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 회: 3> 배고픔. -- >
회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시현 또한 회장을 바라보았다. 태양그룹의 회장쯤 되는 사람 앞에서 다리를 꼰 채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는 사람.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말을 더듬거리는 것도 없다. 거물 아니면 미친놈.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들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무언가.
강의곤이 이시현과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돈을 주지. 얼마가 필요하지?”
“얼마나 주실 건데요.”
“얼마냐고 물은 건 나다만.”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회장님의 목숨을 구해준 값은 얼마지요? 돈? 그게 전부입니까?”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강의곤이 낮게 웃었다.
“딸을 가져가게. 딸에게 준 것들도.”
“인재 하나와 돈이군요. 인재는 뭐, 괜찮죠. 그리고 돈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고. 하지만 부족한 게 있는데요. 회장님이면 권력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시현이 다소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면 됐지. 더 가져가려고 하다니 욕심이 많군.”
강의곤은 매우 인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회장님의 가치를 생각하세요.”
아 진짜 이 영감이.
“내 가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눈물이 날 것 같군.”
어린놈이 어딜 다 가져가려고.
“생각이 바뀌려면 무얼 더 해드려야 하나요?”
“그렇게까지 나오면 또 거절할 수가 없군. 권력? 필요한가? 그렇다면 권력에 선이 닿을 수 있는 자리를 주지. 그 자리에서 자네의 능력을 발휘해보게. 시간과 행운이 충분하다고? 그렇다면 더 좋군. 계열사를 하나 주지. 그걸로 권력까지 줄을 대게. 그거면 어떨까.”
“저 한가한 남자 아닙니다.”
“어디가서 영업 뛰라는 소리는 안 하네. 아, 그 얼굴이면 최고로 걸출한 영맨이 나오겠지만. 가정법원에서 자주 보게 생긴 얼굴이야.”
망할 영감아. 그렇게 나오실 겁니까.
“회장님의 따님이 산더미 같은 건강식품을 사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빌어먹을 애새끼가. 그렇게 나온다면?
“보고된 다음 날 내 딸이 넣어주는 사식만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해주지.”
이시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사람 한 명 더 붙여주십시오.”
“S대를 원하나 Y대를 원하나.”
“SP.”
“그녀군.”
“그녀입니다.”
“데려가게.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걸.”
“충분히 조심할 겁니다. 혀가 잘려나갈 뻔 했거든요.”
이시현이 혀를 내밀고 하는 말에 회장은 살짝 놀랐다.
“언제 만났다고 벌써 혀를 넣어.”
거기서 놀라냐, 이 색골 영감아.
“남자라면 구멍이 있으면 넣고 봅니다.”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회장이잖아. 영감이잖아.
“서류를 그 집으로 보내주지. 그리고 고마웠네.”
“별말씀을.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살리는 건 천성 같은 거라서.”
“게임에 이길 수 있겠나?”
“지려고 게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군. 하고 회장이 인정했다.
“이기면 뭐가 되나?”
“스와질리어가 세계 만국어가 됩니다.”
“한국어로 하게.”
“그럼, 건강히 지내시길. 아, 섹스동영상 같은 건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잠자리 조심하게.”
“어째서요?”
“아비 앞에서 딸과의 비디오를 함부로 말하는 그 말에 분노한 아버지가 킬러를 부를 테니까.”
“킬러는 여자로 부탁합니다.”
한없이 진지해질 수 있는 사람이기도, 나름대로 어린 아이와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돈만을 아는 남자라고 들었는데 ‘돈을 버는 것 말고 딱히 다른 삶의 이유’가 없기 때문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로 태어났기에, 애초에 부를 가지고 있었고 기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순탄한 길만을 걸어왔고, 다른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이시현은 회장에게서 편한 길을 알아버리고 그 길만을 걷고 있는 이를 보았다.
편한 길을 걷던 인간은 다른 길로 갈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길을 찾아 땀을 뻘뻘 흘리는 이들을 볼 수는 있다. 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멍청해보이고 한심해보이겠지만, 자신이 걷지 못하는 길을 순탄하게 걷는 이를 보면 흥미를 느낄 것이다. 자신은 걸을 수 없는 길을, 자신만큼 편하게 걷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 흥미가 솟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을 보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밟아온 길의 완주와는 분명히 다른 골문이 나타날 테니까.
위험하다. 그만큼 도움이 된다.
이시현은 앞의 중년인이 최고의 스폰서임과 동시에 최악의 도우미라는 걸 동시에 깨달았다.
