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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2화 (2/141)

< -- 2 회: 1> 전초전. -- >

1> 전초전.

왕이 될 사람은 한 명.

군주로서 입지를 굳힌 두 명은 군주들의 정점에 서기 위하여 도전했고, 싸워왔고, 이겨왔다.

그리고 남은 것은 둘.

흑공자와 백공자.

두 명이 어두운 방에 들어섰다.

이미 자리해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소년.

“늦었다. 머저리. 자리를 찾아서 앉아라.”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검은 미소년이 시니컬하게 지껄였다.

어둠 속에서도 완연히 드러나는 흑(黑).

지옥을 보고 온 듯 썩어빠진 눈초리에 비틀린 미소는 그 준수한 미모조차 빛바래게 만들었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 특유의 낭랑하고 우아한 목소리도 비틀린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독이 되는 것 같았다.

소년의 말에 대응하듯 들어오는 이는 흰색 일변의 청년이었다.

굽이치는 금발을 허리너머까지 기르고, 푸른색 두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흰색 정장의 미청년이 소년을 내려다보고 비죽, 입술꼬리를 틀어 올렸다.

“오 이런,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그 개 같은 성격에 나 같이 존엄한 분을 기다리려니 진이 다 빠졌겠지. 하지만 이해해. 이해해줘야지 어쩌겠어. 너와는 달리 나는 많이 바쁘거든.”

백공자라고 불리는 사내였다.

흰색 셔츠에 정장, 그리고 흰 바지와 구두를 입고 있는 잘빠진 사내가 검은 미소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월하기 짝이 없는 거만한 태도와 느긋한 표현, 그리고 누군가를 능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입술과 활처럼 굽어진 눈매 또한 이 사내가 정상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어둠을 밀어내듯 주변을 환하게 빛낸 하얀 미청년이 굽이치는 금발을 쓸어 올리고서 턱을 들었다.

“닥치고 앉아.”

“네, 그러지요. 그래서 뭐야.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하고. 이 더럽고 칙칙한 성의 성주님?”

검은 미소년의 뒤에서 어둠과 동화되듯 서 있던 그림자가 슬몃 움직였다. 그것을 말없이 손을 살짝 들어 말린 검은 미소년이 말했다.

“새로운 게임이 정해졌다.”

검은 미소년의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움직이자 하얀 미청년의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도 조금 몸을 움직였다.

“오.”

옷차림이 하얀 일색인 반면 검은 장갑을 낀 하얀 미청년이 역시 손을 슬쩍 들어 제지했다.

“난 게임을 좋아해. 언제나 내가 이기니까. 그리고 이번 게임은 정말 즐거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 승자에게는 이 게임을 끝장 낼 기회와 함께 내 앞의 혼탁한 검정색 오물을 치울 수 있을 권리가 있거든. 아, 이 즐거운 게임도 드디어 마지막이 되었군. 그래서 뭐지?”

“뭐가.”

“그래서 뭐냐고. 정해진 게임의 종류 말이야. 이것도 말하지 않으면 몰라?”

“이번 게임은.”

검은 미소년이 문득 쿡쿡 하고 웃었다.

비틀리고 썩어문드러진 미소였다. 그렇게 잘나고 선이 고운 소년이었지만, 웃음을 짓고 눈매를 비틀어 올리니 ‘끔찍’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보다 짙은 흑으로 몸을 휘감은 검은 미소년이 형언할 수 없이 비틀리고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게임은 보드게임.”

“보드게임?”

“닥치고 들어라. 쓰레기. 말하고 있잖아.”

“말하고 있으니 질문하는 거잖아, 쓰레기. 응? 응응? 내가 되물으면 네, 하고 정중히 대꾸해야지 지금 항의하는 거야? 응? 네가 항의할 자격이 있나? 너와 말을 섞는 것부터가 내게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상황에 항의조차 하지 않잖아. 나를 찬양해주겠어? 찬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하얀 미청년의 말을 무시하며 검은 미소년이 말을 이었다.

“체스든 장기든, 그 외의 어떤 게임이든 상관없지. 아니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도 상관없고. 승부를 낼 수 있는 종류면 뭐든지 좋다. 룰은 단 한 가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 그것 뿐. 질문은?”

“룰은 이의 없어.”

