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영지전 (5)
[됐다!]
오르문과 오리가미가 한참이나 포털에 집중한 뒤.
오르문이 소리쳤다.
두 정령이 활류를 무사히 적용시킨 것 같았으나, 외관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제대로 된 거 맞지?”
원래 활류라는 게 이렇다.
제대로 적용이 되어도 외관상으로는 뚜렷한 차이점이 없기에,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정령의 말만 믿어야 했다.
[그럼!]
오르문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래. 여태 해 왔던 거니까 문제는 없겠지.”
로버트 윤이 먼저 답하며, 포털과 가까이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곧장 몸을 포털 속으로 밀어 넣었다.
“후우! 나도 가야지!”
덤덤하게 포털 속으로 들어간 로버트 윤과 달리, 히로시는 조금 긴장한 채다.
만에 하나 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어떡하나, 하는 신중함일지 조바심일지 모를 걱정 때문이었다.
정신을 다잡듯,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린 뒤에, 히로시도 곧장 로버트 윤의 뒤를 따랐다.
***
“…….”
“…….”
[…….]
[왜…….]
활류를 타고, 한국과 가장 가까운 게이트에 도착한 순간.
두 헌터와 두 정령의 몸은 그대로 굳었다.
바로, 자신들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대기하고 있는 크루즈 무리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게이트의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 아니다.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깔려 있고, 하늘엔 오로라 형상의 프리즘이 떠 있었다.
다만, 프리즘의 영역이 상당히 좁았고, 그 빛의 밝기도 방금까지 있던 게이트와 비교하면, 희미한 듯했다.
마치 그 프리즘이 하나의 경계선이라도 되는 듯.
크루즈들은 프리즘의 영역에서 몇 발자국 정도 벗어난 상태로 히로시와 로버트 윤을 응시하던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프리즘의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크루즈들이 프리즘의 영역 안으로 섣불리 들어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분명히…… 내가 느끼기에 정화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됐는데 왜……?]
하지만 오르문은 크게 당황했다.
아이슬란드의 게이트에서 활류 작업을 시작했고, 이상한 것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호기롭게 들어왔는데 크루즈가 앞에서 대기 중이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에선, 저 크루즈들을 이곳에 있는 두 헌터와 정령 둘이 온전히 제압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심지어 이 게이트에 모인 크루즈의 숫자는 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쩐지 일이 순탄하게 풀린다 했지. 크루즈들이 함정이라도 파 놓은 건가?”
로버트 윤은 크루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정화석의 힘이 왜 이토록 약하게 반영되었는지, 그 비밀부터 풀고 싶었다.
주입한 초월석의 수가 너무나 적어서?
그 탓에 아이슬란드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선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건가?
이런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할 때.
[이곳만큼은 사수하라. 프리즘을 걷어 내라!]
크루즈의 진영 쪽에서 들린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오리가미와 히로시는 흠칫하게 되었다.
[이 목소리…….]
특히 오르문은 이제 공포에 질린 표정마저 지었다.
“왜 그러지? 저 목소리, 아는 목소리인가?”
[……벨로스.]
벨로스라 하면, 크루즈들의 대장.
크루즈를 종용하는 우두머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벨로스가…… 여기까지 온 거라고……?”
로버트 윤의 물음에 오르문은 빠르게 눈으로 크루즈 대열을 훑었다.
그러나 벨로스로 보이는 녀석은 없다.
[아니야, 벨로스는 없어. 우리가 부르는 벨로스의 정체는 허공을 부유하는 검이야. 그런데 검이 없잖아.]
“그런데 왜 벨로스의 목소리가 들린 거지?”
[아직 벨로스가 이곳에 오지 않았을 뿐. 벨로스가 곧 올 예정인 게이트인 것 같은데.]
이번엔 오리가미가 답했다.
상황을 종합한 뒤 내린 결론이다.
시오스의 수호신인 드래곤이 있다면.
크루즈에겐 수호신 격의 대장인 벨로스가 있다.
드래곤도 몸은 시오스의 세계에 있으면서, 인간계에 있는 린느에게 목소리만 전하곤 한다.
