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26화 (26/141)

< -- 26 회: 3> 배고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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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왔다.

미리 주문을 해야 되는 자리인데다가 숙박 없이 따로 이용하려면 상당한 가격을 치러야 하는 곳이었다. 호텔에 마련된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오늘 일을 잘 처리해준 대가로 강주희가 데이트를 청했다. 이시현은 상관없었다. 몸이 조금 피로할 뿐, 상류문화는 즐겨보는 것이 좋으니까.

그래서 빠른 속도로 스포츠카를 밟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수도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둘의 합이 200만 원 대인 메뉴를 시켰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이시현이 가격을 듣고는 한 순간 움찔할 정도의 값이다. 식전에 샴페인을 한 잔씩 하고 고기를 썬다.

강주희가 스테이크를 썰면서 말했다.

“자기에게 오늘 조금 실망했어.”

“다른 여자를 안아서?”

“응. 그것도 하필 내 방에서. 나와 자기의 침대에 다른 여자 냄새 나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줄 알아?”

“어쩔 수 없었어.”

말하면서도 이시현은 자신의 다음 말이 우스워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년이 리더였고 어쨌든 사건의 책임은 지워야 했으니까.”

“나에게 말하면 다 되었을 텐데. 침대 시트 봤어. 완전 못쓰게 됐던데.”

“너와 할 때도 언제나 시트가 흠뻑 젖었잖아.”

그야 그렇지, 강주희가 고기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이시현과의 섹스를 생각하는 듯하다. 여자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힘. 이시현과의 섹스는 말 그대로 여자를 미치게 한다.

“그럼 그년과 나 중에서 누가 더 좋았어?”

“너.”

이시현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딱 한 단어로 강주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강주희가 희희낙락했다.

“하긴 내가 질 나이는 아니지 암. 게다가 그런 년보다 훨씬 나을 걸. 그렇지?”

“맞아. 넌 괴롭힐 맛이 나거든. 그 애는 그냥 시달리기만 해서, 좀 별로였어.”

사실은 다섯 번을 범하고 또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이 동해서 여섯 번째로 강간 비슷하게 박아버렸다. 처녀였던 소녀를 여섯 번이나 쓰고, 그녀의 보지에 정액을 담아둔 채로, 팬티 없이 돌려보냈다. 모르긴 몰라도 허벅지로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을 것이다. 치맛자락에도 정액을 닦은 얼룩이 묻어 있고.

하지만 사실을 말해서 강주희를 시샘하게 하는 건 안 좋았다.

“그, 음. 뭐라고 할까. 자기, 내일 시간 돼?”

“무슨 일로? 아.”

이시현은 그녀의 기척에서 앞으로의 일을 읽을 수 있었다. 아, 소리가 나오자 강주희가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는 뉘앙스다. 시험받는 것 같아 기분은 나쁘지만 정답일 게 확실하니까 이시현이 아무런 부담 없이 대답했다.

“네 아버지?”

“응. 정확해.”

태양그룹의 회장이 강주희의 아버지다.

강주희의 사생활은 나름대로 회장에게 보고되고 있을 것이다. 엄한 사내놈이 달라붙었다는 보고도, 그리고 그 사내놈의 사생활도 어느 정도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불법시찰 같은 경우는 아니더라도 딸을 가진 아비가 염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빠가 부르셔. 자기가 뭐하는 놈인가, 비전은 있는가, 내 몸과 돈을 탐하지만은 않는가 하고.”

이시현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일 아빠와 좀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자기, 시간은 괜찮겠어?”

“상관없지.”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만나기 전에 네가 좀 해줘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해야 할 일? 뭐?”

“뭐, 나도 나름의 직함은 있거든. 아예 꿀리고 들어가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러니까 명함 하나만 파줘.”

“명함? 무슨 명함?”

“시현재단의 이사장으로.”

“어머나.”

이 남자 흘러가는 말로 그런 재단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었지. 자존심 때문에 뻥치는 줄 알았는데.

강주희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가 활짝 웃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도 멋진 남자지만 자기 이름으로 된 재단까지 가지고 있다면 더할 나위없다. 재단의 크기가 작고 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재단이 있다는 것. 겨우 스물의 나이에 그런 위치에 올라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 ‘이쪽 세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니까.

“응. 맡겨둬. 나이트클럽 삐끼처럼 뽑아줄게.”

“네 아버지가 안 버릴 정도로만 만들어 줘.”

“맡겨만 둬. 내가 또 디자인 전공이잖아.”

“아르티장 같지는 않던데 말이지.”

이시현은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씹어 삼켰다.

다음날.

이시현은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머리를 빗어 넘겼다.

특유의 회색머리도 염색을 할까 했지만, 강주희의 요청으로 머리만 좀 정리하는 것으로 그쳤다.

