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 회: 1> 전초전. -- >
졸(卒)의 지위를 가진 이성아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밤거리를 걸었다.
날렵하게 잘 빠진 몸매에 매력적인 이목구비, 그리고 살이 많이 드러나는 옷차림 덕분에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휘파람을 부는 남성들이 다수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려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름 없는 졸의 걸음이 너무 빨라 결국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이성아는 하나의 임무를 받고서 그녀의 거처에서 나왔다.
졸은 이를테면 승부에서 버리는 패.
이걸 통해서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혹은 어떤 말을 쓰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성아에게는 졸이 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졸이 되기 전의 기억이 아예 없기에 후회할 것도 없고, 죽음이 보이는 명령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이 이성아의 머릿속에 차 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한 가지 무기가 있다.
그의 주인이 ‘킬 더 킹’이라는 게임을 하는 중, 그 안의 미니 게임을 통해 얻은 무기다. 그리 성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졸이 사용하는 건 아깝다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성아의 주인은 시니컬하게 건네주었다.
“벌레도 침 정도는 가지고 있어. 그러니 쓰고 죽어라.”
이성아는 감사하며 무기를 받았다.
현재 이성아가 밤거리를 헤매는 까닭은 킬 더 킹 때문이다.
킬 더 킹은 갖가지 미니 게임을 준비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포함하는 한편 서로의 말을 전장으로 내보내 싸움 붙이는 기능도 있다. 두 왕이 가진 가장 강력한 말이 한 차례 부딪치는 것을 시작으로 줄곧 미뤄진 전쟁은 이제 막 두 번째 막을 열려 하고 있었다.
이성아는 사전에 전장에 나선 이이며 상대의 행동을 가늠하는 역할을 맡고 이 자리에 섰다.
살아 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죽기 전에 주인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하려고는 한다. 물론 살아 돌아가면 좋겠지만 딱히 기대는 하지 않는다.
“냄새가 나는데…….”
흑공자는 전초전의 시작으로 이성아라는 졸을 사용했다. 상대도 아마 폰(pawn)을 내보내서 상황을 살필 것이다.
폰과 졸의 이성아의 힘은 동등.
체스나 장기의 말 역할에 충실한 그녀들은 말의 역할에 따라 지닌 힘과 재능의 한계가 다르다. 하지만 움직임이 자유로운 이성아는 한 번 영역을 밟은 폰에 비해서 침략과 후퇴가 자유롭다. 폰이 이 영역으로 발을 들이밀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성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는 걸까.
이성아는 빠르게 시내를 뒤지고 다녔다.
그녀의 인간을 초월한 감각이 전파를 잡은 레이더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이쪽이군.”
싸늘하게 웃으며 이성아가 근육을 죄었다.
아직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한계는 벗어난 여성.
장군이 되지 못한 이들을 ‘그’는 무장(武將)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장군이라는 존재가 극도로 희소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여성의 절대다수는 무장이다.
이성아는 대학 2년생의 학생이었고, 아마추어 여자 복서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인정한 흑공자에 의해 납치되어 조교(調敎)되었고 현재는 흑공자의 졸이자 무장이다.
흑공자의 말이 된 이후 그녀는 과거 ‘인간’일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얻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버틸 수 없는 쾌락도 맛봤다. 그리고 공포도.
그 공포를 넘어 사상이 맛이 갈 쾌락을 맛 본 이성아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인간이었을 때의 위치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흑공자는 그의 성격에 맞게 여자를 대우했고 그 결과 이성아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과는 다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기능이 상승한 육체를 제외하고서라도 생각이나 근본적인 판단 자체가 인간과는 멀다.
“흐……주인님.”
주인님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울 것 같은 미소를 머금게 된다.
온 몸이 박피(剝皮)될 때 흑공자는 이성아의 얼굴을 문지르면서 웃으라 말했고, 그때 그녀는 어떻게든 웃을 수 있었다. 그녀의 웃음은 변질되었고, 변질된 웃음이 고정되었다. 서글픈 웃음은 그녀만이 지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되었다.
냄새가 난다. 개의 후각을 ‘따위’라고 표현할 수 있는 후각이 피냄새를 머금은 어떤 여성의 체취를 맡았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오감의 기능이 뛰어나고 힘과 속도가 발달한 이성아는 매우 정석적인 태도로 상대를 쫓아 거리를 파고 들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골목의 가장 깊은 곳에는 폰이 있었다.
골목 안쪽. 들어가는 초입에서부터 불어 닥치는 죽음의 향취.
여덟 명이 넘는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고, 팔다리를 찢어 피를 마시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폰…….”
