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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35화 (35/141)

< -- 35 회: 3> 배고픔. -- >

“좀 달릴게.”

마침내 정체구간을 벗어났는지 강주희가 신나서 말했다.

이시현이 턱을 괴고 있다가 밋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급 스포츠 카가 달린다. 지난 나흘. 알몸으로 뒹굴던 동안 단미애의 차량과 부딪쳐 부서진 부분이 수리가 되었다. 이렇게 쉽고 빠르게 수리가 되나 싶기도 한데, ‘이런 고급차를 모는 재벌들’이 돈을 각출해서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차량의 부품을 보관한. 불법이지만 아는 이는 재벌들뿐이라고.

세상 정말로 좋다.

이시현은 느긋하게 바람을 즐기며, 국내 최고의 병원으로 향했다.

이시현은 몰랐지만 그곳은 흑공자가 지배한 영역이기도 했다.

김유나.

병원의 원장이자 흑공자가 사용할 수 있는 말 중 하나, 사(士)의 위치에 있는 무장이었다.

***

“이시현입니다.”

이시현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생각이상으로 예의를 아는군.”

“일단은요.”

이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SP로 철통방어가 되어 있는 특별병실. 그곳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가 한 명.

태양그룹의 회장 강의곤은 매우 건강한 몸을 한 채로 환자복을 입은 채 앉아있었다. 별로 환자 같지는 않다. 타고난 건강도 있겠지만 황금의 침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신체를 비롯한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능력의 향상을 불러오는 도구. 황금의 군주라고 하는, 군주(君主, Lord)가 제작한 것이니 위력은 알만했다.

황금의 군주는 강력한 군주였고 장군의 수는 누구보다도 많았는데, 이 황금의 침과 그 이상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장군이 되지 못한 이들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장군의 시험에 들게 하고, 장군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확언된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시현은 그런 사항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황금의 침을 목에 찌름으로서 황금의 침 안에 들어가 있던 나노입자가 몸속을 돌아다니며 상처난 부분을 수리(!)하고 잠들어있는 세포 모두를 일시에 깨워 어마어마하게 활력이 넘치는 몸으로 만든다.

머리도 어마어마하게 영리해지고 모든 신체능력이 상승하며, 자신이 특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들조차도 강화되는 것이다. 이때 쓸모를 다하고 죽어가는 세포조차도 활력을 찾게 되고, 짧아진 텔로미어가 다시 원형을 복구하는 등, 건강해지고 몸의 시간이 되돌려진 듯한 느낌마저 받게 된다. 나노입자는 정해진 시간동안 기능한 후 곧 몸에 무해한 것이 되어 밖으로 배출된다.

침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나노입자의 수가 정해져 있으니 사용할 수 있는 횟수도 적다.

태양그룹의 회장은 황금의 침을 두 번이나 맞았다. 건강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그렇지. 이 병원이 국내에서 제일 좋은 데거든.”

이시현은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을 했다가 곧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웃는 것은 화가 났다는 증거다. 이시현은 화를 내고 싶을 때 도리어 친절한 미소를 짓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몸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시현이 웃자 회장은 눈가를 씰룩였지만 곧 그의 입에서 나온 비수 같은 말에 살짝 입매를 굳혔다.

“과연. 병원이 좋은 거군요. 그런데 영감님. 무슨 일로 불렀습니까.”

영감님? 이 녀석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내 딸의 옆에 붙은 놈팽이를 좀 보고 싶어서.”

놈팽이? 아, 그래. 계속 해보자 이거지.

“그 놈팽이가 영감님을 구해준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는 건가요.”

“초기 치료가 실패해서 몸에 부작용이 남은 것 같은데 보상해주겠나?”

“왜 영감님이 제일 욕먹는 재벌 중 하나에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 걸 알겠군요. 그게 불러서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돌아가야죠. 그리고 내일 국내 삼사 기사 일면, 태양그룹 영애의 섹스동영상 유출, 빵.”

“그 여자의 아비로서 용납할 수가 없군.”

회장이 손을 슬쩍 들었다. 호화로운 병실에 있던 SP들이 그림처럼 움직였다. 이시현이 히죽 하고 웃었다.

“해보겠다는 겁니까?”

“주먹으로 벽을 뚫었다고 들었는데.”

“손가락으로 벽을 떼어낼 수도 있죠.”

“무슨 무공인가? 산에서 10년 이상 머물면서 중국 사천 년 무술을 익힌 건가?”

“중국제는 쓸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몸이 좋은 겁니다. 쓰는 사람이 뛰어난 탓도 있고.”

이시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링거 같은 수액을 담은 팩을 연결할 도구들이 보였다. 회장이 그것을 보고는 이내 이시현의 의도를 눈치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현이 그것을 들고 반으로 접었다.

-꽈직.

짧은 소리. 하지만 분명히, 쇳덩어리가 반으로 꺾였다. 강철도 아니고 안도 비어있지만 그렇다고 사람 손으로 반으로 접힐 정도는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우직.

