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조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다 (3)
[가능성은 있다.]
한참 뒤, 크루즈가 내뱉은 답이었다.
가능성은 있다는 뜻은.
매튜는 현재 몸체는 인간이지만, 크루즈의 힘이 일부 들어간 상태.
따라서 온전한 크루즈라고 볼 수 없기에 프리즘의 영역에 들어가도 안전할 수 있단 뜻이 된다.
물론, 매튜가 프리즘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크루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역시 크루즈도 모른다.
왜냐.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지. 이런 경우는 우리도 처음이라 확답할 수 없다.]
웬일로 크루즈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답했다.
“크큭, 그래? 그럼 내가 더더욱 너희들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거군.”
하지만 매튜는 이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방금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실을 깔끔하게 기억에서 지웠다.
이 사실은 매튜에게 있어서 희망의 동아줄이나 다름이 없다.
“자, 내가 너희를 위해 할 일은. 시오스의 대정령과 그 주인 놈 근처로 다가가는 것. 이게 전부겠지?”
이왕 이렇게 된 것, 확실히 알아내겠다는 취지로 물었다.
[그렇다.]
“내가 직접 그 둘을 상대해야 하거나, 이런 일은 없지? 순전히 그 둘 근처로만 접근하면 끝인 게 맞겠지?”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며 묻군, 그렇다.]
과연 매튜 자신이 윤도원과 시오스의 대정령 근처로 다가갔다고 한들, 크루즈들이 무엇을 할 생각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크루즈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중이었다.
어차피 그 후의 일은 크루즈들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
매튜 자신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나랑 거래 하나 하지.”
[무슨 거래 말이지?]
“시오스의 대정령과 그 주인 윤도원. 내가 굳이 그놈들에게 가지 않아도, 알아서 나에게 오도록 만들 생각이거든.”
[그건 이미 실패한 계획 아닌가?]
“아니지. 네 계획이 실패한 거지, 내 계획은 아직 실행도 안 했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이트 점령 및 유지는 크루즈의 계획이었지, 매튜가 직접 생각하고 만든 계획은 아니었다.
[너에게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윤도원. 그놈만 움직이면 정령도 같이 온다. 어차피 둘은 서로 딱 붙어 있는 관계잖아?”
[그렇다.]
“너는 윤도원에 대해서 모르지만, 난 제법 잘 알거든.”
직접 징계위원회를 열어 그와 대화도 해 보고.
대면한 적도 꽤 있다.
그리고 윤도원은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로버트 윤이 밀착 관찰한 이력도 있는 인물.
로버트 윤에게 오는 보고들을 분석해 보면 윤도원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결론을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윤도원. 그놈은 요즘 시대에 맞지 않게 동료를 꽤 끔찍이도 생각하는 녀석이야. 즉, 그놈이 직접 오게 만들려면 놈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 몇만 인질로 잡으면 된다. 간단하지?”
[그놈에게 동료라고 하면 정령의 주인들 아닌가? 너 혼자서 그들을 인질로 잡겠다고?]
매튜는 크루즈의 답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 아무것도 몰라.’라는 말을 삼켰다.
“놈한테 동료는 그들만 있는 게 아냐.”
히로시와 로버트 윤.
이들은 나중에 합류한 동료.
윤도원이 햇병아리 때부터 함께한 동료가 있다. 크루즈가 모르는 동료들.
매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도, 로버트 윤이 감찰부장이었던 시절 그의 보고 덕분이다.
한 명의 꼬맹이와 세 여자.
이지은, 정다훈, 정다혜, 신보미.
이들은 서로 애틋한 관계이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최고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홀한 소식은.
이지은을 비롯한 윤도원의 오리지널 동료들은 힘이 무척이나 약해 아주 쉽게 제압할 수 있단 뜻이다.
크루즈의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인질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인데, 크루즈의 힘까지 있으니.
절대 실패할 수가 없는 매튜의 계획이었다.
