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회: 2> 첫 퀘스트. -- >
어쨌든 호텔에서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시현은 뭐든지 하고 싶어 몸이 달아있었다.
최고의 기분에 최고로 좋은 아침을 맞이하면, 그날 하루의 인상이 달라지듯이. 새로운 육체를 갈아탄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텔에서 버티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강주희의 모든 걸 즐겼다고 할 만큼 짙은 섹스를 나누었다. 슬슬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었다. 물론 강주희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은 다음 퀘스트가 나올 때까지 강주희의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돈 쓰는 걸 아끼는 부류는 아니고, 돈을 쓰는 기쁨도 알아버린 탓이다.
호텔 밖으로 나왔을 때 제일 처음 구입한 것은 휴대폰이었다.
본래 사용하던 휴대폰은 낡아빠진데다 1, 2, 3번 키가 눌러지지 않았다. 피처폰. 혹은 버스폰이라고 불리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정지되어 있었다.
현재의 이시현은 과거의 이시현과 근본은 같지만 기록상에서는 다른 존재로 나온다. 나이도 같고, 생년월일도 같다. 하지만 누구도 과거의 이시현과 현재의 이시현을 구분할 수 없다. 과거의 자신은 행방불명 정도로 처리되지 않을까?
자산 가치 100억짜리 재단을 마음대로 만드는 어스 엠파이어의 기술력이라면 주민등록번호를 맞추고 하는 문제는 완벽히 해결했을 것이다.
휴대폰은 버렸다. 정확히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 자신이 들고 다녔던 소지품은 하나도 없다.
[어스 엠파이어]는, 깨어난 이시현의 앞에 잭 더 리퍼를 안내자로 내보낸 후 그녀를 통해서 모든 조작된 서류를 구비토록 했다. 이시현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명을 하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인지 몰랐다.
하긴 [어스 엠파이어]의 기술력은 지구를 아득히 초월했다.
잭 더 리퍼는 [어스 엠파이어]를 묻는 이시현을 향해 고양이처럼 웃으며 대답했었다.
‘제국 어스 엠파이어(Earth Empire). 가지고 싶은 것은 죽여서 빼앗고, 남의 비난을 들으며 고문하죠. 비명을 쾌락으로 여기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걸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아요. 소위 말하는 악의 제국. 하늘과 문명과 종말을 잇는 세 명의 황제(皇帝)를 필두로 왕작 및 공후의 귀족들이 무한한 약탈을 횡행하고 있죠.’
경악하는 이시현을 바라보며 잭 더 리퍼가 말을 이었다.
‘어스 엠파이어가 지워버린 문명의 숫자는 3만이 넘고, 학살한 종은 억에 이르죠. 거주행성만 30만 개에 이르고, 자원행성도 100만 개가 넘어간답니다. 5조가 넘는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은 말 그대로 정복과 점령을 통하여 끝도 없이 불어나고 있었고 노예로 삼은 민족이 1000조가 넘어가요. 어떤가요. 이제 기술수준이나 문명의 정도, 그리고 이들의 성향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더없이 잘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주희는 자신이 전화하기 위해서 이시현을 끌고 휴대폰 대리점으로 향했다.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날렵한 스포츠카에서 내린 둘을, 특히 이시현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확실히 좀 너무 잘난 모습이 아닐까.
이시현은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길을 걸을 때마다, 어딘가로 들어갈 때마다 이런 시선을 받는다는 게 신기했다. 자연스러운 회색의 머리칼에 옅은 보라색이 깃든 눈동자. 그리고 동양인 특유의 섬세한 인상과는 반대로 서양인의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는 굉장한 미남. 혼혈로도 보이고, 동양인으로도 보이지만, 무엇 하나 단점이 없는 그 얼굴과 신장은 모두의 주목을 사기 충분했다.
흑공자. 그리고 백공자.
그렇게 불리는 이들 또한 이런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계가 넓다고는 하되, 세계 전부를 무대로 삼아 게임을 벌이지는 않을 터. 둘 모두 한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홀로그램으로 보았던 폰과 졸. 두 명 또한 한국인이었다.
한국이 킬 더 킹 게임의 무대가 되었다. 의문을 품은 이시현에게 잭 더 리퍼가 빙그레 웃으며 무어라 말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강주희의 질문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자기, 자기가 쓸 폰으로 뭐가 좋아?”
“아무거나. 약정이고 그런 건 안 걸어도 되고.”
“약정? 그게 뭐야?”
“……그냥 기계사서 개통하자고.”
강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재계서열 7위, 유통업계 1위에 빛나는 태양그룹의 영애는 휴대폰 약정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좀 변했다 생각하는데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것들은 여전히 남아있구나.
이시현은 쓴 웃음을 지으며 최신형 휴대폰을 샀다. 약정 같은 걸 걸 필요도 없이 기계를 현금을 주고 사고 즉각 개통했다. 호구가 왔는데도 사기치는 짓이 없는 걸 보면 그들의 하는 행동과 모습에 질린 듯 했다. 이시현은 제 1번으로 강주희가 자신의 번호를 저장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람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휴대폰 대리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세워둔 차에 올라탄다. 길거리에 세워뒀지만 딱지 한 장 안 붙었다. 앞뒤로 주차한 차량이 딱지가 붙어있는 것과는 반대다.
