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 회: 3> 배고픔. -- >
카르나라고 지칭한 가짜 장군이 양손을 펼쳤다. 콘크리트조차 녹여버릴 초고온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타올라 창으로 변한다. 그 창을 던진다. 던지는 동작을 보고 가면의 여자는 피했다.
확신이 생긴다.
이 여자는 장군이 아니다.
하긴, 그럴 것이다.
갑자기 둘에게 주어진 퀘스트가 하나.
그들이 거점을 틀고 있는 서울 지역의 아홉 방위를 차지하라는 퀘스트가 주어졌다. 각기 가까운 곳부터 차지하기 시작하면 네 방위를 차지하는 건 손쉽다. 그러나 그들이 소월하게 차지할 수 있는 건 네 곳 뿐. 천원이라 불리는 가장 포인트가 높은 곳은 둘의 거점에서 딱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천원(天元), 바둑판의 중간점.
비유겠지만 천원이 위치한 곳은 태양호텔이었고 그곳에서 흑, 백공자의 세력이 5분 이상 지배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흑공자와 백공자는 갑작스런 퀘스트를 받았다.
퀘스트는 갑자기 도시의 어느 곳을 점령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땅을 사서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곳을 일정기간 점유하고 영향력을 끼치면 소유주의 것으로 인정한다는 말이었다.
퀘스트가 지정한 곳은 태양호텔. 그곳을 천원(天元)이라고 표현한 뒤 호텔을 초토화시킨 후 5분간 무장 및 장군이 한쪽 세력 밖에 없도록 만들라 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틀림없이 최강의 파괴력을 요구한다. 그야 거점을 지배하려면 무자비한 폭력, 파괴력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점거하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 간단한 결론이다. 물론 그런 간단한 결론이 여기서는 독으로 작용했지만. 가면의 여자는 가면 속에서 스산하게 웃었다.
행운? 아니면 짐작? 필연?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자신만만하던 카르나의 얼굴에 낭패가 섞인 것을 보면서 가면의 여자는 쾌재를 불렀다.
수만 도의 불길 속에서 가면의 여자는 느긋하게 몸을 움직였다. 들고 있던 칼이 녹아내릴 지경이었지만, 타이트한 슈트로 몸을 죄고 있는 글래머한 여성은 불길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자. 자칭 장군양. 그럼 난 장군을 죽여 볼까. 아하하하핫.”
“건방진 년이…….”
카르나가 이를 갈았다. 불꽃이 현현하여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가면의 여성이 생각한 예상대로다.
그녀는 무장이었다. 카르나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광신장군이라 표현한 건 속임수였다. 그것도 꽤 하급무장. 물론 상급무장으로서 활용할 여지는 있다. 체스의 말인 비숍의 능력일지 본연의 능력일지는 모르지만 창을 만들고 뽑아서 휘둘러 엄청난 고열과 폭음을 일으키는 힘. 무장은 물론 장군조차도 불꽃 속에서 타들어갈지 모르는 고온. 그러나 그것뿐이다. 가면의 여성은 불꽃에 면역이었다. 이걸로 승부는 났다.
***
“바둑판의 아홉 점을 점거하라고? 각기 점수가 있고 천원점이 가장 점수가 높아?”
흑공자는 갑자기 생긴 퀘스트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 퀘스트를 주는 놈은 도대체 누구지? 탐닉의 군주인가? 아니, 그놈은 그냥 지켜보는 걸로도 즐거워할 놈이다. 아마 킬 더 킹을 주관하는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게임을 진행하면서 퀘스트를 통해 물자를 비축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갑작스레 바둑 용어인 ‘천원’이 나오는 것은 좀 이상했다.
“나와 놈, 모두에게 주어진 거군. 그럼 꺼림칙해도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어느덧 흑공자는 한국의 암흑가를 손에 넣었다.
무장 한 명씩만 조직에 처넣으면 그걸로 끝난다.
하루에 세 개씩. 목이 꺾이고 눈알이 뽑혀나가는 와중에 공포에 몸을 떠는 이들은 흑공자의 부하가 되었다. 흑공자는 돈이 많았다. 그리고 힘도 있었다. 자신을 위한 여자도 존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흑공자는 조직원이 보기에는 외계인과도 같은 이상한 힘을 사용했다.
