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영지전 (6)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론 한 시간도 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10분 남짓일 것.
하지만 체감 시간이 그토록 길게 느껴진 이유는. 그가 생지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자, 입에선 입김이 나왔다.
이 게이트가 추운 곳도 아닌데 터져 나온 입김.
그것은 정상적인 입김이 아니었다. 보통 입김은 새하얗게 나오기 마련인데, 지금 로버트 윤이 뱉은 입김은 짙은 회색빛.
마치, 몸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면서 입을 통해 그 연기가 나오는 듯했다.
[로버트…… 괜찮아……? 너 몸이…….]
오르문은 울먹이며 물었다.
“내 몸이라…….”
그제야 자신의 몸을 확인한 로버트 윤.
피부가 온통 검게 그을렸다. 마치 크루즈의 몸처럼.
프리즘에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을 몸으로 직접 막으며 프리즘을 보호했다.
그 과정에서 미처 자신의 능력으로 소멸시키지 못한 크루즈의 몸과 정면으로 맞섰고, 잿더미로 변한 크루즈의 몸은 로버트 윤의 몸을 덮쳤다.
그 잔해가 두껍게 쌓이면서 로버트 윤의 몸도 크루즈처럼 변한 듯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짜 크루즈의 몸처럼 검게 그을린 피부 속에 용암이 흐르는 듯한 핏줄이 불거져 나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괜찮아……. 내 몸보다, 프리즘은 어떻지?”
[……보존되고 있긴 해.]
이제 프리즘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보단 확실히 넓어진 상태지만, 프리즘도 대규모 크루즈의 공격을 받은 탓에 그 형태가 일그러졌다.
처음에 펼쳐진 프리즘은 커튼 형식처럼 일직선이었으나, 지금은 원뿔형 형태로 한 부분만 뾰족하게 솟았다.
크루즈들이 직접 몸으로 돌격하며 프리즘을 깨트리려 한 여파로 프리즘의 모양이 변한 듯했다.
“히로시 자식…… 발이 빠르면 뭐 해. 중요할 때는 굼뜬 녀석이었네.”
로버트 윤은 잠시 고개를 떨군 뒤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우…….”
근육 세포 하나하나, 그리고 뼈마디마다 무거운 납덩이라도 단 듯하다.
자꾸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고, 이틀 정도는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눈이 감기려고만 했다.
“이게 죽음의 징조인가. 네덜란드 소년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혼자서 막은 크루즈의 숫자가 과연 몇이었을까?
몇만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몇천은 막았다.
머리는 더 싸우겠다고, 지금 능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몸을 향해 명령을 내리는 중이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파업 시위를 벌이는 듯이 말을 듣질 않았다.
“크루즈들…… 정말 많이 없앴는데…….”
실제로 로버트 윤 앞에 있는 크루즈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다.
처음엔 송곳 하나 찔러 넣을 틈도 없이 빼곡했던 크루즈 대열이.
지금은 듬성듬성 비어 있는 것이 그 증거니까.
하지만 곧장 로버트 윤의 희망은 무참히 깨졌다.
쿵! 쿵! 쿵! 쿵!
땅을 울리는 진동.
무언가 거대한 것이 걷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크루즈의 등장.
기존에 있던 크루즈와 생김새에서 다를 것 없었다.
다만, 덩치가 몇 배는 더 커진 듯한 거인 크루즈다.
[저 크루즈는…….]
“아는 놈이야?”
[벨로스 경호대…….]
“그건 또 뭐야…….”
가뜩이나 정신이 몽롱한 상태인데, 의미를 확실하게 알기 어려운 말을 해 대니, 예민하게 반응했다.
[벨로스에겐 경호대와 친위대가 있어……. 벨로스를 보좌하는 건 친위대. 그리고 그 밑의 단계는 경호대.]
요약하면, 크루즈는 하나의 거대한 군대 집단으로 움직이고, 그 등급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거대한 몸집을 가진 크루즈는 크루드 내에서도 상위 등급에 속하는 녀석들이란 뜻이다.
역시, 상위 등급일까.
거대한 크루즈가 나타나자 놈들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텁!
콰직!
