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 회: 2.5> 살인마의 휴일. -- >
2.5> 살인마의 휴일.
한 명의 여성은 현재 그녀가 가진 전 재산 831만 원을 담고 전화박스 안에서 전화를 들었다. 그녀가 사는 월셋방의 보증금과 가진 전 재산을 털어서 마련한 돈이다.
현재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뢰를 하려고 한다. 이름 외에는 아는 게 없는 사람. 그렇지만 그녀의 힘은 믿을 수 있었다.
사흘 전 그녀가 전화박스에 볼일이 있어 들어가려던 때였다.
빈 전화박스 안에서 갑자기 소녀가 zqoong! 하고 나타나더니 “쓰세요.” 웃으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머리에 쓰고 있는 것도 실크햇이다 싶더니 마술사였던 걸까…….
멍한 상태에서 전화박스에 들어가다가 흠칫 놀라 튀어나왔다.
짙은 피냄새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역겨운 피 내음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사람 한둘을 피를 짜내기 위해 난도질한 후 천장에 매달아놓은 것처럼 물씬 풍기는 피 내음은 형용할 수 없는 역겨움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여성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방금 전화박스를 걸어 나온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 소녀는 무얼까. 어떤 이일까. 이 피냄새와 관계있는 것일까?
역겨움과 공포,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공황에 빠져있는 그녀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할 그림자는 두께라는 것이 없이 그녀의 눈 앞에서 일렁였다. 그것이 히죽 하고 웃는다고 느낀 한 순간. 여성은 해볼 일 없을 것 같던 동작으로 바닥에 몸을 굴려 그림자의 공격을 피했다.
그림자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 공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림자에 당하면 죽는 건가? 아니, 애초에 이 그림자는 뭘까. 여성은 다시 구를 생각을 못한 채 자신에게 재차 손을 뻗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망연자실한 시선 속에 그림자는 점차 커져가고.
그림자의 가슴팍을 꿰뚫은 하얗고 하얀 손이 그녀의 흐려지는 의식을 한 순간에 일깨웠다.
“어머나, 미안하게 됐어요. 새어나온 멍청이가 있네요.”
“네?”
새어나오다니 뭐가?
그림자가?
“제 심처 <망자의 거리>는 살해한 생물의 숫자에 따라 그 영역이 넓어지거든요. 그리고 점점 깊어지죠. 그림자는 제가 죽인 생물의 잔재. 망자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아니, 존재하는 현상이라고 할까요?”
여자는 실크햇을 쓴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일상적인 일을 하는 이는 아니라는 것.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좀 더 깊고 내밀한, 평범한 사람은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만은 알았다.
“<망자의 거리>는 좋은 특기고 고유한 특기지만 역시나 제한이 좀 있어서……저도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답니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도 기어 나오죠. 미안했어요. 댓가로 죽이진 않을게요.”
그녀가 떠나갔다.
그녀를 붙잡았다.
소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떠나려는 나를 유혹하는 거예요? 난 여자는 흥미 없는데.”
소녀는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만큼 미인이라면 벗은 몸도 예쁘고 굉장히 아름다울 것 같지만 그래봐야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몸과 비교해 더욱 울적해질 것 같았다.
“그건 아니고요.”
“그럼요?”
“저 좀 도와주세요.”
“뭘 어떻게 도와드려요?”
“돈 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여자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끌어안고 리퍼가 쓴웃음을 지으며 등을 토닥여줬다.
강간당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할 일이었고 뉴스로 나오면 많은 조회수와 ‘죽이고 싶다’거나 ‘왜 망가 번역은 5년인데 저런 새끼는…….’으로 시작되는 리플이 베플로 달릴 그런 일을 겪었다.
마음이 동하는 대학교 남선배를 만나서 술자리를 갖고 좀 취한다 싶어 일어나려다 깨고 보니 이니 선배와 선배 친구들이 그녀를 집단으로 강간하고 있었고 촬영마저 했다. 그녀의 학생증과 주민등록증을 베고 있던 베개 양옆에 걸쳐두고 사진까지 찍어서 이 일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겁박했다.
그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질렀어야 했는데 소문이 꼬리를 물고 사진 뿐만 아니라 비디오 촬영된 것도 있어 그것 때문에 우물쭈물하다보니 비디오가 몇 개나 더 늘었고 학교에서도 공공재 같은 별명으로 불린다고도 말했다. 이윽고 몸이 아닌 돈 마저도 뺏어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찾아찾아 공중전화박스를 찾아온 것도 그녀의 휴대폰이 사용정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체크 카드는 진작 다 썼고 휴대폰으로 쓸 수 있는 돈도 다 꺼냈다.