하얀 미청년이 의외로 짤막하게 대꾸하고서 스스로 발광하는 듯한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지만 턱을 들어 올리고 등을 젖힌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아 검은 미소년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우월함과 엉망으로 비틀린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소(微笑)라는 표현은 지금 그가 짓고 있으며 드러내는 감정과 조금도 비슷한 표현이 아니었다.

검은 미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게임이 그러면 재미없지. 플레이 방식을 바꾼다.”

“말해.”

“말할 테니 닥치고 들어, 구더기.”

검은 미소년이 말을 잘랐다. 하얀 미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장기를 좋아한다.”

“나는 체스를 좋아하지. 무슨 말을 할 건지 알았어. 그걸 하자는 거군?”

“장기와 체스를 동시에 한 게임에서 사용한다. 플레이 방식은 테이블의 룰에 따른다. 테이블은 장기와 체스보드를 혼합한 식. 두 개의 말을 각자 나누어 운영하고 규칙은 각기의 말에 붙어있는 대로. 질문은?”

검은 미소년이 와인 컬러의 비로드 깔린 테이블 위에 깍지를 꼈다.

“길었군.”

가린 입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감정을 감출 수 없어 숨기고 싶은데도 흘러나오는 소리는 짐승이 먹이를 앞에 두고 숨을 헐떡이는 것과 비슷했다.

“길었지.”

하얀 미청년이 의자위로 발을 얹어 뾰족하게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턱을 괸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렸는데, 그러고도 가리지 못한 입이 상현달의 그것처럼 입고리를 찢어 눈 밑까지 올라왔다.

흑공자와 백공자.

왕이 되기 위해 선별한 시험에서 살아남은 단 두 사람.

128개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정점. 지배자가 되기 위한 시험이 끝나려 한다.

어스 엠파이어(Earth Empire).

이 위대하고 잔인한 악의 제국을 지배하는 귀족. 즉 왕.

5조에 이르는 주민과, 거주행성이 30만 이상, 자원행성이 100만 개 이상에 멸망시킨 문명이 5만이 넘고, 멸망시킨 문명의 민족을 노예로 했으니 그 수가 1000조라.

그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128개의 지배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

탐닉의 군주(Lord of Immersion)의 이름을 이을 둘은 최후의 라이벌로 테이블에 마주했다.

천이 넘는 후계자 중에서 10년이 넘는 승부 끝에 단 둘만이 최후의 제단에 올랐다.

“버러지. 여기까지 온 것에 경의를 표하지.”

“어휴, 말끝마다 버러지, 버러지, 버러지. 자기성찰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버릇은 개나 던져주는 게 어때? 게다가 그렇게 말하면 네가 이긴 것처럼 들리잖아.”

“그렇군.”

“그렇지?”

두 명은 상의하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그걸 위해 이 방은 본래 두 개의 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하지만 이제는 가장 빨리 떨어지기 위해서 등을 돌렸다.

검은 미소년이, 하얀 미청년이 등을 보인 채 멈춰 섰다.

하얀 미청년이 물었다.

“질문이…….”

검은 미소년은 말을 조금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입 꼬리를 올리고 눈매를 비틀고선 검은 미소년이 말했다.

“네놈의 묘비에 뭐라고 적어줄까?”

하얀 미청년은 대답을 듣고서 히죽 웃었다. 눈매를 비틀고, 미소가 너무 짙어 일그러져 보일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적어줄게.”

웃음을 흘리며, 둘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빛처럼 서 있던 두 명의 여성이 서로를 한 차례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는 사내들의 뒤를 따랐다.

***

이시현은 문득 눈을 뜨고 잠시 얼떨떨했다.

행정실패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문화의 다리, 그곳이 보이는 다리에서 술을 처먹고 한강 바닥으로 떨어진 후 깨어나 보니 무슨 황금장식을 한 것 같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얼떨떨할 수밖에.

문득 눈을 뜨자 생전 본 적 없는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이렇게 화려하지? 이건 뭐, 어디 최고급 호텔의 그런 것 같은 샹들레아에……음?

“크, 크윽!”

“쭈웁, 쭙. 쭙, 쭈웁.”

저도 모르게 신음하면서 몸을 일으키려 한다. 하지만 뭔가 엄청난 힘이 이시현이 일어나는 걸 막는다. 하반신이 아프다. 아니, 맹렬한 자극에 의해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아래는 아프다.

