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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44화 (44/141)

< -- 44 회: 4> 제로 섬. -- >

어쭈, 이 자식이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반말이네? 뭐, 이시현은 관대히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외형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게 어스 엠파이어 사람들의 연령이기도 하고. 자신도 반말을 하고 있지 않던가.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여성 또한 굉장히 매력적인 소녀였다. 주황색의 머리를 양 갈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사람답지 않은 초록색 눈동자가 이시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이시현은 그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리퍼를 불러 다시 먹을거리를 사러 향했다. 그가 말을 걸어 붙잡기 이전까지는.

“넌 이곳의 주민이 아닌가?”

“음? 어떻게 알았지?”

“그야…….”

미소년은 뭔가를 말하려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시현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다 리퍼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둡지? 리퍼가 말을 꺼내려했지만 소년의 말이 좀 더 빨랐다.

“뭐, 그런 건 사소한 문제지. 넌 무얼 할 거지?”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는데. 식사할 거다. 그리고 돌아갈 거고.”

“식사인가.”

“같이할래?”

“그러지.”

문득 길을 가다 부딪친 쪽이 남성이라는 사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시현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우연찮게 사내와 부딪쳤고 사내가 낙엽처럼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에 별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남자끼리 보통 부딪칠 수 있나? 남자 곁에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부딪치기 전에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식당은 컸다. 그것도 매우 컸다. 손님은 여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남자도 일부 있었다. 그녀들은 이시현과 소년을 보고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도리어 시선을 외면하려 애썼다.

“식사하는 것도 인연이고 하니, 이름부터 물어볼까. 나는 이시현이다. 넌?”

“이름? 언(言)이라고 한다.”

“언? 외자야? 성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되묻자 소년은 피식 하고 옅은 실웃음을 흘렸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군.”

역시 이상한 대답이었다.

나온 식사는 이시현이 알고 있는 기존의 상식들에 그리 대치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21세기의 고급 음식으로 테이블 전체를 채웠으니까. 의젓하게 식사를 하면서 이시현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깨작거리면서 음식을 먹다가 이내 손을 놓아버렸다. 곁에 앉아있던 소녀가 이것저것 음식을 떼어내 입안으로 가져다주었다.

어딜 보든 편식하는 애새끼 같았다.

“뭘 그렇게 보나?”

“편식 하는 애새끼 같아서.”

“음식을 먹은 적이 오랜만이라.”

“이름도 없고 음식을 먹은 적도 오랜만이라고? 뭐 그런 난민고아 같은 게 다 있어. 아니, 난민 고아일리는 없으니 너 대단한 사람이냐? 군주 같은 그런 거?”

“그렇다고 치지. 그런데 너.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대답도 시원찮게 하면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이시현은 문득 짜증이 났지만 상대가 군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세를 조금 죽였다. 아까부터 리퍼가 입을 열지도 못하고 머뭇대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주변 공기도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방인. 묻도록 하지. ‘기억하기도 싫을 만큼 비참한 과거’가 있다고 치자.”

소년이 질문했다.

“패전(敗戰). 기억하기도 싫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죽고 싶으며 모든 의욕이 떨어지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을 만치 가혹한 패전이 있다고 치자. 그 패전을 치렀던 기억을 지운다면, 그리고 패전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어 그리 했다면 괜찮은 건가? 그들의 왕이 있어 그리 했다면.”

“생각이 좀 초월적인데 그런게 가능한가? 뭐,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정상이겠지.”

“두 번째 질문이다. 과거가 사라지니 비참한 과거를 만들어낸 그들의 본래 성격이 되살아났고, 왕은 한심함과 동시에 비애를 느꼈다. 몹쓸 과거였기에 사람들이 다 절망하고 있었다만 그 과거가 사라지자 바뀐 것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왕은 어떡해야 하지?”

“흠……고민되는데.”

패전의 기억이 있어 사람들이 다 죽어간다. 왕은 불쌍함을 느끼고 과거를 지워버렸다.

그렇게 패전의 기억을 지웠더니 사람들이 패전을 일으키게 한 성격대로 살아가고 있다. 왕은 이번엔 한심함을 느꼈다.

“왕이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걸.”

“그런가.”

“하지만 왕이 그들의 삶을 살아본다는 건 어때?”

“무슨 말이지?”