약 3개월. 서울지역 대부분의 조직가를 지배한 그는 경찰과 같은 국가기관의 수색조차 무마시키기 시작했다. 높은 사람들의 딸이나 아내를 잡고 약간의 협박을 가하고, 보복하거나 신고하려는 이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보여주면 끝난다.
그리 좋은 지역은 아니지만 아지트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보안시설 깔린 저택.
외부에서 들어오려면 하고많은 난관을 거쳐야하는 아지트에 앉은 흑공자는 새로 생긴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말’을 불러 모았다.
“퀘스트의 달성조건은 태양호텔에 무장 혹은 장군이 되는 말이 한 세력만 남아 3분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군. 상품은 장군의 셀인걸.”
“장군의 셀이군요. 여태껏은 무장의 셀만 건네주었는데 장군의 셀이라……. 강력한 무장을 만들 수 있겠네요.”
말을 불러 모으기 전부터 이미 흑공자의 발치에 있던 미모의 여성은 흑공자가 신은 새까만 구두코를 핥으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쾌락의 늪에 취한 듯 잔뜩 풀린 웃음은 색정적이면서도 어쩐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장군의 셀을 선택할 수 있군. 종류는 키루스(Cyrus the Great), 아르고스(Argos),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백기(白起)…….”
흑공자는 명단을 읽다가 멈칫했다.
“백기? 왜 군주의 호군(護軍)이 여기에 나오지? 군주를 지키는 장군의 셀을 구했다고? 어떻게? 군주가 허가해주나? 불가능한데.”
흑공자가 신은 구두를 핥던 미모의 여성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백기면 그건가요? 파탄왕(破綻王)의……?”
“그래. 종류 불문하고 80만의 생명체를 맨틀로 처박아버리는 갱(坑)을 가진 괴물이지. 장군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다 처박히고 말아. 물론 그녀도 그녀지만 그녀의 주인이 파탄왕인데……이 작자는 탐닉보다도 서열이 높은 군주라고.”
“그렇다면 퀘스트를 제공하는 측은 탐닉이 아닌 모양이네요. 아마 군주들의 모인에서 수락한 것이 아닐까요?”
미모의 여성이 던진 의문에 답이 있어 흑공자는 침묵했다. 그렇다면 후계자쟁탈전은 지금 공개채널에 공개되고 대신 그것을 보는 군주 및 귀족들이 상품을 내걸고 좀 더 치열한 싸움을 유도하는 거군. 흑공자는 거의 정확한 상황판단을 마쳤다.
“그렇군. 그렇게 납득하지. 그럼 다음 문제가 있군. 갑자기 바둑의 말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 바둑판의 중심에 있는 그것이 천원이잖아.”
이상하다.
장기와 체스의 말을 사용하고 그에 관한 룰로 싸우고 이는데 배경에 바둑이 들어갔다. 도대체 퀘스트를 주는 놈은 어떤 미친놈일까. 의문을 제시해보지만 하지만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내려진 퀘스트는 바뀌지 않았다.
흑공자는 즉각 새로 만들어진 무장을 보냈다.
국내에 십수 년 만에 내한하게 된 뮤지컬 극단의 여성이었다.
연극과 영화, 오페라와 뮤지컬을 제법 즐기는 흑공자는 미모의 그녀를 보고서 그대로 납치했고 범했다. 하루 만에 정신붕괴를 일으키려는 그녀를 강제로 마(馬)의 자리로 배정했다. 마로 만들면서 약간의 흥미가 생겨 장난을 쳤다. 마(馬)와 마(魔)의 발음이 같다는 점을 이용한 수작이었다.
바깥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리마돈나의 실종으로 떠들썩했다. 물론 흑공자는 자신의 신발 밑창을 핥고 있는 이 여자가 과거의 프리마돈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납치했을 때, 그녀는 매우 자신만만했다.
죄의 대가를 받게 해주겠다고, 프리마돈나 특유의 소프라노 톤으로 꽥꽥댔던 것이다. 팔다리가 벌려진 채 묶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자신의 실종을 금방 알아채고 찾아올 것이라고.
