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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8화 (8/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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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잭 더 리퍼는 어째서?

잭 더 리퍼는 어스 엠파이어의 장군이며 탐닉의 군주라 불리는 남성을 지키는 자다.

두상이 그대로 드러나게 자른 검은색 쇼트 컷에 붉은색의 눈.

신장은 155cm에 체중은 40kg 초반.

가슴은 빵빵하고 허리는 앙상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가는 가운데 엉덩이 쪽으로 가면 다시 살이 붙어 빵빵해진다. 다소 작은 듯한 체구에 성인 여성다운 몸매를 가린 것은 정장.

가슴과 엉덩이만 묘하게 부푼 마른 몸매를 가린 검정색 정장은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없을 만큼 재질이 좋아 보였다. 실제로는 어스 엠파이어에서 만들어진 방호복으로 때가 타지 않고 수십 톤의 충격을 막아내는데다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의 섬유이긴 하지만…….

세 번째 게임 참여자이자 급조된 후계자를 만든 그녀는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손에 쥔 지팡이를 휙휙 휘둘렀다.

말을 걸거나 쳐다보기에 부담되지 않는 담백한 신장에 눈매가 차갑지만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을 가진 그녀는 주목을 끄는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명백한 외국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어 외국인이라면 신기한 사람마냥 구경하는 사람들 성향 때문에 한국인과 말을 거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잭 더 리퍼는 바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 탐닉의 군주 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주인이 싫다거나……일부러 돌아가지 않아서 감질을 태운다거나……그런 이유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비정상일 정도로 그녀는 주인을 경애하고 존모한다. 그녀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주인인 탐닉의 군주가 명령한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다.

그녀는 이곳을 전장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탐닉의 군주의 명에 따라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 혹여 이 무대(지구)에서 게임을 방해하려는 불순 세력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다 처단해야지. 그녀는 수백 번이나 해 왔던 일을 하는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초능력자 같은 건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이계와 연결된 문도 없고.

더러운 외계인도 나타나는 것 같지 않다.

“아, 재미 없네~.”

만에 하나 있을 사태를 대비해서 준비를 갖춰놨더니 전형적인 시험장이다. 외부의 소란이 있을 이유가 없고 그로 인해 시험이 중단되지도 않는다. 대개 그녀가 할 일이 없는 것이 사실. 그렇지만 가끔씩, 정말로 때때로 그녀가 힘을 써야만 하는 상황도 있다.

갑자기 괴수가 나타난다거나 외계인이 나타난다거나 몬스터가 나타난다거나 어쩐다거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홀로 세계의 위기를 구했다. 목적은 단순히 게임을 치르기 위한 게임방 정리에 불과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를 구한 영웅 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 것에 기뻐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괜한 짓 했다고 쑥스러워 하지도 않지만.

그녀는 곧바로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 그가 즐거워할 만한 일을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그가 조금이라도 웃으면 완전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 한다. 물론 그녀는 몇며칠 이 땅을 더 돌아다닐 것을 명령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후계자를 며칠에 걸쳐 찾았고 후보를 찾아냈다. 혼의 색깔이 무척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색과 거의 같았다. 색감은 좀 흐릿하지 않았나 싶지만 그래도 황금색의 영혼 색이라니

“음~. 그럼 술이나 좀 더 마실까.”

리퍼는 혀를 날름 핥고서 빙그레 웃었다.

그녀에게 취미가 있다면 술을 마시고 알코올로 자신의 감각기관에 이상을 일으키는 것. 본래라면 취기는 명정(酩酊) 효과로 치부하여 부작용이 올라오는 걸 신체기관이 막는다. 그래서 아예 술기운이 올라오지 않도록 육체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고 기본 신체 능력도 그러하지만 잭 더 리퍼는 일부러 자신의 감각을 극도로 낮추어 육체의 반응을 속인다.

그렇게 취하면 정신이 영 어긋나는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자신이 약해졌다는 끔찍한 감정과 그에 따르는 공포도 그녀를 기쁘게 한다.

“여기서 술을 마실 곳은……음, 없으려나.”

아니, 있지.