모델 및 연예인들이 단골로 드나든다는 미용실을 갔더니 바깥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때문에 들어가는데 십 분이 넘게 소요됐다. 하필 이 미용실을 이용하는 연예인을 기다리는 팬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시현이 지나가니 비명을 지르며 그 연예인 대신 이시현을 죄다 찍어댄 탓이다.

연예인 준비생, 혹은 외국 잘 알려지지 않은 모델. 뭐 그런 식으로 의혹을 사던 이시현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연애인으로 살아봐야 기껏 일해 봐야 한 달에 몇 억. 그런 일을 몇 번이나 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할 텐데, 그런 짓을 못하지.”

한 달에 수억을 벌어도 이시현의 성에는 차지 않는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진 건 퀘스트로 획득한 재단하나 뿐이지만, 그의 능력은 거기서 그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될 터였다.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기고 검은색 아르마니 정장으로 몸을 죄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벨벳 넥타이. 그리고 야만적인 스킨향이 강렬한 켈빈클라인 제 향수로 분위기를 더했다.

머리를 올백으로 쓸었기에 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햇살에서 그 미모를 더한다.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는 그를 바라보며 실신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TV같은 데서 자주 보는 연예인들조차도 주묵이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이시현을 기다리던 강주희가 페라리의 클락션을 눌렀다.

“여기야. 자기.”

이시현이 눈매를 슬쩍 들었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걸었다.

자연스러운 한숨소리.

그 한숨소리 끝에서 강주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말에 따라준다. 애인처럼 있어준다.

팬티를 입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한없이 차오르는 정신적인 쾌락에 음부를 축축하게 적시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그룹 회장과의 약속 시간은 약 두 시간 가량 남았다.

그 이전에 이시현은 식사를 했다.

어차피 그곳에서도 식사를 할 테니 가볍게 식사를 하려는 것이 목적. 강주희는 오늘 아침 일찍 파온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지갑이라는 걸 이시현은 처음 써봤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몸이, 육체가 그런 당황을 무시한다. 알아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몸이 느긋하기 때문에 정신이 움직여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흘러나오진 않는다.

“아버지란 사람은.”

이시현은 카페테리어에 앉아서 루왁 커피를 기울이면서 물었다.

“어떤 사람이지?”

“음, 사람에 대해 묻는 거야? 대답하기 어려운걸.”

강주희가 나른하게 웃었다.

“울 아빠는 뭐랄까, 돈의 화신이지. 응. 우리나라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제계서열 7위에 빛나는 태양그룹.

손대지 않는 사업이 없고 유통업에서는 굴지의 1위에 빛난다. 이 나라가 외국에 의해 찬탈 받고나서 얼마 후, 여러 사람들이 사업을 시작했고 태양그룹도 그때 일으켰다.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 나라를 빼앗은 나라에서부터, 병뚜껑부터 만들기 시작한 사업은 이윽고 이 시대에 완전히 개화했다.

과자, 식재, 편의점, 유통. 그리고 슈퍼마켓에서부터 백화점, 건설 수주까지.

모든 것에 손대고 수입을 긁어모으고 있다. 기업 자체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없다. 다만, 수익이 나는 사업을 건드릴 뿐. 그리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폭발적인 성장을 거둔다. 기업, 그룹의 가장 안 좋은 부분을 보여주는 면모다.

애초에 모기업이 돈이 있으니 다른 곳들이 먹고 살던 시장도 잠식하는 나쁜 기업의 표본이다.

“뭐, 아빠는 신경도 안 쓰지만 말이야.”

사람들은 이런 태양그룹의 면모를 보고 언제나 욕을 하지만 그들의 사업성에 기대는 것도 사실이었다. 현금을 긁어모으는 것과는 반대로 쓰지는 않는 기업. 일본과 한국 양쪽에 자사를 내서 둘 모두에서 이득을 취하기에 이른다.

“돈을 그렇게 모으는 이유가 뭐야?”

“응? 그냥. 돈이 있으니 번다. 그것뿐이야. 언젠가 아빠에게 이렇게 돈을 모아서 뭐하냐고 물었더니, 돈 모으는데 이유 있냐고 하던데.”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군. 그냥 어려운 시절에 돈을 모으다 보니 지금까지 모으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 병뚜껑을 만들면서 살아가던 시절 돈을 악착같이 아끼고 벌어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을 터였다. 전대 회장이 그렇게 살아오는 걸 보고 현 회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쨌든 벌고 보자, 그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봐야 알겠지만 방향성은 알았다.

태양그룹은 ‘타성적으로 돈을 모은다’는 것. 그리고 돈을 쓸 줄을 모른다는 것을.

“후후, 왜. 아빠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습인걸?”

“별로 그렇지도 않아.”

이시현은 느긋하게 부정했다.

회장이 할 말은 대강 염두해 두고 있다. 자신의 생각에서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

회장이 직접 부른다는 걸로 봐서는 ‘헤어지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듯하다. 아니, 헤어지라고 하기 전에 어떤 인상을 본다거나 능력을 시험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터. 이시현이 회장의 인간성을 물은 것은 그런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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