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회: 2> 첫 퀘스트. -- >
2> 첫 퀘스트.
남자는 거울을 보면 자신의 장점을 보고, 여자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본다고 하던가.
거울 속에는 자신을 닮았지만 현실의 그것과는 달리 꽤 잘생긴 이가 보이기 마련이다.
이시현 또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시현의 경우엔 여느 남성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 그는 정말로 잘생긴 미남이었다.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슬몃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며 멈춰서는 여자들이 대다수. 남자들도 그의 모습을 보고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옅은 잿빛 머리를 눈썹을 가릴 만큼만 기르고 자색의 색깔이 더해진 검은 눈동자는 요염하기까지 하다. 과거의 이시현보다 약 20cm정도 위로 자란 키에 체중은 약간 늘었지만 양옆으로 벌어진 어깨와 역삼각형으로 생긴 상체는 무겁다는 느낌은 전혀 없이 남자의 육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형미를 보인다.
날렵하고 길쭉한 다리. 입고 있는 바지는 폭이 좁지만 그의 다리에는 무리 없이 들어가고, 움직이는데도 지장은 없다.
이시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사내.
하지만 그 사내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만 오늘부터 완전히 다른 이가 되어버렸다.
이제 태어나면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어 쩔뚝이며 걷는 것도 아니고, 반 곱슬 머리를 억지로 빗어 내릴 필요도 없다. 왜소한 어깨와 삶의 질곡에 잔뜩 찌푸려진 이마, 초췌한 뺨과 질서 없이 자란 수염 따위는 이제 먼 옛날의 것이 되었다.
위압감이 드는 신장에 비해 다소 호리호리한 인상. 하지만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자잘한 근육은 그의 몸이 얼마나 단련이 되어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시현은 다시 태어났다.
킬 더 킹. 그런 룰을 가진 게임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의 일환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잭 더 리퍼가 머물던 호텔에서 숙박하던 그는 [군주의 세포]를 통해 유전자부터 새로이 개조되었다.
열흘이 지나는 동안 그는 그저 잠을 자는 것 같은 기분만 맛보면 됐다.
수면주사를 맞고 일어난 것처럼 가뿐히 깨어났을 때 이시현은 과거의 자신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인간이 되었다. 잭 더 리퍼가 바뀐 이시현의 신분증을 양손으로 건넬 때는 마치 재미없는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물던 호텔을 빠져 나왔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는 시선은 백이 넘었다. 여성의 시선이 대다수였다.
마음가짐은 여전히 ‘이시현’일 테지만, 이상한 것이 딱히 시선이 두렵다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어쩌면 육체가 새로 바뀌면서 그런 감각기관이 마구 팽창했는지도 모른다. 어깨를 움츠리고 음지를 향해 걷던 버릇도 대부분 사라졌다. 몸이 변했기 때문에 버릇마저 바뀌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 육체가 가진 성격이……. 재능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는 지갑을 꺼냈다.
낡은 지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은 동전이 몇 개.
“천 원짜리 한 장도 없다니. 나란 인간은…….”
저도 모르게 과거의 이시현을 향해 긴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하긴,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을 했고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렸지.
무겁고도 무거웠던 현실이 남의 것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돈 한 푼 없는 건 과거와 같지만 거기에 절망을 느끼는 일은 없다. 고소를 머금으며 그는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검토했다.
옷이 굉장히 단촐 했다. 호텔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옷과 속옷들이 잔뜩 있었지만 제대로 된 옷을 입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체크아웃 하고 나왔던 탓이다. 잭 더 리퍼와 함께 있던 수 일 동안 그는 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섹스 삼매경이었으니까. 지금 입은 옷은 밖에서 식사를 할 때 입기 위해 리퍼가 사 온 평상복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면 그거 호텔 거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이시현은 속옷도 가득하고 갖가지 옷도 가득했고 잭 더 리퍼의 옷도 있었던 옷장을 떠올렸다. 잭 더 리퍼가 살던 세상의 옷장이었던 걸까.
마법옷장 같은 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미남은 추리닝만 입고 있어도 옷태가 살고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긴다는데 이시현 또한 그런 모습이었다. 패션에 신경 쓴 적은 없었는데 외형이 바뀌고나니 영 신경쓰인다.
돈은 없다. 옷은 사고 싶다. 어떡해야 하지? 생전 해본 적 없는 고민 속에 가게 문을 열까말까 고민할 때였다.
빵빵, 꽤 낯선 음색의 크랙션이 울렸다.
이시현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문을 열고, 딸랑, 하고 문에 걸린 종을 흔들 때였다.
“이봐요, 거기 옷 못 입는 미남.”
이시현이 돌아보았다.
씩, 하고 미소 짓는 여자가 보였다.
“네, 그쪽.”
노란색 스포츠카에서 팔 일부와 머리를 내밀고 있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옷 사러 가요?”
“응. 그런데.”
“따라와요. 내가 아는 가게가 있으니까.”
이시현은 일생에 이런 일이 있었을까 생각했다.