그리고 뭔가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만 그는 사정하고 말았다.

막대한 쾌감이 1, 2초간 그의 머릿속을 꿰뚫고, 그리고 갑작스럽게 편해지는 걸 보면 사정이 확실하다.

그런데 사정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본다. 그곳에는 까만 머리칼을 귀밑까지 기른 소녀가 자신의 하반신에 얼굴을 묻고 자지를 빨고 있었다. 이 초현실적 모습을 보고 넋이 빠진 것도 잠시. 요도에 든 정액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쭉 빨아먹은 소녀가 입을 떼어냈다.

그녀의 빨간 입술에 묻은 몇 가닥의 음모. 더없이 색정적이다는 생각도 잠시였다.

“즐거우셨나요?”

“어, 으, 으응?”

“꽤 농후한 맛이더군요. 음, 달콤했어요. 오랫동안 쌓인 정액은 그 맛이 끝내주죠.”

남자의 쌓인 정액 맛 따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덕분에 동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처음 보는 이 소녀는 자신의 자지를 빨고, 정액을 먹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지옥이 왜 이렇게 이상해.

아니, 지옥이라 이상한가?

이시현은 망연자실 이마를 짚고 신음하자 소녀가 말했다.

“소개드릴게요. 저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안내자랍니다. 리퍼라고 불러주세요.”

“……이름 한 번 끝내주네.”

이시현이 생전 처음 본 미녀.

어딘가의 소녀 모델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우아하고 매력적인 소녀가 옅게 웃었다. 아직도 그녀의 입가에는 꼬부랑거리는 음모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목격하고 혀를 내밀어 입가에 묻은 음모를 입안으로 끌어넣었다.

아니, 그걸 왜 먹어. 아니, 그보다 먹을 수 있는 건가?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입가의 털을 다 삼킨 소녀가 말했다.

“빠르게 진행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뭐든지 확실히 하는 게 좋겠죠. 궁금한 사항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시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말했다.

“내 바지는……?”

소녀의 앞에서 아랫도리가 훌렁인 것이 유달리 부끄러웠다.

소녀는 뻥 하고 입을 벙긋했다가 이내 킥킥 거리면서 웃었다. 그녀가 어딘가로 콩콩 걸어가더니 옷장을 열었다. 옷장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나무문을 열어젖히니까 보이는 수많은 바지 덕분이었다. 바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온 그녀가 양손으로 내밀었다.

“사이즈는 맞을 거예요. 입으시겠어요?”

“팬티도 좀 줬으면 좋겠는데…….”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별나시네요. 하지만 그것이 원하는 바라면 이루어 드리는 게 리퍼의 방침.”

그녀는 입고 있던 바지의 벨트를 풀었다.

10대 후반 소녀의 모습이지만 몸매의 굴곡은 확실해서 당장 바지가 휙 내려가지는 않았다. 소녀는 허리를 살짝 흔들며 벨트의 버클을 풀고는 이내 후크도 풀었다. 바지가 주름을 그리며 툭 하고 떨어지자 하얀색 두 허벅지가 보였다. 멍하니 지켜보길 잠시, 그녀가 양손으로 본인의 팬티를 벗어 내리자 상황을 깨달은 이시현이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네 팬티 말고! 그게 아니야!”

“어머. 그럼 뭘?”

팬티를 내리면서 본 소녀의 음모와 보지 일부에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애써 모른 척 하며 그는 말했다.

“내 팬티……달라고. 팬티 없이 바지만 입을 수는 없잖아.”

“아하, 알겠어요.”

그녀는 또 종종거리며 어딘가로 가서는 팬티를 가지고 왔다.

몇 가지 종류의 팬티가 있었는데 그는 트렁크를 걸쳤다. 코끼리 팬티라는 거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입으면 어떨까 하는 의심도 약간. 그리고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바지까지 꿰어 입었다.

장애가 있는 다리 때문에 꽤 비싼 옷 같아 보이는데도 꼴사나웠다. 저도 모르게 침울해진 그는 시무룩, 고개를 숙였다가 한 순간 ‘자살하려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한 순간에 기억했다.

저도 모르게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나 죽었나?”