돈의 힘. 그리고 격의 힘.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을 얻으면서 얻게 된 여유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생각할 수 있다. 본래는 뼛속까지 서민인 이시현은 감탄하고 시기해야 옳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걸 걱정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강주희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강주희가 물었다.
“자, 어딜 갈까?”
옅은 회색으로 얼룩진 잿빛머리를 흔들고 이시현이 대답했다.
“식사.”
“하긴, 어제 애 많이 썼지. 정말로 엄청 노력했다니까. 후후. 조금 늦은 아침이니까 브런치로?”
이시현은 브런치라는 용어를 몰랐다.
뭐지? 음식 종류인가? 간단하다면, 음? 하지만 그는 고민하는 척 했다. 아니, 강주희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브런치를 먹을 것인가, 그런 걸로 고민하는 듯한 상념.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미남이 눈매를 좁히고 입가를 손으로 문지르는 모습은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먹고 싶은데.”
“그럼 브런치네. 좋은 데로 가자. 내 친구들이랑 자주 가는 데 있어.”
“어이구. 친구가 있었군.”
“어머,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을.”
“딱 봐도 자존심 강해 보이고. 친구 없어 보이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강주희가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움푹 들어가는 느낌보다는 조금 들어가다 재차 밀려나오는 힘이 더 강하다. 강주희는 새삼스레 자신의 옆에 앉은 이 남자의 육체를 생각하고 감탄했다.
“당신, 도대체 뭐하던 사람이야?”
“말했잖아. 세상 60억 중에서 잉여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것처럼, 하. 정말이지……이 복근은 또 뭐람.”
“못 본 것도 아니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런 복근 가진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딴딴하진 않았어.”
복근 아래 깔려서 밤새 신음하고 비명지르던 여자가 할 말은 아니다.
“또 또 다른 사람 이야기. 만질거면 좀 더 아래를 만져.”
이시현이 덤덤하게 말하면서 등을 젖혔다. 강주희는 복근을 찌르던 손을 슬그머니 치우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금방 의도를 이해했다.
“이 녀석, 정말이지.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이렇게 능글맞아서는.”
쿡 하고 웃으며 강주희가 핸들을 잡았다.
“아무리 차량 안이라도 뚜껑도 없는 곳에서 그러고 싶어?”
“그럼 다음엔 닫힌 차를 몰지.”
“후훗. 다음엔 그래볼까. 아무튼 간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10분만이라도 눈을 붙이자.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즐기자.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말을 모으기 전까지.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은 상상하기 어려운 즐거움을 현재 만끽하고 있으니까.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미녀를 옆에 끼고.
관심과 사모하는 시선을 받고.
그런 눈빛에 미녀가 시샘하고.
그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생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이나 해봤을까.
서민의 꿈이 로또니 복권당첨이니 해도 그런 것을 이룬다 해도 지금과 같은 생활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이잖아. 하하.”
“응? 갑자기 뭐가?”
“생활이.”
이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어느새 카페에 도착했다.
‘몸이 익히고 있는 듯한’ 동작으로 베이글을 입에 넣는다. 동작 하나하나가 현악기의 울림을 생각나게 할 만큼 고풍스럽다. 반쯤 눈을 감고 허리를 편 채로 시선을 멀리 던진 채,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한 입만으로 베이글에 잇자국을 낸다. 입술에 묻어나는 빵가루 조금. 엄지로 훔치는 것만으로 입술에 매달려 있던 가루가 사라지고 옅은 미소가 베이글의 맛을 즐겼다는 증거로 남는다.
강주희는 먹던 것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남자가 세상에 있다.
이시현이라는 남자는 0.1%들의 세계에서만 살아오던 강주희조차도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의 미남이었다.
‘좋긴 좋은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이곳을, 정확히는 이시현을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남자든 여자든. 직원이든 사장이든.
브런치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테리어의 바깥에서 이시현은 수십, 수백 명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고 있었다.
‘너무 관심이 많잖아.’
강주희는 그를 곁에서 떼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무엇을 주고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그 정도로 이 남자는 멋졌다. 외형부터 시작해서 동작이나 목소리, 억양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밤기술은 말 그대로 색마 그 자체였다.
그렇게 넋을 잃고 울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의 기술은 끝내줬다. 그것만으로도 곁에 둘 가치는 충분했다. 다리 사이가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강주희가 몸을 일으켰다.
“나가자.”
“응? 아직 덜 먹었는데?”
시선이 집중된다. 디카니 폰카니 찰칵대는 소리로 음악 소리가 안 들릴 지경이었다.
이시현은 먹다가 강주희에게 손이 붙잡힌 채 질질 끌려 나갔다. 명백히 아쉬워하는 여자들의 한숨소리. 강주희는 생애 처음으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채 그와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