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회: 1> 전초전. -- >
이시현의 떨리는 눈동자가 잭 더 리퍼를 바라본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조잡한 재주지만 저의 특기 중 하나랍니다. 어떨까요? 이제는 좀 믿을 수 있을까요?”
일정한 공간의 시간을 저장하고, 다시 되감아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현대과학을 가볍게 무시하는 그런 능력을 보고 이시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괴물이라고.
메스로 사물을 난도질 할 때까지는 ‘현실적이지 않은 풍경’에 멍해져버렸지만 지금 일정한 지역의 시간이 되돌아가는 상황을 보고서는 어딘지 모르게 제고제어의 한 축이 비틀어졌다고 느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믿어서는 안 되는 일로 전환되는 순간, 이시현은 그 동안의 상식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 여자가 한 말은 가감 없는 진실이라고.
그렇게 믿고 말았다.
꿀꺽, 침을 삼키고서 이시현이 물었다.
“아까 네가 보여준 그 보석이…….”
“왕의 권력. ‘어떤 인간이든’ 장군으로 만들어 주는 물건이지요?”
“너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네.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장군이 되겠죠.”
이시현은 낯선 표현을 듣고 당황했다.
“여성에게 장군(將軍)이라고?”
장군이라는 단어는 여성에게 적법하게 사용할 표현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감이 나쁘다.
“음? 아, 네. 그 말씀을 드리지 않았네요.”
하지만 그 오해를 짚어주고자 잭 더 리퍼가 말했다.
“저와 같은 사람은 매우 매력적이랍니다. 소위 말하는 매우 안기 좋은 여성이에요. 사용하기 적합한 정액단지이며 색노이고, 암퇘지고, 살아있는 보지랍니다. 물론 저의 항문도 따뜻한 성욕해소도구죠.”
……저 예쁜 입에서 육변기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걸 보고 이시현은 매우 심란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그런 처지의 본인에게 대단히 만족하는 듯, 기쁜 사실만을 전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놈의 제국에서 여자의 가치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기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잭 더 리퍼의 모습은 황홀감에 사로잡힌 것처럼도 보였다.
“허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에요. 제국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안기도 좋고 명령하기도 좋으면서도 언제나 곁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답니다. 그게 바로 저희에요. 방금 전 보셨던 기술, 그게 장군으로서 지니는 저의 특기인거죠. 어, 음. 특기란 뭐라고 할까……. 무기의 사양? 재원? 그런 느낌이네요. 어떤 장약을 쓰는가, 몇 연발인가. 무기에도 그런 특징이 있잖아요? 저희에겐 특기가 그런 성향을 결정짓는 거랍니다. 그 중에서도 장군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전투병기 중 가운데서 상위 1억 분의 1에 달하는 확률의 힘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말해요. 그런 등급에 속하면 비로소 장군이 된답니다.”
1억 분의 1…….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치 끝에서 잭 더 리퍼는 장군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 외에는 무장(武將)이라고 하는데 무장은 1이 되지못한 9999만 9999명이고요. 뭐 그렇게 수가 많다보니 쓰레기 같은 것에서부터 장군 급에 달하는 것들도 있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니 왕의 권력, 즉 왕권이라고 하는 붉은색 심장 같은 보석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걸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뭐든지 이뤄주겠다고 말했다.
이시현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내가 그 게임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어?”
이시현은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은 적이 있다.
그것은 성장하면서 곧 깨져버렸지만 가치 없는 인간이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물론 그 생각도 무너졌고 패배자로서 자살하게 되었고, 이시현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었다.
자신은 가치 없는 이다.
이런 선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시현의 시선이 잭 더 리퍼를 향했다.