그녀 모르는 사이 ‘아는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몸도 산 사람이 있었던 듯 했다. 이대로는 미칠 거야. 차라리 죽고 말지. 굳은 결심을 하고 경찰에 전화를 걸러 왔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느낄 수 있는 어떤 감각.
여자는 소녀에게서 그런 감각을 읽었고, 소녀는 어쩔까 뺨에 손가락 하나를 얹고 고민하다 싱긋 웃었다.
“개인적인 의뢰는 잘 안 받는 편이지만 좀 안쓰럽기도 하고, 감도 좋아서 허락할게요.”
제 주인님께 쓸 만한 인재로 보이네요. 뭐 강간당한 건 흠이지만.
소녀는 웅얼웅얼거리면서 말을 끝맺었다.
“사흘 후 이곳에 오세요. 가진 전 재산을 들고요. 여기서 전화를 거세요. 아참, 이건 제 휴대폰 번호.”
여성에게 휴대폰 번호를 적어 건넨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사흘 후 여성은 전화를 걸었다.
그녀를 괴롭히고 범하던 이들이 사흘 동안 하나둘씩 사라진다 싶더니 ‘인근의 살인범’에 대한 소식이 뉴스를 타고 전해졌다. 그들의 유사성은 학생이 대부분이라는 것과 좀 평판이 안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학교 내에서 그녀를 겁박하던 이들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었다.
물론 그녀가 무언가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다급히 전화기를 소녀의 번호를 눌렀다.
“이 번호는 리퍼, 니퍼 아니고 리퍼입니다. 냥냥냥.”
소녀의 귀여운 목소리로 냥냥거리는 소리를 내던 전화가 걸렸다.
“아항. 안녕하세요? 사흘 만이네요.”
“네, 네. 사흘 만이에요. 저, 돈 다 가지고 왔는데요.”
“그런가요? 그 돈 들고 산부인과를 가세요. 그리고 애를 떼세요. 키우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리고 저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지 마세요. 말하면 혼내줄 거니까요.”
“그, 그 선배들은요?”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했어요. 아? 죽진 않았어요. 하하, 전 사람 잘 안 죽여요. 피내음 나는 건 만년 생리라서 그렇고요. 그들을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예요. 좀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도 이 게임을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을지 몰라요. 어쩌면 그들 중 한 명 정도는 볼 수 있겠지만 제정신은 아닐 거고요. 그럼 잘 지내요. 이 전화를 다시 걸면 야단칠 거니까요.”
전화가 끊겼다.
여성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안색은 어두웠다.
산부인과로 가라니……설마 나는…….
본인이 들고 온 돈을 바라보던 여성의 안색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복수는 제대로 한 것 같다. 마음도 기쁘다. 그러나 그녀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단강간을 당한 인간이라는 것도 그대로고 품행 나쁜 여자라는 학교의 소문도 그대로. 그들 때문에 배에 아이도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절망케 했다.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공중전화박스를 나오던 때였다.
한 명의 남자와 가볍게 부딪쳤다.
“오, 이런.”
남자가 넘어지려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몸은 가냘픈데 굉장히 딱딱한 느낌을 주던, 체형 좋은 미남이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빙그레 웃었다. 그 남자를 바라보며 여성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남자의 뒤에는 비서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 혹은 은색머리로 보이는 우아한 머리를 잘 빗어넘겨 예쁜 얼굴을 다 드러낸 미인이었다.
“아가씨, 미안해요. 부딪쳐서 아팠지요?”
“아, 아니에요. 아파서 우는 거…….”
“그런가요? 그럼 어떤 이유로 우는 걸까요.”
남자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도와줄 수 있을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도움이 필요한가요?”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로젓고 그를 지나치려다가 그의 모습에, 그의 호의에, 그의 부드러운 말솜씨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라면 도와줄 수 있을까? 그라면…….
“제발……도와주세요.”
이 지옥 같은 삶을 끝내줄 수 있을까.
“도와 드리죠 물론. 자, 아가씨. 일어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도와드리도록 하죠. 이쪽은 루크레치아. 저의 충실한 비서. 그리고 저는……라고 합니다.”
그는 이름을 말했다.
“지인들은 저를 보고 탐닉의 군주라고도 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