그런 정황들을 크루즈에게 설명하자.
[크큭, 그거 재밌는 계획이었군.]
크루즈 역시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뭐, 상당히 유치한 방법이긴 한데. 지금은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좋다, 그런데 거래를 하자더니. 그 조건을 빌미로 거래를 하잔 건가?]
“그렇다.”
[네가 원하는 것은?]
“너희는 내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잖나?”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군.]
보나 마나 뻔했다.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일은 물론,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는 조건을 걸 생각으로 보였다.
“얘기가 이제야 통하는 것 같군.”
[만약, 실패하게 되면 그 뒤는 네 목숨. 파리처럼 여겨도 상관없겠지?]
“물론이다. 단, 너희도 약속은 확실히 지켜라.”
[걱정 마라. 네 계획이나 당장 실행해라.]
그렇게 최초로 인간과 크루즈의 거래가 성사되는 날이었다.
단, 이 거래는 겉보기와 달리 그리 성공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왜냐.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
매튜의 입장에서도 크루즈는 자신의 목숨을 쥐고 흔들던 녀석들인데, 이 거래를 넙죽 받기나 할까?
절대 아니다.
반면 크루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찮은 인간과 거래라니. 당치도 않다.
그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그러는 척할 뿐이다.
‘어차피 안 지킬 거 다 안다. 하지만 나도 방법 있지.’
크루즈와 매튜.
둘이 동시에 삼킨 마음의 소리다.
[당장 시작이나 해라.]
“한국으로 가는 길이나 알려 줘라. 그 동료들은 한국에 있으니까.”
***
[직접…… 벨로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
내 계획을 전부 꺼내자, 흑염룡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응. 그래야 이 전쟁이 영원히 끝나잖아? 이젠 도망치지 않고, 직접 맞서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하지만…….]
무엇 때문에 저렇게 망설이는 걸까?
“혹시, 갈 방법이 없어서 그래?”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그렇게 망설이는데?”
[너무 위험하잖아. 프리즘의 영역 밖으로 굳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느냐, 이거지.]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다만, 흑염룡은 너무 안전 지향적이란 게 문제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크루즈에게 아주 호되게 당한 이력이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안전한 방법만 추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게다가 부모님까지 잃었으니, 나라도 흑염룡처럼 안전만 추구했을 거다.
실제로 아이슬란드에 정화석을 설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안전만을 추구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프리즘의 영역은 이제 지구 전체를 덮을 예정이야. 이 뜻이 뭔지 모르겠어?”
[왜 몰라. 크루즈들이 인간계인 지구에 발을 들일 수 없단 거잖아.]
“그렇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인간계가 이제 안전하게 변했다면, 우린 오직 이세계에 있는 크루즈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아……!]
우리가 여태껏 휘둘린 이유가 무엇인가?
캐나다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세계 최강대국이라던 미국은 국토 3분의 2를 잃었다.
우리는 크루즈라는 거대한 적과 맞서기도 전에.
같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계속 휘둘렸다.
하지만 이제 프리즘의 영역이 지구 전체를 덮을 정도라면.
더는 크루즈에게 공격받는 나라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크루즈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난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해요. 프리즘 영역 밖으로 나간다는 건, 크루즈들이 쏟아 내는 메테오 지옥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이번에는 히로시의 정령, 오리가미가 문제를 지적했다.
“내가 그 부분은 생각 안 했을까 봐? 여기 모인 스페셜리스트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히로시, 로버트 윤.
그리고 오문성까지 가리키며 한 답이다.
오문성의 기량은 제대로 확인했다.
그는 크루즈와 같은 유형의 능력을 가졌고, 실제로 크루즈의 메테오를 격추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리고 히로시.
나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경호대 무리를 혼자서 말끔하게 처리할 정도로 강한 힘을 여태껏 숨겼었다.