소녀는 조금 당혹스러워하더니 귀밑에서 흔들리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흑백의 두 명이 싸우는 건 재미야 있을지 몰라도 너무 지루했거든요. 저의 주인님이 명하셨어요. 흑과 백도 아닌 회색을 찾으라고. 게임에 참여할 세 번째 말을 찾아내라고. 그래서 저는 사실 며칠 이 도시를 돌아보았답니다. 누구를 찾을까, 그 어떤 이를 회색으로 만들고 조커로 쓸까 고민했지요. 그러다 문득 저의 특기 중 하나가 생각이 나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보았죠.”
잭 더 리퍼.
“저는 혼을 볼 수 있어요. 영혼(靈魂)은 지문처럼 모두에게 특징적인 것이 있답니다. 형태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에요. 제가 사람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랄까……. 그런 거죠.”
그 혼은 어떤 정밀한 기계가 지문을 감지하듯이, 혼의 색깔과 형태와 크기 등을 판단해 그 어떤 이라도 헷갈리지 않고 정확히 누구임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지표가 된다.
“지치고 다리도 아파서 칵테일 바라도 들를까 싶어서 이동하려던 때였지요. 시현님이 보였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어요. 저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가치 있는지 어떤지는 몰라요. 미래도 읽지 못하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판단도 못한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을 내고 있는 시현님을 보았고 택하기로 했어요.”
“그…….”
입술을 깨물고 이시현은 침묵했다.
“내게는…….”
나는 목숨이 걸린 게임에 참여할 의사가 있나?
저런 여자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걸까?
나는 오만하게 ‘선택받은’ 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고민은 짧았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닦아내고자 눈을 거칠게 부빗거리고서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한 말을 지금껏 이해도 되고 나름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내가 그런 게임에 참여할 수 있을지, 그들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저 첫 게임에서 바로 깨지고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나 자신이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이런 게임에 선택된 것조차 내 일생에 있어 가장 큰 행운일 수도 있겠지.”
소녀, 잭 더 리퍼는 미소 띤 얼굴로 이시현의 말을 들었다.
어설프고 정리도 되지 않은 그의 말. 이시현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깊은 시선을 던지며 들어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택한다면. 내가 여기에서 너의 선택을 통해서 조커가 될 수 있다면…….”
그런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애가 있는 사내가 한 명.
사내를 올려다보며 기쁜 미소를 짓고 양 손을 뺨에 붙이며 황홀해하는 소녀가 한 명.
소녀를 내려다보며 지금 정한 생각을 확고한 사실로 만들려는 사내가 한 명.
그 사내의 변해가는 각오와 그 각오가 전하는 기세에 혀를 날름 핥으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웃는 소녀가 한 명.
두 명의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교차하고 앞으로 있을 사실에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게임에 참여하겠어! 왕을 죽이는 게임에!”
그의 선언과 동시에 알몸의 소녀가 경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알아두세요, 이시현님.”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힌 잭 더 리퍼가 말했다.
“저희들의 주인으로 걸맞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현님은 대부분의 것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인간을 내려다보며 인간보다 우위에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시현님의 의도에 따를 것입니다. 이시현님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바라는 바 행복한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의지를 다하여 싸울 것입니다. 시현님. 잠에서 깨어났을 때 만족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리퍼가, 제가 맹세할게요. 그러니까.”
잭 더 리퍼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이시현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잠시 주무세요. 안내자로 찾아온 저의 안내를 기대하시고.”
이시현은 그러기로 했다.
너무 졸렸으니까.
그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잭 더 리퍼가 미소 지었다.
“편히 잠드세요.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게임에 참여하게 될 거예요. 의외로 많은 표를 획득하고,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죠.”
잭 더 리퍼가 몸을 일으키고서 양손을 펼쳤다.
“그리고 최종적인 우승자가 되어서 탐닉의 군주가 되신다면 저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을 획득하고 영원히 소유한 채로 쾌락을 만끽하실 수 있을 거예요. 후후. 그럼 안녕히 주무시길.”
어둠이 방을 잠식한다.
한 명의 인생을 끝낼. 그리고 새로이 시작할 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