바로 로버트 윤과 대치하던 기존의 크루즈의 머리를 덥석 집어, 자신의 몸체에 쑤셔 넣은 것.
새롭게 등장한 거대한 크루즈의 손아귀는 한 손으로 가뿐하게 기존의 크루즈의 머리통을 집을 정도로 체격 차이가 컸다.
자신의 몸에 작은 크루즈를 쑤셔 넣을수록.
경호대라 불리는 거대한 크루즈의 몸은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더 커졌다.
텁!
콰직!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한 뒤에.
이젠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이 될 정도로 경호대의 몸집은 부풀어 있었다.
[저런 식으로…… 하위 크루즈들을 양분 삼아 자신의 힘을 키우는 놈이야.]
“그러니까 답답한 마음에 벨로스가 상위 등급 크루즈인 경호대를 직접 보냈다, 이 뜻이 되는 건가.”
크루즈의 대장 벨로스가 이곳으로 올 예정이었던 건 이미 아는 사실.
그리고 벨로스도 이 게이트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중이다.
프리즘을 걷어 내는 작전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크루즈 중 정예라고 할 수 있는 경호대를 보내, 완전히 결판을 내려는 생각으로 보였다.
“이건…… 못 막는데…….”
즉, 로버트 윤이 지금까지 막은 크루즈는 잔챙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잔챙이 때문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그보다 훨씬 강한 상위 등급 크루즈, 경호대의 등장은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만 만들었다.
“그래도…….”
벨로스에게 중요한 게이트인 만큼, 우리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이 게이트가 막혀 버리면 도리어 자신들의 행동도 막히게 된다.
무조건 막는다는 생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경호대를 향해 압축 능력을 사용해 봤지만.
퍼석!
경호대의 움직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로버트 윤의 압축 능력은 경호대의 한쪽 팔에 적중.
팔을 시작으로 몸체 전부를 소멸시키려 했으나, 경호대는 로버트 윤의 능력을 맞은 팔을 제 손으로 잘라 버림으로써 몸을 보존했다.
“별 미친놈 다 보겠군…….”
로버트 윤의 압축 능력은 독이 퍼지는 것과 유사한 성격이 있다.
독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기 직전, 팔을 잘라 버려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목숨을 지키는 것과 같은 원리.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만들고, 그 속에 가둬 소멸시켜 버리는 로버트 윤의 능력을 간파하고, 팔이 적중됐을 때, 균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스스로 잘라 버린 거다.
몸의 중심부인 심장이나 머리에 적중하면 저런 방법도 사용할 수 없었겠지만.
정신이 몽롱한 탓에 시야가 정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적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긴…… 내 능력은 본래 시오스들의 것이었으니, 이미 당해 본 적이 있어서 대응할 수 있다 이건가…….”
쿵! 쿵! 쿵! 쿵!
퍼억-!
경호대 하나가 로버트 윤에게 달려들어 뭉툭한 팔로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으직-!
“꺼억……!”
휘두르는 팔에 한 대 맞았을 뿐인데, 갈비뼈 몇 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버트 윤의 몸은 하염없이 뒤로 날아갔다.
프리즘에 생긴 구멍을 애써 자신의 몸으로 막고 있었는데, 구멍을 지키는 자신의 몸이 사라졌으니 이젠 프리즘도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다, 도원아. 최대한 지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를…….”
경호대에게 맞아 여전히 허공에서 몸이 날아가던 도중에, 중얼거렸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설사, 히로시가 온다고 해도 저 크루즈를 막을 방법이 없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자신은 네덜란드 소년과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었다.
“그냥 도망쳐라…… 히로시. 그리고 도원이에게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로버트 윤!!]
사수라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의 희망이 보일 때나 행할 수 있는 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사수는.
그저 자살을 멋드러진 말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로버트 윤이 히로시에게 닿지 않을 유언을 남긴 순간.
텁.
허공에서 날아가던 자신의 몸을.
누군가가 받아 준 것처럼 안전하게 안착했다.
“도망치긴 왜 도망쳐요? 나도 친구들 최대한 긁어모아 왔는데.”
히로시의 목소리였다.
“히로……시?!”
깜짝 놀란 로버트 윤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히로시가 날아가는 자신의 몸을 받아서 살포시 땅에 내려놓고 있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미안해요, 많이 늦었죠.”