벨로스라고 그런 식의 의사 전달을 할 수 없으리란 법도 없다.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그럼 하필이면 이 게이트가 벨로스란 놈이 올 예정지였고. 우리가 그 게이트를 뺏으려고 했다, 이건가? 이 게이트 위치. 어디길래 그래?”
활류를 적용한 게이트의 위치는 활류를 직접 사용한 정령이 아니고선 모른다.
로버트 윤은 이 게이트에 벨로스가 오려고 한 이유는 위치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미 매튜 협회장은 크루즈와 계약을 한 상태.
그런 매튜의 다음 공격 대상이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태평양 바다…….]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아니, 일본과 가까운 곳이야. 일본의 지바란 곳과 가까워.]
“지바…….”
일본인 히로시가 반응했다.
지바라고 한다면 일본의 수도, 도쿄의 동남쪽에 있는 도시.
도쿄와 직선거리 고작 50km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곳이다.
플로리다 해협을 넘어 대서양까지 퍼진 크루즈의 전용 게이트는.
어느덧 태평양까지 번져 한국의 옆 나라 일본까지 도달한 상태란 뜻이었다.
두두두두두!
그때, 갑자기 게이트 내부에서 진동이 일렁였다.
크루즈들이 갑자기 일행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퍼석-!
한 크루즈가 프리즘을 향해 몸을 내던졌고, 그 순간 크루즈는 검은 잿덩이로 변했다.
“지금 저것들…… 뭐 하는 거지?”
히로시는 그들의 행동에 주목했다.
[몸으로…… 프리즘을 걷어 내려는 것 같은데?]
퍼석!
퍼석!
그 크루즈를 시작으로, 게이트에 모인 모든 크루즈가 일제히 같은 행동을 보였다.
프리즘에 몸을 들이박으며, 검은 잿더미로 변한 크루즈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때.
쩌저적-!
두 정령과 두 헌터를 지켜 주는 프리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깨지겠는데.”
처음부터 프리즘은 일종의 결계라고 했다.
오로라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빛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온전한 정화석의 프리즘이 아니라서…… 약한 거 같아! 정말 이대로 계속 놔두면 깨질 것 같은데……!]
오르문이 다급하게 말했다.
정화석이 있는 아이슬란드와도 상당히 떨어진 곳이며, 아무리 활류로 이어 붙였다고 한들, 본래 정화석의 위력이 상당히 반감된 상태.
그렇다고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다는 이유로 이 게이트를 포기할 순 없다.
이미 대서양에 국한되어 있던 크루즈의 영역은 태평양까지 넘어온 상태.
코앞에는 일본이 있으며, 그 일본도 캐나다와 똑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일본이 무너지면 이제 자연스럽게 한국이 공격받을 것이며, 한국까지 무너지면.
한국과 대륙으로 이어진 아시아 전체는 물론, 유럽, 아프리카 대륙까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따라서 이 게이트는 전략적 요충지다.
로버트 윤은 최대한 프리즘 가장자리에 섰다.
[뭐 하려고!]
그의 정령인 오르문이 무모한 행동 하지 말라는 투로 소리쳤다.
“뭐 하긴. 크루즈들 최대한 저지해야 할 거 아냐. 크루즈들이 저렇게 무식하게 몸으로 들이박으면, 이 프리즘도 깨지게 되고, 게이트도 정화 못 하는 거 아냐?”
[…….]
“답을 못 하는 거 보니 맞는 것 같군.”
[하지만…… 윤도원 없이 둘이 어떻게 막겠다고?! 드래곤님의 가호도 없는 너희잖아!]
“우리에겐 드래곤의 가호가 없지만, 저 크루즈들도 무기 하나 잃은 상태니까, 할 만해.”
[……뭐?]
로버트 윤은 조용히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너무 평온하지 않아? 크루즈가 이렇게 개미 떼처럼 있는데도.”
크루즈들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바로 메테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게이트엔 힘이 약한 상태의 프리즘이 있었기 때문일까?
크루즈가 이렇게 많은데도 메테오는 단 한 덩이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메테오가 없고, 돌진하는 크루즈만 저지하는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오르문, 크루즈들을 밀어 내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거 맞겠지?”
[그렇기야 한데…….]
“그거면 됐어.”
로버트 윤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그의 능력인 압축을 꺼냈다.