그녀는 어느 칵테일 바를 떠올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칵테일 바로 향한다. 그녀의 걸음은 곧 경쾌해졌고 흥얼흥얼 허밍하는 동작은 귀엽기까지 했다. 걸어서는 도착하기에는 꽤 먼거리였지만 부지런히 걸으면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리퍼가 전력으로 달리면 1분, 혹은 2분 안에 도착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눈에 띄는 짓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무래도 천성이 살인자이다 보니…….

혼잣말을 하고 나 왜 혼잣말 하고 있니?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깔깔대던 그녀는 곧 칵테일 바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또 왔어요!”

문을 탕 하고 여는데 들리는 비명소리.

맛있는 칵테일을 만들던 가슴 큰 바텐더 여성이 어떤 남자에게 팔목이 붙들려 있었다.

“이 일본년이……! 이 나라에서 꺼지라고!”

“저, 저는 이곳에 정당한 이유로 고용되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칵테일을 만드는데 일본인인 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바텐더는 일본 국적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생긴 것은 완전히 서양인이다. 아마 일본인이 서양인과 혼인한 후 낳은 자식이 아니었을까. 길고 반짝이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칵테일 바에는 어울리지 않는 덩치 큰 노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네년 같은 일본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엉망이 되는 거야! 일본년들은 창녀처럼 좆이나 처박고 매음굴에서 살아!”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사과하세……꺄악!”

바텐더는 의외로 강단이 있는지 험한 말에도 반박했다. 물론 강단만 있을 뿐 힘은 없는지 노인의 힘에 휘둘리기만 했지만. 리퍼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저기요?”

그녀의 목소리는 소란통에서도 또렷이 들려 노인과 바텐더 모두가 돌아보았다. 꽤 이른 시간이었기에 칵테일 바에 있던 손님은 적었다. 그 손님들은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기도 뭣해서 어정쩡한 동작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퍼는 그들에게 눈짓하면서 말했다.

“제가 정돈할게요. 술값도 이쪽에서 계산할테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실래요?”

“어, 어. 그러면 너무 미안한데.”

“바텐더 씨와 아는 사람이라 그래요.”

“아, 그렇다면야.”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리퍼는 문을 잠갔다.

찰칵.

“저기요~?”

“넌 뭐야? 아, 이년도 외국년이네.”

말하는 노인의 얼굴은 붉었다. 입에서는 술냄새도 났다.

체격은 그럴싸했다. 입고 있는 옷도 언젠가 나라를 위해 입었던 군복을 보수한 것이었다. 그의 복장과 말하는 투, 그리고 마신 술의 냄새를 보고 리퍼는 그의 상황과 성향을 대략 짐작했다.

“여기서 횡포 부리면 곤란한데요~.”

횡포.

리퍼는 일부러 거친 표현을 썼다. 횡포라는 표현 대신 소란이라고 했다면 조금 더 부드러운 말이 되었을 것이다.

“난동부리면 안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난동. 이 또한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거친 단어다. 특히 난동 피우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더더욱.

“난동이라니!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다는 건 피와 양수에 적셔져 나온 갓난아이와 같이 어린 아이라는 의미다. 리퍼는 자신의 머리를 슥슥 만져보고는 씩 하고 웃으며 머리에 손가락을 박아넣었다. 피육을 뚫은 그녀의 손가락은 그녀 본인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어머나, 정말이네. 머리에 피도 안 말랐네요. 어떻게 알았대요?”

머리에 다섯 개의 손가락 구멍을 뚫은 리퍼의 얼굴은 금방 피로 물들었다. 눈이 살의로 달아올랐다. 그녀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지는 것 같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 이 미친년!”

“미친 건 당신이고요. 어째서 맛있는 술 마시고 기뻐하고 싶은 나를 이렇게 화나게 하나요? 다들 죽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만 사는 것도 아니고, 어스 엠파이어, 위대한 제국에서도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 원시 야만인 지렁이 사촌 따위가 나를 열받게 하는 건가요? 법 없이도 사는 나를 왜 이렇게 화나게 하는 건가요? 이 쓰레기 같은 무지렁이 원숭이가!”

“다, 닥쳐! 무슨 소리야아아!”

“심처.”

리퍼는 손가락을 적신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살벌하게 웃었다.

“<망자의 거리>.”

공간이 뒤틀린다.

세계가 겹친다.