“너…….”
히로시의 뒤로는 일본인 헌터 수백 명이 함께였다.
“그나저나 저 무식하게 큰 놈은…… 뭐예요? 처음 보는데.”
[벨로스 경호대. 조심해. 크루즈 내에서 상위 등급이니까.]
그의 정령 오리가미가 정보를 슬쩍 알렸다.
“그래? 나도 내 힘이 어디까지 통할지 궁금했는데, 걸맞은 실험 대상이 나타난 거네?”
히로시는 이제 무기를 단단하게 쥐었다.
히로시의 무기는 두 개의 단도.
각각 외형이 달랐다.
하난 날이 초승달처럼 휘어, 칼날은 밑으로 뻗었다.
그리고 남은 하난 ‘쿠나이’라 불리는 닌자들의 전용 무기였다.
“히로시, 너…….”
“쉬고 있어요, 형. 저 경호대는 제가 처리해 볼게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녀석이야! 만만한 놈이 아니라고!”
“나도.”
“……뭐?”
“나도 형이 생각한 것보다 강해요. 내가 무기를 그동안 들고 다니지 않았던 이유는, 게이트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요. 이제 무기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됐으니, 제대로 보여 주죠.”
그렇게 땅에 눕힌 로버트 윤을 보호하듯.
히로시와 그가 데리고 온 일본인 헌터 수백이 앞을 지켰다.
“가 볼까, 친구들?”
히로시가 묻자, 일본인 헌터 전부가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내가 선봉으로 나선다. 나머지는 나를 지키는 형식으로 하자고.”
지휘를 많이 해 본 솜씨다.
상황을 곧장 파악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히로시는 상체를 조금 숙였다.
마치 육상 선수들이 전력 질주를 하기 위한 사전 동작과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히로시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시작됐다.
“이도류, 제1장.”
‘초식……?’
히로시가 하는 말은 분명하게 무협 초식과 닮았다.
그리고 히로시는 본격적으로 초식을 전개했다.
“시노비노 아루키(忍びの歩き, 닌자의 발걸음).”
그 초식을 외우자마자, 히로시의 몸은 윤도원의 은신 능력을 사용한 것처럼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퍼서석-!
퍼석!
경호대 크루즈는 물론, 기존에 남은 일반 크루즈까지.
갑자기 그들의 몸체가 무너지며 잿더미로 변하는 중이었다.
닌자라 하면 일본의 전유물과 같은 것.
닌자의 발걸음이란 이름 그대로,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상태로 상대를 전부 암살해 버리는 초식으로 보였다.
히로시가 가진 능력, 신속을 활용해 그가 개발한 초식이 틀림없었다.
“제2장, 카쿠시타 나카마(隠した仲間, 숨겼던 동료).”
두 번째 초식을 꺼낸 순간.
사라졌던 히로시의 몸이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히로시가 한 명이 아니다.
한곳에 수십 명의 히로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건…….”
이 역시 히로시가 가진 능력 신속을 이용한 것.
고속 물체를 카메라를 통해 보면, 그 물체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그렇다.
지금 히로시의 모습이 그랬다.
자신의 능력 신속을 사용하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중이었으나.
그 속도가 너무 빨리 마치 히로시가 여러 사람이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다.
여러 명으로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히로시는 쿠나이를 던졌다.
퍼석! 퍼석!
여기저기의 크루즈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잔해로 변했다.
“……히로시.”
히로시가 던진 쿠나이는 하나.
그런데 지금 동시에 수십 마리의 크루즈들이 잔해로 변했다.
이는 던진 쿠나이를 재빠르게 주워 다시 던지는 과정을.
1초에 몇십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히로시의 속도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상태라는 말이었다.
숨겼던 동료.
그 이름처럼 평소엔 몸 하나로 움직였지만,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동료를 얻는 것처럼 분신을 늘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러 명으로 보였던 히로시의 몸체가 이제 한 명으로 돌아왔다.
히로시는 두 팔을 X자로 교체한 상태로, 검날은 확실히 크루즈를 향한 채로 섰다.
히로시의 마지막 초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제3장 아슈라노 우데(阿修羅の腕, 아수라의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