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조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다 (2)
흑염룡의 반문에 난 히로시를 가리키며 답했다.
“히로시 혼자서 벨로스 경호대를 쓸어 버렸다고 했잖아.”
[그게 뭐? 히로시가 생각 외로 강한 거였는데, 뭐가 이상하단…….]
흑염룡은 조금은 짜증스럽게 답하던 도중, 말끝을 흐렸다.
이상한 것을 파악한 모양이다.
“혼자서. 쓸었다고. 혼자서. 내가 알던 크루즈와 많이 다른 느낌인데?”
분명히, 우리가 아이슬란드를 탈환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흑염룡을 비롯한 오르문, 오리가미.
이 세 정령이 하던 말을 들었다.
크루즈가 무서웠던 것은 그들이 가진 무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열을 끝없이 반복하기에 죽여도 죽여도 그 수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고.
최하위 등급 크루즈인 더스티도 그런 분열 능력을 가지고 있어 성가신 상대인데, 상위 등급 크루즈인 경호대가 그런 성가신 능력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경호대를 히로시 혼자 쓸어 버렸다는 것에 난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프리즘의 영역이 있어서라고 한들, 우리의 프리즘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프리즘의 보호를 기대하기엔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히로시 혼자서 그들을 쓸어 버렸다는 건 어딘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다.
[그러네……? 히로시가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어떻게 경호대를 전부 혼자서 쓸어? 비르, 넌 이걸 의심도 안 한 거야? 오르문 너도?]
[아…… 저희는 일단 상황이 급하다 보니, 미처 생각을…….]
[맞아요. 프리즘만을 신경 쓰느라 그 부분을 미처…….]
두 정령은 사죄하듯 답했다.
그러나 이 정령들은 내 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을 못 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지금 크루즈에게는 어떤 금제가 걸린 게 확실한 거 아니냐는 뜻이지.”
[음…….]
이제 흑염룡을 포함한 세 정령은 각자가 펼치는 추측의 영역에 빠졌다.
크루즈들이 인간계로 넘어오면서, 확실하게 금제가 생긴 것은 맞다.
그러나 정작 그 금제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굳이 알 필요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금제인데, 아는 게 좋지 않아? 크루즈의 약점을 알고 상대할 수 있는 유리한 기회인데?]
이 부분에서 역시 흑염룡과 의견이 갈렸다.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
흑염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흑염룡의 말도 일리는 있다.
적의 약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철저하게 이용할 수만 있다면 범접할 수 없는 유리한 위치를 점령할 수 있다는 점.
하지만 나는 현 상황에서 적에게 약점이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해석하는 중이다.
“우린 정화석도 성공적으로 설치했고, 초월석 수급도 이제 원활하게 이뤄질 예정이잖아? 그 증거로 이미 프리즘의 영역을 봐.”
프리즘의 영역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상태다.
게다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정화석이 있는 이곳, 아이슬란드로 앞으로 몇 배는 더 많은 초월석이 올 예정.
우리는 버티기만 하면 된다.
결국, 그렇게 되면 프리즘의 영역은 전 지구 전체를 덮을 정도가 되고, 크루즈들은 더는 지구에 발을 디딜 틈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난 그런 것들을 설명했다.
[그야 그렇긴 한데…… 그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잖아. 벨로스까지 없애야 완전히 이 전쟁도 끝이 날 수 있다고.]
흑염룡의 반박.
이 역시 일리는 있다.
버티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크루즈와의 전쟁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은, 크루즈라는 존재의 말살밖에는 없다.
나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누가 크루즈 안 없앤대? 크루즈를 그대로 놔두면 인간계도 언젠간 다시 큰 피해를 볼 텐데, 당연히 없애야지.”
크루즈의 등장으로 캐나다는 아예 사라졌고, 미국도 국토 3분의 2가 없어졌다.
그런 크루즈를 없애지 않고 국지전 양상으로 유지하는 것은 나 역시 사절이다.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야……?]
내 생각을 알 수 없어 답답하던 흑염룡이 물었다.
“확실한 건. 지금 벨로스가 멋대로 넘어올 수 없다. 벨로스에게도 어떤 금제가 걸려 있는 상태다. 그 금제를 풀기 위해선, 흑염룡 네 목숨이 필요하다. 이 정도가 결론인데. 어떻게 생각하지?”
[나도 그건 맞는 것 같아.]
“그렇다면 벨로스가 인간계로 넘어올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너도 잘 아는 것 아냐?”
[적어도 정화석은 안전하다…….]
“그렇지.”
벨로스는 정화석이 내뿜는 프리즘에 내성을 가졌다고 했다.
최초로 시오스와 크루즈가 전쟁을 시작하게 됐을 때도.
시오스가 철저히 믿었던 프리즘을 뚫어 버리고 전세를 뒤집은 것 역시.
크루즈의 대장 벨로스.
그런데 그런 벨로스가 인간계로 올 수 없는 상태다.
그렇다는 뜻은.
“프리즘의 영역을 지구 전체를 덮을 정도로 확보하면. 벨로스는 절대 인간계로 올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정화석을 지키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지 않다도 된다는 뜻.”
정화석을 설치하면서, 크루즈를 억제하는 효과를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도 정화석에 발이 묶인 단점이 존재한다.
이유는 역시…….
정화석을 없애기 위해 벨로스가 이곳으로 직접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단점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정화석은 여전히 인간계, 지구를 지키기 위해 놔둔 채로.