흑공자는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그녀의 성대를 끊었다. 흑공자가 수고로이 끊은 건 아니고 알몸으로 서 있는 다른 말에게 시킨 것이다. 축천은 자신의 머리 장신구 중 하나를 뽑으며 다가왔다.
측천은 평소의 궁장 대신 알몸으로 서 있었는데 꿀맛이 나는 젖을 줄줄 흘리는 거대한 유방을 끈으로 묶고 한껏 달아올라 뾰족하게 솟아오른 두 유두를 꿰어 작은 사슬로 연결한 상태였다. 입은 강제로 벌어져 침을 게걸스럽게 흘리고 코도 돼지코처럼 후크에 걸려 있었다. 아래도 난리였다. 구멍이란 구멍마다 뭔가에 틀어박힌 채 돌아다니던 측천이 황금으로 장식된 비녀 장신구를 거꾸로 쥐었다.
“안 돼! 내 목을 찢지마!”
“꿀꿀.”
침을 줄줄 흘리며 측천은 대꾸했다. 그리고 그녀는 프리마돈나의 성대를 끊었다.
실로 예술적인 움직임이었다. 성대가 끊겨나가자 프리마돈나는 궁극의 괴로움을 겪었다. 다시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절망이 그녀를 나락까지 밀어 넣은 것이다. 울면서 좌절하는 그녀를 향해 흑공자는 벽면 전체에 영상을 재생하는 장치를 틀었다. 그리고 그녀의 영상을 찍으면서 스플레터 무비를 찍었다.
물론 유두를 사슬로 연결한 측천이 했다. 자그마한 소방용 도끼로 프리마돈나의 팔을 끊었다. 결코 세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만에 끝나지 않았다.
그제야 프리마돈나는 이해했다.
이들은 자신을 범하려거나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성적쾌락 때문에 그녀를 납치한 것이 아니다.
절망적인 프리마돈나의 시선을 인식하고 흑공자는 눈매를 접으며 쾌락에 젖은 채 미소했다.
“맞아.”
프리마돈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흑공자가 말했다.
“난 그냥, 네년을 괴롭히고 길들이는 게 좋아. 목적 따위는 없어. 그냥 네년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볼 거야. 네년이 죽을 때까지. 죽여 달라고 사정할 때까지. 물론 그러고도 죽여주지는 않아. 내가 왜 너의 바람을 들어주어야 하지?”
만 하룻 동안.
그 기나긴 시간동안.
프리마돈나는 결코 입으로든, 글로든 설명할 수 없는 잔혹한 일을 겪었다. 반나절 만에 온 머리가 백발로 변하고 초췌해지고 말았다. 그러고도 반나절의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흑공자는 그제야 질리는지 처분을 도모하려 했다. 끌려올 때보다 체중이 족히 반 이상 줄고 많은 부위가 사라진 그녀의 앞에서 흑공자는 예의 흐릿하고 섬뜩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녀석을 내 말로 쓰도록 하지.”
세계적으로 이름과 얼굴이 팔린 여성이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싸움에서, 그리고 영역을 정하기 위한 싸움에서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방법을 마련했다.
물론 말로 쓰려면 그 잘난 얼굴을 가려야하겠지. 다행히도 그녀의 얼굴을 가릴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정신이 붕괴된 그녀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사정한 흑공자는 철로 만들어진 가면을 그녀에게 씌웠다.
그리고 말로 만들었다. 마의 자리를 만들며, 장난이 생각나 조금 수작을 부렸다.
그래서 그녀가 만들어졌다.
가면의 여자.
그녀는 더 이상 본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흑공자가 붙여준 무장으로서의 이름을 썼다.
그녀의 이름은 철가면.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자, 철가면이라고 하는 수수께끼의 정치범을 연상시키는 표현이었다.
쓰고 있는 철가면을 제외하면 언제나 알몸으로 흑공자를 위해 봉사하던 그녀는 퀘스트를 받자 구두를 핥던 것을 멈추고 즉각 명령을 수행했다.
제일 처음 거점으로 지목된 곳은 태양호텔.
바둑판에서 중간에 찍힌 점인 천원점으로, 이곳을 취하면 상당한 보수가 있을 거라고 했다. 흑공자와 백공자는 급히 무장을 파견했다.
그리고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