“호호호. 아니에요. 여기는 힐튼 호텔의 로열 클래스고,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히, 히, 힐튼……?”

“네. 근처의 곳 중에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골랐어요. 마음에 안 들면 바꿀까요?”

소녀는 여상스럽게 물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만 들어본 호텔에 자신이 와 있다니, 그리고 로열 클래스라니…….

“나, 나는 분명히 떨어졌는데…….”

한강다리에서 떨어졌다. 죽기 위해서.

꼴사나운 자신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만든 세상이 열 받아서.

세상이 자신을 내버려서.

착한 일 한 번 했다가 인생을 말아먹게 된 것이 허탈해서.

수많은 감정을 안고, 그리고 자살했다.

지금은 자살한 후의 세계……여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소녀는 검은색의 직모를 귀밑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걸 보고 숏컷이라고 하던가, 보이시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예쁜 얼굴 때문에 발랄해 보이기도 하는 소녀가 방그레 웃었다. 검은색의 머리칼에 눈썹. 하지만 눈동자는 붉은색이다. 요염하기 짝이 없는 붉은색의 두 눈동자를 깜빡이며 소녀가 우아하게 대답했다.

“제가 구해냈지요. 풍덩, 하고 포말을 그리며 떨어지는 당신을.”

“구했다고……?”

“네. 제안을 하고 싶어서 말이에요.”

“제안?”

“우선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를 원하시나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 녀석은. 아니 그보다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자신의 일이 중요해서 잊고 있었지만, 깨어날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소녀의 정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자지를 빨고 있는 여자라니. 그리고 정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키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 질문이 껄끄럽다면 다른 걸 물어볼까요. 복수가 필요없는 완벽한 삶을, 즉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지 않나요?”

“새로운 인생……?”

이번은 대답이, 반문이라고는 하지만 반응이 나왔기 때문인지 소녀는 즐거워보였다.

“네. 그 장애가 생긴 다리가 낫고, 몸이 치료되고,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여자를 홀리고, 남자들이 질투할 완벽한 몸에, 값비싼 술을 마시고 여자를 끼고 명품 샵에서 갑질도 좀 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포르노 극장 따위에서 마음껏 즐기고, 어깨 듬직한 부하도 데리고 다니고……그렇게 화려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나요?”

그녀가 말하는 일들을 상상하던 이시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할 건데.”

후후, 하고 소녀가 대답했다.

“좋은 표정에 좋은 목소리네요. 네, 농담이 아니니까 당연히 진지해진 거겠죠. 조건이 있지만 이 조건을 들어보고 결정하시죠?”

조건.

그것이 그녀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일 터였다. 그는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조건……이 뭐지?”

“네. 조건. 그건 어떤 게임에 참여하는 걸 수락하는 거죠.”

“게임?”

“네. 게임. 킬 더 킹(Kill the king). 왕을 죽이는 게임이죠.”

“왕을 죽인다는 건 뭐지?”

“왕.”

소녀가 손가락을 지그시 내밀어 그의 가슴을 꾹 하고 눌렀다. 어쩐지 굉장히 아픈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죠.”

“……나를 죽이는 게임이라고?”

“정확히는 왕이 되고 싶은 후보자들을 죽이는 게임이에요. 게임에 참여한 참가자를. 후계자를.”

소녀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소녀는 희고 탄력 있는 수술장갑을 끼고 있었다.

“현재 어떤 게임이 벌어졌어요.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둘. 거기에 당신이 포함되면 셋이 되지요. 게임의 룰은 킬 더 킹. 종류는 보드게임. 게임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많은 것들을 이뤄드릴 수 있을 거예요. 네, 원하는 거라면 대부분 가능하겠죠.”

“10억을 달라고 하는 거라면?”

“어느 은행에서 뽑아올까요?”

“너를 가지고 싶다고 하면?”

“제 속옷이 흠뻑 젖은 것 같네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그거야말로 제 전문이군요. 후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면!”

소녀가 품에 손을 집어넣고는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금박이 되어있는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서류였다.

“말씀드렸죠? 다시 태어나게 해 드리겠다고.”

[게임 참가 신청서].

그렇게 적힌 황금색 서류를 앞으로 내밀며 소녀가 은근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신청서를 작성함과 동시에 인생을 최고의 수준으로 시작하게 해 드립니다. 인생을 탐닉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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