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벨로스의 징조 (1)
아수라.
하나의 몸에 3개의 얼굴, 6개의 팔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불교의 수호신.
하나의 하체에 3인의 상체가 있는 듯이 묘사되곤 한다.
아수라의 팔이라는 이름 그대로, 히로시의 몸도 변화했다.
아수라처럼 얼굴이 3개, 팔이 6개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히로시의 팔만 수십 개로 늘어난 상태였다.
다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팔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탓에, 문어처럼 팔만 늘어난 듯이 보였다.
그 상태로 히로시는 팽이처럼 천천히 회전했다.
천천히란 것도, 그저 로버트 윤이 눈으로 체감할 수 있는 한계 때문일 뿐.
실제로는 눈으로 절대 좇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후웅-! 후웅-! 훙-!
히로시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그의 주위로 소용돌이와 같은 바람이 일렁였다.
히로시는 더욱더 가속을 붙인 뒤, 프리즘의 영역을 벗어나 직접 크루즈의 영역으로 뛰어드는 무모함을 보였다.
“히로시!!”
깜짝 놀란 로버트 윤은 히로시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히로시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지금 히로시가 프리즘의 영역을 벗어나는 행동은 자신의 강함에 취해 무모한 무아지경에 빠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술을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이 분위기와 알콜에 취해 과한 술을 마셔 버린 것처럼.
하지만 히로시는 어떠한 답도 하지 않은 채, 크루즈들 사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히로……시?”
그제야 로버트 윤의 목소리가 변했다.
처음엔 걱정 가득했지만, 지금은 경이로 가득 찬 목소리.
벨로스의 경호대라 부르는 상위 등급의 크루즈들을 모조리 분쇄해 버리는 게 아닌가?
후웅-! 후웅-! 후웅-!
히로시의 몸이 회전하면서 발생하는 소용돌이와 같은 바람들.
아니, 정말 소용돌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진 벨로스의 경호대들을 자석처럼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기면서.
퍼석-! 퍼석-! 퍼석-!
자신의 무기에 닿는 즉시 요절을 내고 만다.
심지어 정교하게 절단하는 것도 아니다.
절단을 하게 되면 크루즈의 신체가 조각이 난 채로 남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히로시의 무기에 닿은 크루즈는 전부 조각이 아닌 잔해만이 남는다.
정말 분쇄기에 들어간 것처럼, 벨로스 경호대라는 크루즈들은 검은 잿더미로 변했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난도질을 가하는 중이기에, 덩어리진 조각 자체가 남아 있지 않단 뜻이었다.
히로시가 정말 한 명의 수호신, 아수라가 된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잿더미로 변하는 크루즈의 모습은 천벌을 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보여질 정도다.
“나 참……. 걱정 안 해도 됐던 건가……?”
히로시의 진면모를 본 뒤에.
로버트 윤은 그제야 안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히로시가 이 던전에 존재하는 크루즈들 전부를 밀어 낸 뒤.
[로버트 윤! 저기 봐!]
오르문이 소리쳤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프리즘의 영역이었다.
“프리즘이…….”
히로시가 크루즈들을 밀어 냄과 동시에, 프리즘도 정화에 가속도가 붙어 어느덧 던전 전체가 프리즘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프리즘의 영역을 눈으로 끝까지 따라가 보니, 저 먼 곳에 검은 포털 하나가 있었다.
“검은 포털……?”
로버트 윤은 즉시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뒤에도 존재하는 포털. 색깔은 무색.
저 포털은 아이슬란드에서 타고 온 포털이다.
“포털이 두 개……?”
이런 유형의 던전은 본 적이 없었다.
정령이 만든 게이트로 들어가면 보통 방이 하나짜리인 던전이 나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의 던전엔 하나의 방에 두 개의 입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야 크루즈들이 점령한 곳을 빼앗은 거니까 당연히 포털이 두 개가 존재하지. 우리 것과 크루즈 것.]
오르문이 일렀다.
검은 포털은 크루즈들의 전용 포털.
따라서 상위 크루즈인 벨로스 경호대가 갑자기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저 포털을 타고 왔다는 증거였다.
[우리의 싸움은 늘 이런 식의 영지전이었어. 인간계에서도 똑같이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오래전부터 크루즈와 전쟁 중이었던 시오스.
결국, 전쟁 방식이 이렇게 땅따먹기 형식이었고, 어느 한쪽이 영토를 전부 잃게 되면 지는 것이었다.
어느덧, 프리즘이 크루즈의 전용 포털에 닿자, 검은 포털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포털이…….”
분명히 존재했던 검은 포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니, 사막의 신기루를 보는 듯했다.
[이렇게 정화는 끝이 난 거야. 다행이네. 휴우…….]
그제야 오르문도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반면, 이번엔 상쾌함이 느껴지는 한숨.
히로시가 로버트 윤의 앞에 서 있었다.
“뭐야, 다들 뭐 하고 있어. 왜 치료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러곤 느닷없이 함께 온 일본인 헌터에게 호통을 쳤다.
그의 호통을 듣곤, 한 헌터가 부랴부랴 로버트 윤에게 다가와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가 시작되자 로버트 윤의 몸을 덮은 검은 잿더미가 서서히 거둬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로버트 윤도 활력을 되찾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버티느라 힘들었죠?”
히로시가 물었다.
로버트 윤은 평소 히로시가 조금 소심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듬직함으로 무장한 소년이 된 모습이다.
“사람이 달라 보이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왜 그동안 숨겼어?”
“아…… 뭐,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리고 이상하게 형이랑 있으면 말하기가 불편하더라고요.”
“……왜? 나 불편한 사람 아닌데.”