쥐고 있는 부분이 바스라지면서 내는 소리다. 이시현이 손을 떼어내자 반으로 접힌 기구가 손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시현은 그 상대에서 한 번 더 접었다.

두 번 접은, 즉 네 번 접힌 쇳덩이를 들어 보이며 이시현이 으스댔다.

“얍, 르완다 반군전용 특공무술.”

회장이 박수를 쳤다. SP들이 소리 없이 신음했다.

“SP가 필요할 땐 르완다 반군을 영입해야겠군.”

“소말리아 해적도 추천합니다. 물론 수갑은 채운 후에.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죠. 무슨 용무입니까, 영감님.”

“영감님이라고 부를 텐가?”

“그럼 회장님?”

“내 회사의 사원도 아니잖나.”

그럼 뭐라고 부르란 말이야. 이시현은 좀 망연하게 강의곤을 바라보았다. 강의곤이 마른 기침을 했다.

“금쪽같은 딸을 낚아챈 놈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지.”

“들은 척도 않는 군요.”

이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곧 침대 아래서 의자를 뺐다. 실례, 눈짓을 한 다음 그는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자세가 곧다. 다리를 꼬고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의 자세는 그림과 같은 모습이었다.

“기대 이상이군. 딸아이가 빠질 만도 해. 눈이 어지간히 높지만 그럴 법한 나이라서 이해를 했더니, 정말 그 녀석의 취향 그것을 넘어서는 이가 나왔군.”

“감사합니다.”

“자네, 어디서 왔나.”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현재와 과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 말을 들어보니 조사를 해보신 것 같군요. 왜요, 너무 평범했나요?”

잭 더 리퍼, 정확히는 어스 엠파이어의 누군가. 아마도 탐닉의 군주가 해주었을 위조는 완벽한 모양이었다. 태양그룹의 회장쯤 되면 자신의 딸에게 붙어있는 놈팽이를 조사하는 것이 당연. 별 거 아닌 녀석이라면 그냥 딸 모르게 제압을 하거나, 조금 곱게 하려 한다면 돈을 주고 떠나보내는 방법 정도가 있을 터. 하지만 회장은 이시현을 조사해보고, 현재를 보고 흥미를 느꼈다.

이 녀석은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빨라지겠군. 유년 시절 뭐했나?”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이시현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진.”

“일부러?”

“그렇지는 않지만.”

이시현은 옆으로 시선을 기울이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바뀔 계기는 충분했지요.”

언젠가 이시현이 아무도 못 본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일대기를 쓴다면 첫 문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멍청이처럼 살았습니다]

과거의 자신은 정말로 멍청했다. 너무나 멍청했다. 지독하게 멍청했다. 그러니 그런 개 같은 꼴을 당한 것이다. 이시현은 과거를 떠올리며 묘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회장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꿈이 뭔가.”

“꿈, 흠. 목표라고 한다면 우선은 게임에 이기는 것.”

“게임?”

“네. 저보다 앞서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 둘.”

이시현은 입을 열었다.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알아듣지 못하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그 게임을 하는 이들을 꺾고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현재의 목표는 그렇습니다.”

“그 게임이란 게 뭔가.”

“굉장히 잘난 놈 둘이서 서로가 더 잘났다고 싸우고 있는 거죠. 하얀 놈, 까만 놈. 두 놈이 있습니다.”

‘굉장히 잘난 하얀 놈’에서 회장은 어느 한 사람을 생각했다. 회장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이시현을 바라보았다. 정장을 입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올백으로 쓸어 넘긴 자. 머리칼은 회색. 옅은 보라색의 눈동자가 굉장히 매력적인, 다소 위압감도 있고 자신만만함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인간.

“과연.”

‘그런 부류’인 모양이었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태양그룹의 회장인 강의곤은 직감했다.

‘그 하얀놈’이 강의곤이 칭찬했던 석유시추 회사의 그놈일 것이라고. 그런 놈과 게임을 한다는 건 대단한 메리트다. 게임이라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를 적으로 맞이하고 싸워 이기는 것이 목표라는 건 이시현이라는 인간을 제법 알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게임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군.”

“그냥 게임입니다. 게임. 하하.”

“말 할 생각은 없나보군. 어떻게 이길 셈이지?”

“제가 아주 늦게 시작한 덕분에 나름대로 어드벤티지가 있거든요. 그들이 치고 박고 싸울 동안 힘을 모으고 이것저것 할 겁니다. 시간도 좀 있고 하니 준비한 걸 풀어야겠지요.”

과연. 앞서 그가 말했던 ‘게임에 참여하는 둘과 그’라고 표현한 까닭은 이유는 그가 게임에 도중 참가했기 때문인가.

회장의 짐작은 정확했다. 한 그룹의 총수라는 것은,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라는 것은 아무리 늙고 노쇠해도, 병이 들고 지쳐도 그런 통찰을 발휘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뭐지?”

“얼레? 믿는 거예요? 그런 엉뚱한 헛소리를?”

“물었다만.”

“돈. 권력. 인재. 시간. 정보. 행운.”

“그것 중에서 자네가 가진 것은?”

“시간. 행운. 그리고 나의 능력.”

이시현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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