“왕은 여기서 초월적인 주체잖아. 패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고 기억을 잊었다고 평소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왕은 그들의 상황에 빠져 들어가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우선 아닌가? 그게 뭐라더라. 신이 인간의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서? 뭐 그런 식으로 해서 내려온 화신(化身)처럼.”

이시현의 말에 소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쓸모없는 일이 될 것 같지만 이해는 했다. 그러도록 하지. 이방인, 언젠가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 될지 모를 사내.”

소년이 일어섰다.

그리고 옆에 선 주황색 양갈래 머리 소녀에게 턱짓을 했다. 소녀가 품에서 손톱만한 보석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자그마한 보석은 다이아몬드 같았다. 하지만 어스 엠파이어에서 이런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이시현은 이게 과연 값진 선물인가, 하찮은 선물인가 고민할 때였다. 소년이 사라졌다. 마치 지워진 것처럼. 이시현과 부딪치고 나서야 알아차렸을 때처럼 기척도 흔적도 없었다. 미소년을 따라다니던 소녀 또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소녀가 곧 고개를 젖혔다. 이시현이 순간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일그러진, 흉악한 얼굴이 된 소녀가 말했다.

“죽여 버리려다 참는다. 앞으로 네년과 네 주인을 주목하겠다. 입 닥치고 참회해라. 천년 만년 사과하고 무릎 꿇고 비참해해라.”

소녀 또한 공기에 씻겨 사라진 것처럼 사라졌다. 위태위태하게 앉아있던 리퍼가 풀썩 테이블에 상체를 떨어뜨렸다. 이시현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아까부터 왜 그래?”

“너무 무서운 분을 만나서……그래서…….”

“그 소년? 아니면 장군으로 보이는 여자애?”

“두, 두 분 모두……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원하지 않는 한…….”

리퍼가 이렇게까지 떨 줄이야. 생각이상으로 거물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시현은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리퍼에게서 그들의 정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는 경쾌하게 어조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선물이라고 줬는데 이건 뭐지?”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기 때문인지 조금 낯빛이 밝아진 리퍼가 대답했다.

“세이브 포인트(Save Point), 육체보관함이에요.”

“응?”

뭔가 초절한 명칭을 들은 것 같았다.

“이 보석을 가지고 있는 한 죽지 않아요. 죽어도 되살아나죠. 마지막으로 세이브 포인트에 닿은 생물의 신체정보를 기록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가루가 되도 재구성하거든요. 영혼을 수확하거나 영혼을 제거하는 방법에 당한다면 몰라도요.”

“말도 안 돼……. 이 세계엔 그런 것도 있어?”

이시현이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어스 엠파이어는 정말 얼마만큼 발전한 걸까.

“이거 얼마나 좋은 거야?”

“많이 좋은 거죠. 팔면 장군 한 명쯤 살 수 있을 만큼.”

“정말? 팔자!”

리퍼가 싱긋 웃었다.

“시현님이 보관해 가지고 계세요. 혹여 모르잖아요. 가장 중요한 말이 있거나 혹은 시현님이 전장에 나서야 될 때. 그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음, 역시 그런가. 이런 걸 그냥 주다니 고마운데.”

리퍼는 히히낙락해 하는 이시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 말은 사실이다. 안내자로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빠진 말은 있었다.

‘많이 좋은 거죠.’

리퍼는 굳어진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번호가 새겨진 장군을 한 명쯤 살 수 있을 만큼.’

어째서.

리퍼는 왜 그 ‘소년’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몰랐다.

제국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없을 그가 영문모를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는지도. 하지만 잊으라고 말했다. 그의 장군인 주황색 양갈래 머리의 소녀, 조양장군(朝陽將軍) 세미라미스(Semiramis)의 협박이 없었더라도 그리했을 터였다.

‘그보다.’

리퍼는 그런 행운을 걸머쥐어 세이브 포인트를 획득한 이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운이 좀 좋은 것 같네요? 그런 보물도 얻고.’

세이브 포인트는 그냥 좀 좋은 물건이 아니다.

공간을 베어 없앤다던가 권능으로 죽인다던가 절대소멸 마법 같은 걸 걸어도 보석만 무사하면 육체는 반드시 살아난다. 그만한 물건은 어지간한 군주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들이다.

‘어쩌면.’

리퍼는 기뻐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시현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생각을 마쳤다.

‘정말로 시현님이 승리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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