졸인 이성아가 골목 입구를 가로막고 짓씹듯 내뱉자 갓 죽인 남성의 팔을 뜯고 입으로 가져가 쏟아지는 핏물을 받아마시던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피투성이가 된 성녀처럼 보이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여성.
핏물로 얼룩이 져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안경을 쓰고 있는 옅은 갈색의 선량한 미인이 웃었다.
사람은 붉은 피를 보며 역겨워 한다. 죽음을 연상케 하니까.
피칠갑을 한 이를 보면 두려워한다. 피칠갑을 한 피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상상 때문에.
피를 마시는 이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지 않으니까.
인간이라면 미세하게 몸을 떨고 두려워하고 역겨워했을 모습을 목격하고서도 이성아는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폰 주제에……별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 앉았군.”
“졸, 인가요?”
나른한 목소리로 안경을 쓴 여성이 물었다.
“하긴 별 다른 장점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졸개에 지나지 않겠죠.”
“나와. 죽여줄 테니까.”
“졸개 주제에 감히 제게?”
“졸이 장기의 말 중에서 제일 약하다고는 해도 폰보다 강한 게 상식 아닌가? 좋은 다섯이지만 폰은 열 개라면서?”
“후후후. 숫자의 차이가 힘의 차이라고 믿는 무식한 종자가 여기 있네요. 무식하긴. 노예는 주인을 따라 닮는다더니. 멍청하기도 하네요.”
이성아는 인내의 한계가 닥쳐오는 걸 느꼈다.
전장구축이 되는 곳까지 끌고 가서 거기서 쳐 죽여 버릴까 싶은데 자제가 잘 안 된다. 졸이 되기 전의 이성아도 다소 급한 성격이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이건 성격이다. 이성아는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흙바닥을 벅벅 긁었다.
“여기서 죽여주지.”
“어머머.”
폰은 놀랐다는 듯 피투성이 손으로 피투성이 입을 가렸다. 그녀는 곧 들고 있던 팔을 내던졌다. 어깻죽지까지 뽑혀 나온 누군가의 팔을 걷어낸 이성아가 양 주먹을 움켜쥐고 복서의 자세를 잡았다.
“소개할게요. 세 번째 폰, 안미희라고 해요.”
“두 번째 졸, 이성아다.”
엄한 남성을 여덟이나 쳐 죽이고 그 핏물을 받아먹는 이 순진한 인상의 여성, 안미희는 분명히 힘을 축척했다.
괜히 쫓기고 있는 걸 알면서도 피내음을 풍기며 남자를 죽인 대범함. 그건 대범함이 아니라 피를 받아먹으면 강해지는 어떤 특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장의 능력과 유형을 감히 함부로 측정하면 안 된다.
알고 있지만 이성아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그녀가 스텝을 밟고 한 순간어깨를 당겼다.
마치 영화의 컷인이 한순간 씹힌 것처럼, 이성아와 안미희의 거리가 좁혀들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거리 좁히기. 안미희는 안경 너머로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못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이성아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안미희의 심장을 꿰뚫는다. 순간 파괴력 5.5톤. 전성기의 타이슨이 뻗은 스트레이트 펀치의 5.5배에 이르는 강력한 펀치.
최소 D컵의 안미희의 가슴을 꿰뚫었다.
살의 저항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강철 플레이트도 주먹만한 구멍을 만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충격에 인간의 육체는 그냥 부서질 뿐이다.
이성아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더 되는 연속공격이 떠올랐다. 살을 파고들어 등까지 구멍을 뚫어버린 손을 빼내는 직후 그녀의 주먹에 엉킨 핏물이 흩날렸다.
피가 손에 뭉쳤다가 흩어지는 건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만 어쩐지 피가 튀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이성아는 상대, 안미희가 피 칠갑이 되어 사람의 육체에서 피를 짜내 마시던 모습을 떠올렸다. 순간 깊은 혐오감과 함께 불안을 느꼈다. 연속된 공격을 퍼부으려 하던 그녀는 직감을 믿기로 했다. 가슴과 함께 심장을 꿰뚫은 이성아가 몸을 뒤로 빼며 공격을 중단했다.
물러난 이성아는 자신의 머리칼이 몇 가닥 허공에서 너풀대는 것을 느꼈다.
‘공격당했다?’
머리카락이 끊겨 허공에서 너울대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상대가 체스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폰이라고는 해도 상대 또한 인간을 벗어난 무장. 어떤 기술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흑공자 진영에서 가장 두려운 ‘그 여자’. 그 여자의 특기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상상을 초월한 것들 뿐이었다.
다행히 이성아의 판단은 옳았던 모양이다.
안미희가 심장이 뚫린 상황에서 피를 입에서 쿨럭거리며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