그래, 웃길 거야. 이시현은 슬픈데도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은 감정으로 눈가를 가렸다.
“야, 이것 참 실례했어요. 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것까지는 없지. 그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음, 글쎄요. 제가 나서야 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절 필요로 한다는 뉘앙스라 기분이 좋은 걸요.”
이시현은 잭의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몇 번 쓸었다.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친 주제에 눈가 가장자리에 무슨 꼬리처럼 두 줄기로 길게 흘러 턱까지 내려온 머리칼이 있다. 단아한 외모에, 꽤 귀엽다고도 볼 수 있는 인상. 눈이 크고 피부는 희며, 턱선이 굉장히 섬세하여 무슨 인형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시현의 손길을 즐기듯 그녀, 리퍼 또한 눈을 반쯤 감고서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살짝 기울였다.
“오늘은 즐거웠어.”
“안내자로서 기쁘네요. 시현님이 기뻐하셨다니까요.”
“응. 그래서 제법 알게 된 사실들도 있고, 선물까지 받았지. 세이브 포인트, 이거 정말 귀한 거지? 이걸 그냥 선물이랍시고 준 그 녀석은 도대체 누구야.”
이시현이 의미심장하게 리퍼를 바라보았다. 리퍼는 시선을 피하면서 가슴 앞에서 손가락을 배배 꼬고 있었다. 결국 말하지는 않을 모양인 것 같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묻는 것도 좀 그렇다.
“아니, 그냥 혼자 생각한 것뿐이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 나의 승리를 빌어달라고.”
“네. 적재적소에 활용될 무장을, 어울리는 말에 대입하여 승리를 거두시길. 체스와 장기 사이에서 바둑을 하겠다고 하셨지요?”
“생각만은 그래. 하지만 내가 바둑을 택하겠다고 확신하며 말한 적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지?”
“나름대로의 정보는 전해지니까요. 그래서 저도 알게 됐어요. 후후. 그럼, 체스와 장기 사이에서, 바둑을 택하신 이시현님. 부디 전승하시길. 최후의 승자가 되어주세요.”
이시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홀로그램이었던 것처럼 리퍼가 사라졌다. 머리카락 일부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그녀의 앞에서 눈을 한 차례 감았다. 그리고 떴을 때 이시현의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시현은 모텔의 초라한 방에 있었다.
꿈이었던 것처럼, 앞서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하지만 꿈은 아니다. 그것만은 알 수 있다.
리퍼와 함께 떠나기 전에 머물렀던 방이었다.
아직도 강주희는 잠들어 있었다.
아니, ‘아직도’라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다. 어스 엠파이어의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가니까. 그곳에서 한 시간을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0.2초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시간은 금이다’.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시간을 동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들이 있다.
황제 중 한 명이 그렇게 했다고 하던가.
황제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그들의 힘을 생각해보고 심장이 두근 울리는 걸 깨닫는다.
일차 목표는 이 싸움의 승자가 된다.
군주가 된다.
그걸 위한 준비를.
이 세계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해야 했다.
이시현이 선택한 보드 게임은 바둑.
바둑은 집을 내는 게임이다. 흑돌과 백돌이 많이도 필요 없다. 그것을 판에 놓아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의 숫자를 겨루는 게임. 장기와 체스와는 아예 기본적인 승리방식이 다르다.
물론.
“그렇게 끝낼 생각은 없지만 말이지.”
이시현은 침대로 다가가 강주희의 유방을 주물렀다. 강주희가 옅게 달뜬 신음을 냈다.
무장으로 만드는 방법은 어스 엠파이어의 교육을 통해서 알았다.
“슬슬, 무장으로 만들어볼까?”
장군으로 만드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비장의 패로 아껴두자. 무장으로 두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강주희는 사회상으로도 도움이 되고, 잭 더 리퍼를 제외하고 첫 여자였다.
무장이 되면 이시현 본인에게 굴복할 것이다.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따를 것이다.
싸우라면 싸울 것이다.
이시현과 일심동체가 되어서 싸울 것이다.
하지만 이시현은 싸우기로 결의했다. 싸워 승리한 후 어스 엠파이어의 군주가 되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강주희든, 남민아든 이용할 것이다.
‘물론…….’
굳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편 이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악마가 되어도 좋아.”
그 찬란한 미래를 꿈꾸기만 하다 죽어버리는 것도.
게임을 포기하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도 전력으로 거부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