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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6화 (16/141)

< -- 16 회: 2> 첫 퀘스트. -- >

“영계 싫어하는 남자 없을 거잖아. 게다가 우리들 나름대로 인물도 되고.”

“꼬셔질까?”

“어떻게든 들이대보는 거지.”

남민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명자와 정명숙도 흥미가 도는 얼굴이 되었다. 점심시간을 노려서 그를 찾아가도록 하자. 쉽사리 꼬셔 질 것 같진 않지만 어떻게든 들이대보면 될 것 같다. 뭐 정말 호색남인걸 대비해서 싸움 좀 하는 남자애들도 데리고 가고.

점심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히히덕거리던 그녀들은 듣나마나한 수업의 종이 울리자 투덜거리며 책상에 앉았다.

“조금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구. 후후.”

남민아는 즐거운 것을 찾은 듯 소리죽여 웃었다.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가 된다.

이시현은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어딜 갔어? 응?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런 거야? 음식은 아무 거나 시켜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어딜 간 거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강주희의 전화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시현은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다. 자신의 매력이 얼마나 빼어난지는 본인이 더 잘 안다. 게다가 이런 집착이 싫지 않기도 하고. 저만한 여자가 자신에게 목매다는 모습은 어쩐지 뿌듯하지 않은가. 더 심해지면 난감하겠지만 끝장을 볼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시현이 가진 세뇌 한 번이면 집착도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다. 그녀가 정신붕괴를 일으키기 전에 대답해야 할 것 같아 이시현은 숨을 헉헉 내쉬는 그녀의 틈을 타 입을 열었다.

“너 날 못 믿어?”

“어, 어? 미, 믿어. 당연히 믿지.”

“내가 그냥 떠날 것 같아? 잠시 바깥에서 햇볕도 쬐고 식사도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것뿐이지.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추궁은 뭐야? 너 지금 날 협박하냐?”

“으, 으아아아아,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진짜 아니거든? 진짜야!”

휴대폰 너머로 강주희가 당황하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듯해 이시현은 쿡쿡 웃었다.

“말이 조금 심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네가 나를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건 확실하지. 내가 기분이 나빴던 것도 이해해야 할 걸.”

“으, 으응. 미안. 미안해. 절대 그러려는 건 아니었어. 정말 미안.”

이시현은 피식 웃고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였다.

“돌아가면 괴롭혀줄 테니까 충분히 벌 받을 준비를 해둬.”

“응!”

명백히 기뻐하며 강주희가 전화를 끊었다.

이시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의자 등걸에 등을 기댔다.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너무나 쉽다. 정말로 이 육체는, 이 육체가 가지는 자신감은, 거기서 배어나온 매력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다.

정말이지 세상을 쉽게 볼 수 있는 몸이다.

이시현은 벌써 몇 명 째나 되는 연예기획사의 사람을 보았다. 강진수. 기획사의 헤드매니저가 앞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TP 인터테인먼트.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 기획사의 사람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들었겠지만 또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연예인, 혹은 모델로 섭외하겠다는 말? 그런 건 좀 질리는데.”

이시현은 느긋하게 반문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 섭외가 들어오면 깜짝 놀라고 기뻐하고 어리둥절해할 테지만 이시현의 태도는 너무나 느긋했다. 그럴만한 외형이다. 이런 얼굴로 20년을 살아왔다면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만 했다.

“돈은 별로 부족함이 없거든. 그리고 모델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하는 상황에서도 스토커 같은 게 붙어.”

“아, 그렇군요. 하지만 약간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그리고 꽤 다른 세계를 즐기고 싶다면 꼭 연락 주십시오.”

“응. 고마워.”

명함을 받아서 지갑에 넣는다. 꺼낸 지갑도 에르메스 제 지갑으로 잘 나가는 기업 회사원의 한 달 봉급을 고스란히 털어야 한다. 국내에 들어온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제품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다. 화려한 연예계에서 살아가는 강진수는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건 차림새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사치스럽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은 장신구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고급 브랜드를 고루 갖춘 차림새. 넥타이조차도 수제로 유명한 제품임을 알 수 있었다. 실로 ‘드라마의 잘 나가는 재벌댁 자식놈’같은 모양새였다. 드라마의 잘 나가는 재벌댁 자식놈은 얼굴과 몸뚱이 말고는 죄다 협찬이지만 이시현은 전부 자신의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까.

“그 정도 얼굴에 그만한 자신감. 그리고 키.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트만 걸치고 길만 돌아다녀도 모델로 활동할 수 있을 텐데. 반드시 성공시켜 드릴 테니 흥미가 있다면 꼭 연락을 주시길.”

강진수가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인 후 악수까지 했다. 이시현은 지갑 속에 명함을 집어넣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사람이 만원이다.

