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회: 3> 배고픔. -- >
“그보다 시간에 여유가 좀 있군.”
“그러네. 며칠 동안 방에서만 지내다보니 시간감각이 무뎌졌나봐.”
“시선 때문에 죽겠군.”
“후후, 그야 자기가 너무 잘나서 그런 거지. 정말……내가 본 어떤 연예인도 당신 같지는 않았어. 정말 연예인 할 생각 없어?”
내가 왜.
이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명함 지갑 안에 언젠가 받았던 기획사의 것도 있을 테다. 매우 잘 나가는 기획사로 연예인을 꿈꾸는 이라면 몸을 팔아서라도 가고 싶어하는 TP 엔터테인먼트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연예인이라는 것도 은근히 3D직업이 아닐까.
화려한 면이 너무 많이 비추어지는데다 한 번 이미지를 심으면 성공하는 거라서 그렇지. 물론 이시현은 연예계에서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이 몸을 가지면서 상승한 건 자신감만이 아니니까.
몸 자체가, 이 몸의 본인이 말하고 있었다.
뭐든 해 봐. 할 수 있을걸.
컨디션이 최상일 때 보통은 시도하지 못했던 무게의 덤벨을 들 수 있을 것 같다던가. 그래서 들어보면 정말로 들 수 있다던가 하는 그런 것. 굉장하다. 이 몸은 터무니없는 자신감과 뛰어난 결과로 그 효율을 증명한다.
정말이지 최고다. 주목을 받는 정도만 좀 덜하면 좋겠는데.
몸과 함께 따라온 무덤덤함이 없었다면 밖으로 나올 생각도 못할 정도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는다. 떨어질 줄을 모른다. 잘 생긴 것도 피곤한 일이야.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간도 넘게 남았군. 호텔 한 번 들를까.”
“응? 왜?”
“박아주지.”
단도직입적인 말에 화를 내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주희는 수줍게 볼을 붉혔다. 이미 그녀는 이시현의 포로다. 세뇌나 최면이나 그런 것이 없이도 몸 자체가 길들여졌다. 이 남자에게 안긴다는 건 그런 거다.
“그럴까?”
조금 기대하는 목소리로 열기가 담긴 채 물었다. 이시현이 전희(前戱)를 기대하면서 날카롭게 웃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옆 의자에 놓아둔 핸드백을 들고 일어나 계산을 하려던 강주희가 멈칫했다.
이시현의 폰에서 최신가요가 울리고 있었다. 저 폰에서 왜 나 말고 다른 이의 전화가 울리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시간 따위는 없었을 텐데.
강주희가 의아해하다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표정을 굳혔다.
“그년이구나.”
“맞아. 조용히 해.”
이시현이 울리는 폰을 받았다. 그년, 남민아의 전화였다.
“안녕하세요, 오빠. 뭐해요?”
“섹스 준비.”
직설적이라고 하면 직설적인 말에 남민아가 까르르 하고 웃었다.
“그 여자와요? 정말이지 오빠의 좆은 바쁘군요.”
“무슨 일이야?”
“쉬는 시간이라서요. 오빠가 뭐하나 궁금해서 전화했는데, 별로 안 바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아, 논다는 건 아니고요. 저 같은 애 꼬셔서 허리 놀리고 있나 싶었죠.”
강주희가 손을 까딱였다. 폰을 달라는 신호다. 이시현은 눈짓으로 조용히 시켰다.
“조금 있다가 태양그룹 회장 만나야 한다.”
“어머나, 그 말 진짜였어요?”
“거짓말을 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
“결혼할 거예요?”
결혼이라? 이시현은 화를 억누르느라 고생하는 강주희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여자가 아내가 된다면 고맙다. 물론 이 몸을 가지기 이전이라면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강주희가 유부녀라고 해도 자신의 맛을 기억했다면 남편이 보는 앞에서도 옷을 벗고 보지를 벌려 보인다. 그런 여자를 결혼이라는 조건으로 곁에 둔다? 그건 조금 부정적이었다.
“별로.”
“별로라는 건 제게도 기대해볼만한 요소가 있다는 거네요?”
“그런 의미가 되나. 그런데 주희 시선 장난 아니야.”
“주희가 그 여자 이름이죠? 바꿔줘요.”
이시현은 바꿔주는 순간 자그마한 평화가 깨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중에.”
“점심시간에 또 전화 줄게요. 꼭 받아주세요. 알았죠?”
“약속이 길어지지 않는다면.”
“그럼 우웅.”
남민아가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시현은 전화를 끊었다. 강주희가 연신 손톱을 물어뜯었다. 보기 좋게 다듬은 손톱을 몇 번이나 이빨로 물어뜯어 흉하게 변했고 매니큐어도 지워졌다. 이시현이 그녀의 머리를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강주희는 뭐라 하려던 것을 잊고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긴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그 여자는 미성년이야.”
“미성년인 건 알아. 하지만…….”
“미성년이라는 걸로 이야기는 끝난 거야. 뭐 사죄의 의미라고 하긴 그렇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범해주지. 네 보지가 걸레가 될 정도로.”
“흐윽…….”