쿠구구구궁-!
프리즘을 향해 다가오는 크루즈 무리를, 그의 능력을 이용해 흔적도 없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로버트 윤의 능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균열이 뒤틀리는 듯한 소리와.
퍼석-!
로버트 윤이 미처 소멸시키지 못한 크루즈 일부가 프리즘에 부딪히며, 잿더미로 변한 소리가 뒤엉켜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히로시는 그런 로버트 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능력인 신속.
그 능력은 지금 상태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뭐 해, 너는?]
오리가미는 히로시의 속도 모른 채, 다그치듯 물었다.
로버트 윤 혼자서 크루즈 무리를 막는 중인데, 왜 넋 놓고 가만히 보고 있냐는 물음이다.
“무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고 보니…….]
오리가미가 히로시와 함께하면서, 그가 무기를 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리가미는 그저 신속을 이용해 던전 정찰과 같은 서포트 형식의 헌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히로시의 능력은 무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위력이 나오는 듯이 말했다.
히로시는 혼자서 크루즈 무리를 막는 로버트 윤에게 소리쳤다.
“형! 혼자 얼마나 있을 수 있어요!”
“그딴 건 왜 물어!”
가뜩이나 집중하기 바빠, 답하기도 힘든 모습이다.
한껏 신경이 예민해진 로버트 윤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조금만……!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여기 어차피 지바현 옆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게 뭐 어쨌단 건데!”
“지바현은 도쿄랑도 가까워요! 제 무기가 도쿄 집에 있으니까 얼른 가지고 올게요! 그럼 혼자서 안 막아도 돼요! 무기가 없는 전 아무 도움 안 되니까요!”
“그런 거라면 말할 시간에 얼른 갔다 와!”
로버트 윤의 답을 들은 뒤.
히로시는 곧장 자신의 능력 신속을 사용하며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형! 돌아올 때, 데리고 올 수 있는 일본 헌터들도 전부 데리고 올게요!”
그 말을 남긴 채로.
이제 오리가미와 히로시는 사라진 채.
오르문과 로버트 윤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싸늘하군.”
로버트 윤이 중얼거린 한마디.
정말 지옥에 떨어진 느낌이 있다고 하면, 지금 이 느낌일 것이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크루즈들.
그리고 그 속에서 프리즘의 영역 하나만 믿고 우두커니 버티는 자신. 문득 그의 머릿속에 아시아의 신화 하나가 떠올랐다.
“오르문 장비라는 사람을 아나?”
[그게 뭔데…….]
“삼국지라는 신화 속에 나오는 장군이지. 엄연히는 신화가 아니라 소설이지만…… 뭐, 상관없지. 지금 나한테는 그 신화에 버금가는 위력이 필요하니까.”
[그런 얘기를 갑자기 왜……. 정신 차려! 농담할 상황 아니잖아!]
“농담은 무슨. 결의의 한마디다. 내가 꼭 장비가 된 것 같거든.”
홀로 다리 위에서 몇천, 몇만의 군사를 막았다고 전해지는 삼국지의 장비.
어쩌다 보니. 그런 장비와 똑같은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쿵!
쿵!
쿠구구궁!
쿵!
크루즈의 무식한 돌격은 또 시작되었다.
그에 맞춰 로버트 윤은 자신의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크루즈 전부를 소멸시켰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쩌적-!
쩌저적-!
이젠 프리즘에 금이 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 왔다.
“그럼 그렇지……. 혼자서 몇천, 몇만의 군사를 막은 한 명의 장군이라니. 허구가 너무 심하잖아…….”
쩌적-!
퍼엉-!
급기야 프리즘 한 부분엔 구멍이 났다.
“이젠 삼국지의 장비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소년이 되어 버린 건가.”
제방에 구멍이 나 물이 새고, 그 물이 마을을 덮치지 못하도록 구멍을 손가락으로 밤새 막다 죽어 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네덜란드의 동화.
이젠 호기롭던 장비는 사라지고 다급한 동화 속 네덜란드의 소년이 되고 말았다.
로버트 윤은 곧장 구멍이 난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 몸으로 구멍을 틀어막았다.
“내 마지막은 동화의 내용과는 달라야 할 텐데. 그렇지, 오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