카페테리어가 꽉 차서 그만을 바라보는 여자들이 태반이다. 눈치만 슬슬 보던 그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획사의 제의를 사양하는 그를 몽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말을 걸 용기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시선도 지겨운걸.

이시현은 표현 그대로 가면이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 생각하고 실소했다.

남아있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우적 씹어 삼키고 일어나려던 때였다.

“거기 잘생긴 오빠.”

이시현은 누구? 나? 같은 소리는 하지 않고 부드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제 잘생긴 사람이라고 하면 으레 자신을 지목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인근의 이름 있는 고교를 다니는 듯한 여학생 셋이 나란히 서 있었다. 교복이 제법 잘 어울린다. 여고생을 보는 건 제법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시현은 대번에 그녀들 중 리더를 찾아냈다. 오른쪽에 서 있는, 꽤나 분위기가 있는 소녀였다.

“그래.”

이시현이 턱을 괴고 느긋하게 말했다.

“불렀으면 말해봐.”

“오빠, 방금 TP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의 들어온 거죠?”

“그렇다만.”

“어머, 그런데 거절한 거예요? 연예인 생활 같은 거 흥미 없어요?”

“나는 그냥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소란의 중심으로 가라고?”

이시현이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 잘 어울린다고 소녀들은 생각했다. 물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자연히 반발심도 따른다.

“하. 그렇게나 대단한가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이시현은 조금 고민하다가 슬몃 웃었다.

“이 세상에 둘 정도밖에 없겠지. 지금은 말이야.”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담? 얼굴은 엄청 잘 생겼는데 되게 거만하네요.”

“맞아. 거만해. 그리고 난 거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무슨 일이지?”

“있잖아요. 나랑 사귈래요?”

이시현은 이것만큼은 조금 의외였다. 이시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돌하군. 이름이 뭐지?”

“남민아. 고 2에요. 오빠는요?”

“이시현. 스물.”

이시현은 느긋하게 대답하고는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가져갔다. 통화를 누른다. 단축번호는 1번.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다.

강주희가 말했다.

“응, 응! 나 잘못한 거 알아. 벌 줄거야?”

“고교 2년생. 남민아. 이 여자에 대해서 알아봐.”

“그, 그게 누군데! 빌어먹을 도둑고양이는 누구야!”

“언성 높이지 말고. 듣는 사람 있단 말이야.”

이시현은 뜬금없는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민아와 다른 두 여학생을 내려다보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나보고 사귀자고 말하는 앤데 자신감이 팽배한 게 지나쳐서.”

이시현은 수화기에서 입을 떼고 남민아를 내려다보면서 거만하고 오만하고 잔인하고 잔악하게 미소 지었다.

“주제파악을 좀 시켜줄까 하고.”

남민아는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성격이 제법인 모양이다.

이런 성격은 좋다. 예전 같았다면 그냥 재수 없어 하며 신경을 안 쓰려 했겠지만 지금은 마치 날 선 고양이가 손톱을 세우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남민아가 틱틱거렸다.

“하, 대단도 하신 모양이네요. 뭐예요, 그 전화. 애인에게 전화한 거예요? 도와달라고? 생각보다 기둥서방 기질이 있네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시현은 전화를 꺼서 주머니에 넣었다.

“방금 전화 받은 여자는 태양그룹 회장의 딸이긴 하지만 애인까진 아니야. 그 비슷한 위치이기는 해도.”

태양그룹 회장의 딸.

그 말이 주는 무게에 뒤에 선 여학생 두 명이 버썩 얼어붙었다.

방금 전화를 해서 신상명세를 파악하라는 뉘앙스를 전한 그녀. 그녀가 태양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에는 남민아도 당혹해했다. 그녀는 일이 틀어진 것을 깨달았다. 애인이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줄이야.

“웃기시네. 그런 사람이 애인이라고?”

“내가 구라칠 것 같아?”

이시현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빙그레 웃었다. 이 외모로 태양그룹의 영애를 애인 비슷하게 두고 있다는 말도 진실처럼 느껴진다. 이 얼마나 잘난 원판이란 말인가.

“그 허세, 정말로 못쓰겠네.”

억지로 운을 뗀 남민아가 발을 굴렸다. 뭔가 망한 느낌을 그녀는 잔뜩 받고 있지만 갑자기 감정이 치밀어오르는 게 사고 한 번 쳐야할 것 같았다. 카페 바깥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교의 일진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시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 이래서 그런 퀘스트를 준 건가.

밟아주라고? 이것들을? 이 제국 놈들은 미래까지도 읽을 수 있나? 가능할 것 같아서 무섭잖아. 사나운 인상의 소년들을 바라보면서 이시현은 피곤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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