“그런 뜻은 아니고. 도원이 형은 나랑 코드가 잘 맞아서 좋은데. 형은 너무 진지하잖아. 난 진지한 사람이랑 있으면 숨이 턱 막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있어요, 그런 게. 오리가미는 무슨 뜻인지 알걸요? 그치? 오리가미?”
히로시가 팔꿈치로 오리가미의 팔을 툭툭 치며 묻자 오리가미는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일침을 가하듯 말했다.
[넌 조금 진지해질 필요가 있어. 그리고 왜 기술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싸우는 거야? 적한테 다 알리는 꼴밖에 더 돼?!]
“그야. 멋있잖아! 내가 마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그 기분!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
갑자기 히로시의 기분이 달아올랐다.
‘저런 거였나…….’
히로시가 말한 로버트 윤과 코드가 맞지 않다는 것.
오타쿠 기질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윤도원도 히로시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어 편했지만, 한껏 진지하기만 한 자신과는 그런 농담도 쉽게 할 수 없어 불편하다고 한 모양이다.
로버트 윤은 슬쩍 히로시의 무기를 살폈다.
처음에는 날이 시퍼렇게 서 있고, 고급스러운 풍채를 자랑하던 그 무기가.
지금은 날에 전부 이가 빠져 폐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히로시 너 무기가…….”
“확실히 크루즈는 크루즈인가 봐요. 이거 꽤 단단한 무기인데 일회용이 되어 버리다니.”
일반 크루즈도 아니고 상위 등급인 벨로스 경호대를 처치한 몸이다.
그렇게 강한 적을 너무 가뿐히 제압한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역시 부작용은 있었다.
히로시가 경호대를 전부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
프리즘 덕에 메테오가 떨어지지 않아 가진 기량을 전부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무기가 일회용이 되어 버리니, 아무리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들, 장기간 싸움은 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괜찮아요, 새로 만들면 되니까. 협회에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 알아서 만들어 줘요.”
“그래……?”
히로시는 무기를 그대로 던졌다.
이미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어느덧, 로버트 윤의 치료도 끝이 났다.
“그건 그거고. 이제 빨리 움직여야죠? 초월석 받아서 도원이 형한테 주러 가야지.”
히로시가 주저앉은 로버트 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버트 윤은 그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히로시, 오늘 너한테 배운 게 하나 있다.”
“응? 갑자기 뭘 배워요.”
“네 능력이 신속이라고 했지?”
“네.”
“방금 네가 선보인 기술들도 그 능력을 이용해서 새롭게 만든 거고?”
“그렇죠.”
“그래서 배운 게 있다는 거야. 큰 의미는 없으니까 흘려들어.”
그렇게 히로시와 로버트 윤.
그리고 함께 온 일본인 헌터 수백 명은 게이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간 내 능력 하나만 믿고 까불었던 거군…….’
로버트 윤이 속으로 삼킨 말이다.
로버트 윤의 경우엔 압축이라는 능력을 신의 능력이라고 여겨 왔다.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대상에게 집중만 한다면,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히로시는 그러지 않았다.
신속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빨리 움직이는 능력.
이것만 보자면 정말 보잘것없는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위력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오로지 능력의 주인 히로시의 역량이다.
‘나도 히로시처럼 나만의 초식과 같은 것이 있었으면…….’
혼자서라도 조금 더 많은 크루즈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압축을 이용해 크루즈를 소멸시키는 1차원적인 방식이 아닌.
히로시처럼 하나의 능력을 가지고 여러 형태로 만들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 덕분에 숙제 하나가 생긴 기분이군. 나쁘지 않아.’
숙제는 보통 귀찮음의 표본이지만, 지금의 로버트 윤에겐 전혀 귀찮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열혈한 연구자가 된 것처럼, 연구 욕구가 샘솟았다.
“고맙다, 히로시.”
게이트를 나가면서, 히로시에게 남긴 말이다.
“뭐요? 구해 준 거요? 뭘 그게 고마워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아니, 구해 준 거 말고.”
“그럼…… 뭐가 고마워요?”
“있어, 그런 게.”
***
장길수는 한창 바쁜 와중, 청와대의 호출을 받고 급히 청와대로 오게 되었다.
협회장이란 자리에 있으면 처리할 일들 가운데 외교적인 문제도 섞여 있다 보니 대통령과 직접 연락을 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청와대로 직접 부르는 일은 없었는데.
‘왜 갑자기 나를 호출한 거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리고 호출을 했으면, 그 이유를 설명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이번 호출에는 이유 없이 통보식으로 일단 빨리 청와대로 오라는 말만 남겨 장길수의 신경은 날카롭게 변했다.
한국에 있는 초월석 전부를 긁어모아 아이슬란드에 있는 윤도원에게 보내는 것이 급선무인 지금, 청와대의 호출 때문에 그 일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원이가 먼저긴 해도 명색이 대통령 호출인데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일단은 왔지만…….’
최대한 이 일을 빨리 끝내려는 생각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합니다, 협회장님.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장길수의 표정이나 목소리 온도는 그렇다고 답하는 중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협회장님…… 도대체 뭘 하신 겁니까?”
그런데 사람 기다리게 해 놓고서는 갑자기 또 질책하는 듯한 말투를 보이니, 장길수의 표정이 절로 찡그려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뭘 해요?”
“도대체 뭘 했길래. 북한에서 먼저 저희 측으로 연락이 오죠? 북한에서 길을 연결해 중국, 러시아를 거쳐 오는 초월석을 건네줄 테니 받아 달라는데요? 한국 헌터 협회장이 직접 그 초월석을 인계받아야 한다면서요.”
“……예?”
얘들은 또 왜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