“만나서 반가웠네.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도록 하지.”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시현은 그가 내미는 손을 쥐었다.
따스한 손은, 그 이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지원을 하나 해주도록 하지.”
“고맙군요. 대가는 뭡니까.”
“지원이라고 해도 겨우 말 한 마디뿐이야. ‘하얀 것’이 무얼 하는지는 아나?”
이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회장을 바라보았다. 강의곤은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다. 역시 그 하얀 것은 이 녀석이 말하는…….
“하얀 것은 BP기업의 후계자지.”
세계 최고로 거대한 기업. 그리고 최고의 돈을 버는 기업. 세계에서 최고로 석유시추기술이 뛰어난 기업의 후계자.
“그가 한국에 와 있네.”
이시현은 적이 정말로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놈들, 벌써 그런 자리에서 위치해 있는 건가.
“고맙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정보였습니다. 빚은 갚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지.”
빚으로 남겨둘 정도로 소중한 정보였다. 이시현은 문을 나섰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말았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적들에 대해 새삼스레 감탄하고 만다. 흑공자와 백공자. ‘인간 사회에 녹아든’ 두 명 중에서 백공자의 정체만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비범함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거기까지 하나.’
정말로 방심해선 안 된다.
정말로. 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선. 그런 괴물들을 꺾어야 한다.
각오가 무뎌질까 두려워하며 이시현은 문을 열었다.
SP들이 밖에서도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 남자에게 굉장히 무례해도 될 것 같은 이기적인 가슴을 가진 채 백의를 입고 서 있었다. 이 여자 뭐지? 의아해하는 이시현은 그녀가 곧 의사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예쁜 외모라 의사처럼 안 보였다. 백의를 입은 여의사 또한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굉장한 미남이네요.”
“나도 깜짝 놀랐어. 엄청 미인인데.”
“고마워요. 하지만 욕심내진 말아요. 당신 같은 사람과는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처음으로 차였지만 별로 가슴이 아프진 않군.”
이시현은 서늘하게 웃고는 그녀를 외면해 지나갔다.
“내 애인이라 주장하는 여자 가슴이나 만지러 가야지.”
굉장히 예쁜 여자였다.
하지만 동하지는 않는다. 어째서일까. 그 냉정한 인상 때문에? 아니면 의사라는 신분 때문에?
다리가 부러지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에도 의사는 돈이 없으면 꺼져, 그런 식으로 대답했었다. 오감이 예전보다 예민해진 덕분에 여성 특유의 채취에 병원 특유의 냄새가 섞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괴한 냄새. 아니, 그 냄새 속에 섞여있는 남성의 정액 냄새 때문인 것 같다.
저렇게 차가운 인상에 시니컬한 눈빛인데 남자를 품고 왔다니. 보기와는 다르군. 이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시현이 나온 병실로 의사가 들어간다. 태양그룹 회장인 강의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원장. 진료 나온 건가.”
“뒤에 애들 없는 거 보면 아시잖아요.”
원장? 이만한 병원의?
이시현은 떠나려던 이시현은 생각이상의 말을 듣고 다소 멍해졌다. 30대도 안 되어보였는데? 태양그룹의 회장이 입원할 정도의 병원이다. 이 나라 최고의 병원인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곳에서 원장? 가능한 일인가?
이시현은 닫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강주희는 아버지, 즉 회장의 명령으로 다른 SP의 호위를 받으며 어디엔가 잡혀있다. 이시현이 돌아올 때 전화하기로 했으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시현은 SP들의 시선에 마주 응시해주고서 문가에 귀를 기울였다.
흥미가 생겼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예쁜 여자지만, 이시현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위치가, 그녀의 서 있는 자리가 대단히 높은 곳이기 때문에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뭐, 남자 애인 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한 번 박아주면 자신을 따를 테고.
“몸은 건강하시군요. 오늘이라도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하긴, 지나치게 몸이 튼튼해졌지.”
“다행입니다. 그보다 밖에 나가게 되면 많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중동의 테러리스트가 엄청난 폭탄을 한 번에 터뜨려 건물을 완전히 붕괴시켰다고는 해도, 태양그룹의 호텔이니만큼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요.”
“나도 피해하지만 말이지.”
“천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좀 더 쉬어도 될 겁니다.”
“그러도록 하지. 뭐, 맡겨야 될 일을 오늘 하나 맡기기도 했고.”
내 이야기군. 이시현이 담담하게 회장의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