그의 강렬한 말에 강주희는 벌써부터 느끼는지 다리를 꼬기 시작한다. 이시현은 이 여자가 팬티도 안 입고 있을 건가 고민했다. 노팬티로 다니게 하면 재미있겠는데. 그렇게 명령을 해볼까. 아니, 범할 때 그녀의 입에 입고 있던 팬티를 뭉쳐 물게 한다는 걸 포기할 수는 없다. 이시현은 씩 웃으며 그녀와 함께 카페테리어를 나왔다.
그리고 차량에 올라탔다.
“나도 차를 한 대 사는 게 좋을까.”
“안 돼. 굳이 차가 필요하다면 이 차를 줄게. 대신 나만 태우고 다녀야 해?”
강주희는 제 남편의 바람기가 걱정인 모양이다. 차를 타면 이시현의 활동반경이 터무니없이 넓어진다. 그러면 강주희가 쉽사리 감시할 수 없다. 이시현은 그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놀려먹고 싶어졌다.
“흐음,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
순간이었다.
-콰앙!
이시현과 강주희가 향하던 방향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포연과 함께 불꽃이 피어오르고, 공기가 진동한다. 비명이 울리고, 방범장치가 우짖는 가운데 강주희의 운전이 흐트러졌다.
-콰앙!
두 번째 폭음이 울렸다.
이번의 폭음은 먼 곳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뒤에서 일어난 것이다.
폭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뒷 차량이 갑자기 페라리를 들이박은 탓이다.
예상조차 못한 상황에 강주희가 한 순간 앞으로 쏠려 넘어졌다. 이 아가씨는 차를 몰면서도 안전벨트도 하지 않았다. 이시현은 강주희의 머리 앞으로 손을 가져다대고 강렬한 힘으로 버티고 서서 튕겨나가는 그녀를 충격에서 보호했다. 의자 등받이에 그녀를 힘주어 당기고는 자신 또한 의자에 눌러 튕겨나가는 것을 방지했다.
“꺄아앗!”
당혹스러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시현은 초절한 감각으로 강주희를 감싸고 충격을 대비했다. 다행히 강주희는 앞유리를 뚫고 스커드 미사일마냥 날아가지는 않았다. 강주희는 잔뜩 흐트러진 머리와 뻐근한 목을 흔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 뭐야. 썅!”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시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화재현장을 주시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강주희가 이시현의 품에서 떨어져나가고, 그의 검은색 정장에 화장이 묻어난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제길. 푸닥거리를 좀 해야겠어. 자기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음대로.”
이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이런.”
퀘스트가 생겼다.
겨우 사고에 의한 것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강주희가 벌떡 일어나 뒤로 향했다.
앞의 차는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라 액셀을 밟은 듯 했다. 문을 열고 여자가 나왔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분위기가 묘하게 유부녀 티가 나는 여자가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나왔다. 강주희는 “오, 여자였어? 잘됐네.” 으르렁거리며 그녀 앞에 섰다.
“이봐. 아줌마. 미쳤어? 정신이 있는 거야? 어? 말 좀 해봐. 누구 하나 죽으면 어쩔 뻔했냐고! 죽을 뻔 했다니까?”
“그, 아, 저……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너무 놀라고 뭐고 간에……대처를 못했다면 죽었다고. 알아?”
드라마 속 재벌 따님들처럼, 강주희가 말했다.
목소리의 톤도 높은데다 차량도 고급이고, 그리고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것과 다름없으니만큼 그녀의 기세는 무서웠다. 강주희의 앞에 있는 여성은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그녀가 폭음에 놀라 강주희의 차를 들이박아 낸 사고 때문에, 그녀들이 달리던 차선이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첫 번째 폭음이 일어난 곳에서 메케한 연기가 피어올라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관심없이 이시현은 퀘스트를 읽다가 고개를 뺐다.
“주희야. 그만 적당히 돌려보내. 다친 건 아니잖아.”
“자기야. 자기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확실히 해야 해. 이 차는 엔진이 뒤에 있다고. 아줌마, 전화번호 불러 봐요.”
“저, 저기……제발…….”
이시현은 이름 모를 여성의 창백해진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라도 차를 주워타다가 이런 차와 사고를 내면 신부터 찾지 않았을까. 왜 하필 이런 시련을 주냐고. 게다가 일방적으로 저쪽에서 낸 사고. 아마도 전액보상은 물론이고 이쪽의 치료비 같은 것까지 다 줘야 할 것이다. 최소한 수천만 원. 옵션 붙인 국내 중형을 살 수 있을 돈이다. 많으면 억대. 사고 한 번에 평생 노예가 되어 돈을 벌어다 바쳐야 한다.
이시현이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 여성을 도우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쪽에는 여유가 있다. 그렇다면 강주희를 말려서 착한 척을 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쁘지 않다. 어차피 차를 수리해야 한다고 하면 이쪽에서 부담하고. 한때 서민이었던 양심이 이시현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이쪽에서 대범하게 넘어가주자.
어차피 이쪽에는 큰일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하던 이시현의 가슴이 쿡 하고 에었다.
‘어?’
방금 이 고통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