딱 봐도 수억은 되어 보이는 스포츠카. 기종까지는 몰라도 여자가 타고 있는 스포츠카 정면에 달린 페라리의 심벌은 안다. 거기에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 이시현보다 나이가 조금 있어보였지만 그래도 20대 중반에 지나지 않을 터. 외형이 바뀐 것만으로 이런 여자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
이시현은 긴 다리를 늘씬하게 움직여서 스포츠카로 걸어갔다. 사실 그냥 평범하게 걸었는데 잡다한 묘사가 들어가는 것뿐이다. 잘 나가는 모델마냥 다리가 길고 자세가 나오기에. 세포에 새겨진 패션본능이 자세가 나오도록 돕는 게 아닐까?
여자가 타고 있던 차에서 위잉, 세련된 기계음과 함께 날개처럼 옆문이 열렸다.
“옆에 타요.”
“고마워.”
“고맙긴 뭘.”
여자는 미련 한가득한 여성들의 한숨을 들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가 머리위에 걸쳐둔 선글라스를 썼다. 옅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숏컷으로, 겨우 귀밑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여자 손도 못 잡아보던 시절에는 여자의 매력은 긴 장발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잭 더 리퍼를 만난 후 숏컷이 짱이라고 취향을 바꿨지만.
이시현은 2인승의 차량은 처음 탔다. 사실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이런 차를 타본 사람은 그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그의 얼굴은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데 둔감했다. 유달리 긴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턱을 괸다.
휘익.
여성의 입에서 울려 퍼지는 휘파람소리. 이시현의 느긋함과 그런 태연함에서 오는 모델의 포스에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아는 가게가 멀어?”
“밟는 거에 따라 다르지.”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시현 또한 느긋하게 웃고는 등을 젖혔다. 부드러운데다 탄력까지 넘치는 최고급의 가죽 시트에 등을 얹자 여자가 액셀을 밟았다.
매끄러운 타이어소리와는 반대로, 다소 거친 움직임으로 차량이 움직인다.
도심 시내이므로 세게 밟지는 못한다. 문을 열어두고 있어 차량은 대번에 주목을 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는 이시현을 보며 사람들이 시선을 떼지 못한다. 스포츠카에 대한 욕망의 시선은 여자도 많이 겪었다. 부러움과 시샘의 시선도 다수 겪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겪는 시선은 그동안 겪지 못했던 종류의 것들이 태반이었다.
상대에 대한 대단함, 당연하다는 듯한 감정, 맹렬한 분노, 그리고 터무니없는 탐욕.
몸이 오싹할 정도로 전해지는 시선을 만끽하며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후훗.”
이시현이 느긋하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당신을 태우고 돌아다니는 걸로 받는 시선이 느껴져서.”
여성의 말에 이시현이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동물원의 원숭이냐.”
“원숭이 정도로는 이런 시선 못 받지. 동물원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종류가 아닐까.”
이상한 표현이었지만 이시현은 제법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일반적인 동물들 천지인 동물원에서 희한하게 공룡으로 존재하고 있단 말이지.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니까 당신 같은 여자도 나를 불렀겠지.”
“물론. 생각 없이 드라이빙 하는데 당신을 본 건 기적과 같은 일이지. 그거 알아? 나 말이야. 남자보고 감탄해본 거 처음이야.”
“티라노니까.”
이시현의 대답에 여자가 깔깔 웃었다.
“맞아. 티라노니까. 후후, 후후훗. 그럼 밟을 게. 조심하라고.”
-끼이이이.
차량이 막히는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속도에 의해 약간의 무게가 실렸지만 이시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복근에 새겨진 근육과 신체적으로 완벽한 그의 밸런스는 허리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충격의 대부분을 해소하고 있었으니까. 상체는 거의 미동도 앉고 이시현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염색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천연의 잿빛 머리가 스포츠카의 움직임에 맞춰 펄럭거렸다.
마치 한 폭의 영화 같았다.
일반적인 자세만으로도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여자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남자가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왔담.
뭐, 아무래도 좋지만.
내가 먼저 캐치했으니까.
오늘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가져주겠어.
이런 명품은 흔치 않으니까.
여성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액셀을 더욱 밟았다.
‘네가 그런 생각이라면 나 또한 네가 명기임을 시험해보지.’
이시현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날쌘 스피드에 의해서 소리는 제대로 된 음운이 되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어떤 가능성이 있어 그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말 한 마디 한 적 없다.
그러나 이시현은 여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체에 힘이 들어간다. 잭 더 리퍼, 가공할 이름을 가진 소녀와 지내면서 그는 여자의 쾌락에 흠뻑 젖었고 이 몸을 사용하는 법을 교육받았다. 인간성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군주 세포], 그들 세상에서도 극히 드문 지배자들의 세포는 비단 유전자만 바꾸는 게 아니라 유전자에서 발현하는 감정이나 성향마저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이시현은 쿡 하고 웃었다.
“왜 웃어?”
여성이 물었다. 이시현이 대답했다.
“잠시 후의 시간이 기대돼서.”
“어머나, 짐승.”
“짐승이라니, 이런.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잠시 후 가게 가는 거 아니었어?”
“그러면서 움직이는 손은 뭔데요? 응? 운전 중이니까 못된 손은 그만.”
“미안. 이 몸이 된지 얼마 안 돼서.”
이시현은 진실을 말했지만 여성에게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표현이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