바텐더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손이 허공에 맴돈다. 바텐더가 사라지고 노인과 리퍼만 남았다. 노인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고 별로 변한 게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다가도, 이내 리퍼의 살의에 번뜩이는 눈을 쳐다보고 바짝 굳었다.

어쩐지 조금 더 어두워진 칵테일 바에서 어둠을 사르는 붉은 눈동자가 터무니없이 끔찍하게 보였다. 노인은 그대로 달렸다. 리퍼가 문 앞에 있었지만 그녀를 걷어차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리퍼는 걷어차인 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노인은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생각을 뒤로 한 채 문을 열었다.

찰칵찰칵.

찰칵찰칵.

찰칵.

“안 열릴 거예요. 우리의 세계는 이게 전부니까.”

노인에게 걷어차여 그녀의 새까만 정장에 군화의 발자국이 묻었다. 리퍼는 장갑낀 손으로 옷가지 위를 몇 번 쓰다듬으니 먼지가 마술처럼 사라졌다.

“무슨 소리야!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망자의 거리>에요. 내가 원하는 공간을 그대로 복제하여 덮어씌우는 거죠. 뭐 말한다고 알 리가 없겠지만요. 내가 원하는 사람만 초대할 수 있고, 여기서 부숴진 모든 것은 이 공간이 사라지면서 역시 사라지죠. 그리고 남은 건 이 공간에 덮어씌워지기 전의 원본. 원본에 손댄 적은 없으니 복제된 <망자의 거리>가 사라지면 원본만 남는답니다.”

리퍼는 양손을 오므렸다가 송등 바깥으로 살짝 터는 시늉을 했다. 오므린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가늘고 예리한 메스가 들려 있었다.

“한 가지 물어볼까요? 어떤 죽음을 좋아하세요?”

“뭐, 뭐?”

“이런. 이제는 내 말도 무시하고.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안 좋잖아요. 그러니까.”

리퍼는 고개를 슬쩍 돌리고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들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런 애들이 나타나는 거죠.”

검은 그림자는 인간의 형태도 있었고 짐승의 형태도 있었다. 또한 칵테일 바를 가득 채울만큰 거대하고 팔다리가 여럿 달린 존재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난 그것들은 ‘공간이 넓어진’ 칵테일 바의 벽 저편에서 소리 없이 다가왔다. 노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죽음의 기색은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문을 열려 애썼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너무 화가 났나봐요. 아니면 나에게 겁을 먹고 꼼짝달싹 못할 녀석들이 막 화내면서 나온 걸 보니. 이제 내가 손쓰기는 어렵겠네요.”

리퍼의 말대로 검은 그림자가 ‘그림자’에서 검은 형태를 가지면서 질감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것들은 섬뜩하리만치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노인의 떨리는 다리를 쥐었다. 다리를 끌고 문고리를 붙잡은 노인을 당긴다. 노인의 비명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리퍼는 손을 까딱였다. 그녀의 손가락 틈 사이로 비죽 나와 있던 종잇장 같은 날을 가진 메스가 사라졌다.

리퍼는 칵테일 바의 의자를 하나 끌어와서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림자들이 음울한 신음을 내면서 노인을 해체하고 있었다.

리퍼는 쿡 하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칵테일 바에 보관된 보틀 하나를 그림자가 가지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리퍼가 술병을 따고는 술을 들이켰다.

노인을 향한 그림자의 공격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노인이 힘없는 신음을 토하며 그 자신이 흘린 핏덩이 속에 잠겼을 때. 그의 시신 위로 자그마한 그림자가 하나 올라왔다. 그림자는 어둠일색이었기 때문에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군복을 입고 있는 인간의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으우우, 듣는 이들이 귀를 막고 싶어질 정도로 비통한 소리를 내며 그림자는 오열했다. 리퍼가 손을 휘젓자 그림자 모두가 사라졌다.

리퍼는 아쉬워하면서 보틀을 하나 들고서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바텐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문을 열고 나가는 소녀를 보고 있었다. 소녀가 손을 휘휘 흔들어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사라졌고 갑자기 나타났으며 이 칵테일 바에서 가장 비싼 보틀을 들고 있었고, 그녀가 시비를 걸었던 노인과는 함께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 투성이었다.

정말로 난감한 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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