로버트 윤 역시 압축이란 능력으로 오문성과 함께 크루즈의 메테오를 없애기에 훌륭한 능력이다.
그리고 안전장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펄럭-!
난 드래곤에게 받은 가호, 날개의 가호를 선보였다.
“여차하면 이것도 있어. 적어도 우리가 직접 벨로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해도. 메테오에 맞아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날개의 가호 표면에 비늘의 가호를 덮어, 방어력을 최대치로 만든 광역 보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방어선이 오문성과 로버트 윤.
그들이 힘에 부쳐 슬슬 지칠 때쯤, 2차 방어선인 날개의 가호까지 있으니 적어도 동료들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었다.
[아…… 가호가 있었지, 참.]
오리가미 역시 가호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
이상한 반응도 아니다.
시오스들이 크루즈들과 전쟁을 맞이할 땐, 가호를 제대로 받은 정령이 없기에 힘겨운 전쟁을 이어 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나라는 존재로 인해 시오스들의 상황도 호전적으로 변했다.
“벨로스만 잡으면 끝나. 나 역시 온전히 벨로스에게 집중할 수 있어. 벨로스만 확실하게 없애면.”
시오스와 크루즈의 길고 길었던 전쟁.
그리고 그런 고래들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 나가는 인간.
이 전쟁도 확실하게 끝이 난다.
물론, 승리로.
“내 계획은 이렇다. 어차피 조급한 건 크루즈 쪽. 우리는 프리즘의 영역이 지구 전체를 덮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벨로스를 치러 간다. 그렇게 전쟁을 확실하게 끝내는 거야.”
정말 마지막 전쟁이다.
상황이 이렇게 호전적으로 변하니, 시오스들이 대항했던 것처럼 전쟁을 오래 지속할 필요도 없다.
속전속결.
단칼에 벨로스를 없애, 크루즈라는 존재를 아예 세상에서 지운다.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참이다.
“자, 다들 어때? 나랑 함께 벨로스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거. 무서운가?”
히로시, 로버트 윤, 오문성에게 물은 말이다.
“큭, 그럴 리가.”
로버트 윤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음…… 무기부터 다시 만들어야겠네. 엄청 많이 필요하겠지?”
히로시는 경호대 전부를 없애면서 무기가 닳아서 버렸다고 했다.
그 무기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답한 것 역시.
함께하겠다는 의미다.
“내 인생 자서전에 평생 안줏거리 이야기가 추가되겠군. 흐흐흐.”
이번엔 오문성의 답.
누가 레이드의 귀재 오문성 아니랄까 봐.
마지막 전쟁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반응이다.
크루즈가 사라지면 이제 헌터들은 레이드를 할 일이 없어지니, 인류 마지막 레이드의 선봉에.
자신이 섰었다는 영웅담을 술자리에서 늘어놓을 행복한 상상을 하던 중이었다.
“다들 내 뜻대로 따르겠다, 이렇게 보이는데.”
“말이 많군. 당장 시작하면 되잖아. 어차피 네 말대로 조급한 건 이제 우리가 아니라 크루즈들이니까.”
로버트 윤이 나를 보챘다.
“결정됐군.”
프리즘의 영역이 지구 전체를 덮을 때.
우리는 움직인다.
벨로스가 있는 이세계로.
***
모든 직원이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이는 한국 헌터 협회.
북한이 길을 열어 줌으로써, 세계 각지에서 오는 초월석의 현황을 종합 중이다.
“협회장님 러시아에서 추가로 보내는 초월석의 개수는 약 3만 개. 한국 도착까지는 대략 1주일 정도 걸린다는데요?”
“뭐 그렇게 오래 걸려! 밤을 새서라도! 이틀 내로 도착시키라 그래!”
이제 장길수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지금 상황에서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은, 그저 권력이 강해졌다는 게 아닌.
희망이 서서히 실체화되기에 신이 난 것뿐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런데 그 희망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는 징조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