내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럼 뭐 해……? 벨로스는 우리의 고향 이세계에 있는데, 결국 끝나지 않는 싸움이 되는 거잖아.]
“내가 인간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끝나지 않는 싸움이겠지. 단, 내가 움직인다면. 끝나는 싸움이 되지 않겠어?”
[어……? 잠깐, 그 말은……?]
흑염룡은 드디어 눈치챘다.
나 역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가 직접. 벨로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 전쟁을 끝낸다.”
***
“크흑……! 끅……!”
매튜는 얼굴에서부터 시작되는 통증에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어느덧 자신의 얼굴이 크루즈처럼 변해 있었다.
크루즈의 힘을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변했단 것은.
자신과 계약한 크루즈가 강제로 이런 얼굴을 만들었단 뜻이었다.
특히 통증은 용암이 흐르는 듯한 핏줄에서 가장 괴롭게 다가왔다.
“끄악……! 끄윽!”
매튜는 무릎을 꿇은 채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제발 이 고문을 그만 멈춰 달라는 간절한 신호였지만.
[내가 갈 게이트를 어째서 지키지 않은 거지?]
이미 그 명령은 매튜에게도 떨어진 상태였다.
벨로스 경호대라 불리는 크루즈를 1차적으로 투입 후, 매튜까지 합류해 프리즘을 저지하고 게이트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러지 못했다.
매튜가 해당 게이트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탓이었다.
[심지어 그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헌터 둘은 정령의 주인이었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그놈들을 인질로 삼아 시오스의 대정령을 우리의 앞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었단 말이다!]
목소리가 호통치자.
“끄아악……!”
매튜의 비명도 한층 더 커졌다.
얼굴에서 시작되는 통증으로 정신 전체가 아득해질 정도였다.
지금 매튜는 게이트를 점령하지 못한 벌을 달게 받는 중이었다.
“다짜고짜…… 아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어딘지도 모를 게이트를 들어가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고 들어가지?”
그러나 매튜에게도 사정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정령의 세 주인.
윤도원, 히로시, 로버트 윤.
이들은 게이트의 포털을 이용한 정령들의 고유 능력인 활류라는 것을 이용해 게이트 내부에서도 대륙 이동이 자유롭다고는 들었다.
그러나 매튜는 이런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아무리 중앙 협회라는 거대한 집단의 총책임자로 지내 왔다고 한들.
그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행동이 굼뜨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
어느 게이트로 들어가야 하는지, 또 들어가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등.
이런 설명들이 아무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만을 강요하는 크루즈의 목소리였기에 행동이 굼뜬 이유였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할 말은 꼭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속에 있던 말을 뱉었다.
[후우…….]
그러자 그때까지 매튜를 괴롭히던 크루즈는 짙은 한숨을 뱉은 뒤.
그제야 매튜는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 게이트까지 먹혔다. 그리고 정화석의 프리즘 영역도 비교할 수도 없이 넓어졌지. 이게 다 네가 벌인 일들이야. 넌 도대체.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 놈이지? 우리를 위해 움직이는 놈이 아니었던가?]
“…….”
매튜의 속에선 “난 나를 위해 움직일 뿐이야…….”라는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다간 크루즈에게 인질로 잡힌 자신의 목숨이 그대로 사라질 것을 잘 알기에 꾹 참았다.
[너 때문에 일이 꼬였다. 네가 망친 일. 네가 제자리로 돌려놔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그런데 나 죽이면 너희들도 난처한 상황은 마찬가지 아닌가?”
[기세등등하군. 왜? 네 주변 인간들은 네가 다 죽여 놔서 우리가 꼭두각시를 찾을 수 없을 거라 확신하는 건가?]
그런 의도도 섞여 있긴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크루즈들에게도 자신이 현재 필요한 상태라는 것.
크루즈를 대신하여 크루즈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현재는 매튜 자신밖에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기에 내뱉은 반항적인 답이었다.
하지만 이런 반항도 일시적일 뿐.
알콜처럼 빠르게 증발해 사라질 운명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지금 목숨의 주도권은 크루즈에게 있기 때문에 크루즈를 거역할 수 없는 게 가장 컸다.
목숨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크루즈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고, 빨리 이 협박에서 해방되는 것이 매튜의 목표였다.
“이봐, 크루즈……. 하나만 확실히 알려 줘라.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뭐지?”
[필요한 거라니?]
“시오스의 대정령과 그 주인 놈. 그들 앞에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되는 건지, 뭔지를 묻는 중이다. 아니면 그것을 넘어 내가 또 할 일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너한테 그것까진 바라지 않아. 시오스의 대정령과 그 주인 놈 근처로 다가가기만 하면 돼. 근데 이젠 어쩔 거지? 프리즘의 영역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늘어났고, 우리가 목표하던 게이트도 뺏겼어. 아무리 위대한 크루즈라고 해도 지금 상태에선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프리즘에 닿는 크루즈는…….]
“알아.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는 거.”
[잘 아는 놈이……!]
“그런데 말야, 나에 대해서 궁금한데. 난 지금 크루즈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너희들 힘을 받았다고 해서 나도 프리즘에 닿으면 사라지나?”
매튜는 이것이 가장 궁금했다.
[…….]
그런데 그 순간 크루즈의 목소리가 끊겼다.
예상도 못 한 질문을 받은 탓에 말문이 막힌 게 분명했다.
“반응 보니까 너도 모르는 것 같은데. 네가 모른다는 건, 크루즈와 계약한 나라고 해도. 몸은 인간이기에 프리즘에 닿아도 안전할 수 있단 증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