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베이스캠프 (4)
“그렇지, 위치가 중요하지!”
“……네? 갑자기 무슨.”
드래곤과 대화를 하던 중 난 한 가지를 깨달았고, 해답을 찾은 시원함에 혼잣말처럼 소리친 것이지만, 로버트 윤이 그것까지 통역을 한 모양이다.
하들도르 협회장이 의구심을 품으며 물었다.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친 게 상당히 이상하게 보인 듯싶었다.
“로버트 형, 그거까지 통역할 필요가 있었나……. 형도 뻔히 다 들었으면서.”
“아, 미안. 습관적으로 그만.”
“됐고. 10개, 충분할 거 같다고 말해요.”
로버트 윤이 곧장 내 말을 통역하자 이제 하들도르의 표정도 변했다.
여전히 의구심을 품은 표정이긴 했으나, 그래도 희망이 있는 표정이다.
“턱없이 적은 숫자인데…… 충분할 거 같다고요?”
“네, 지금 상태에서 개수는 중요하지 않아요. 위치가 중요하지.”
우리가 왜 정화석을 아이슬란드에 만들고, 아이슬란드를 베이스캠프 삼으려고 했던가.
크루즈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함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각국에 퍼져 있는 효력을 다한 초월석을 긁어모은 뒤, 정화석에 넣어 프리즘의 범위를 넓힌다.
그렇게 크루즈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게 만들면서 도리어 우리의 영역은 넓힌다.
우리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필수 조건.
크루즈의 전용 게이트까지 정화석 범위 안에 넣어 그 게이트를 정화한 뒤.
우리의 통로로 사용해야만 했다.
즉, 정화석의 첫 번째 설치 목적은 크루즈의 게이트를 정화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처음 공격받은 곳은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의 수도.
미국의 경우엔 가장 처음 공격을 받은 곳은 수도 워싱턴.
두 나라의 가장 큰 공통점은 수도를 처음으로 공격당한 것이지만, 이것 외에도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는 내가 만들어 뒀던 텅 빈 게이트가 크루즈의 손에 넘어가면서, 그곳이 크루즈의 전용 통로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가까운 아이슬란드까지 크루즈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크루즈의 게이트는 미국을 제외하면…….”
전부 바다에 있다.
따라서 레이캬비크가 다음 공격 대상이 된 이유는, 크루즈의 게이트가 깔린 바다와 가깝다는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협회장님, 레이캬비크가 혹시…… 바다와 가까웠던가요.”
“네, 아이슬란드 대륙의 서남쪽에 위치하죠.”
“그 서남쪽 바다는……?”
혹시나싶어 물었을 때.
“직선거리로 쭉 뻗으면 미국의 워싱턴에 닿죠.”
역시나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거면 됩니다. 곧장 레이캬비크로 돌아가죠.”
레이캬비크의 앞바다엔 전부 크루즈의 게이트가 깔린 상태.
따라서 드래곤이 말한 위치가 중요하단 말처럼, 레이캬비크에 정화석을 세우고.
범위를 아주 조금만 늘려도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크루즈의 게이트 중 하나라도 도리어 우리가 탈환하는 결과.
‘드래곤, 레이캬비크의 위치를 알고 슬쩍 일러 준 거야?’
[그럴 리가. 내가 어떻게 그 위치를 알았겠어. 그저 위치가 중요하다고 말했을 뿐이야.]
‘어쨌든, 고맙다. 머리 아플 뻔했는데 덕분에 무사히 해결됐네.’
우린 그렇게 레이캬비크로 향했다.
***
도착한 레이캬비크.
우리는 곧장 정화석을 세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협회장님, 효력을 다한 초월석은 어디에 보관 중인가요?”
“협회 지하실에 보관 중이었는데…… 보다시피 협회 건물이 저 모양이라…….”
하들도르 협회장은 무너져 버린 협회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이 사람처럼 움직일 수도 없고.
메테오에 직격탄을 맞고는 폭삭 내려앉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크루즈들이 만약 초월석을 가져가 버렸으면 어떡하나요? 크루즈들도 효력을 다한 초월석이라 해도, 그들에게 위험한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의 걱정이었지만.
[크루즈는 그 사실을 몰라. 그러니 초월석이 그대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지.]
흑염룡이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답했다.
‘이유는?’
[우리가 한창 크루즈랑 전쟁할 때, 효력을 다한 초월석을 이용해 정화석 프리즘의 범위를 넓힌 걸 보여 준 적이 없으니까. 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겪지도 않은 걸 전부 다 알 순 없거든.]
하긴, 시오스의 본토에서 했던 전쟁인데 효력을 다할 초월석이 어디 있을까.
어차피 시오스의 세계에선 모든 돌멩이가 초월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흑염룡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난 곧장 하들도르에게 답했다.
“그럴 가능성 적으니까 일단 찾아봐 주시겠습니까? 꼭 필요한 거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하들도르 협회장은 생존한 헌터 몇과 함께 잔해로 변한 협회 건물로 다가갔다.
그들끼리 잔해를 치우며, 초월석을 보관하던 협회 지하실의 위치를 찾기에 나섰다.
“자~ 그럼 우린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하자고. 드래곤, 정화석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네가 나를 직접 그곳으로 불러야 한다.]
“이미 해 본 거네? 그것 말고 또 내가 해야 할 게 있나?”
[없다. 어차피 정화석은 내 몸에 있는 것. 내가 그곳으로만 가게 된다면, 알아서 할 수 있다.]
정화석 설치.
생각 외로 간단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드래곤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뿐이라고 하니, 어렵지 않았다.
“당장 시작한다.”
난 곧장 드래곤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전에 해 봤던 것처럼.
드래곤을 위한 길을 열어 준다는 느낌으로.
딱 한 번만 하고 말았던 게 아닌, 몇 번은 해 봤기에 그 느낌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쉬웠다.
“협회장님…… 저기 봐요……. 뭐가 나오는데요……?”
아이슬란드 협회 지하실을 찾는 헌터들에게도 드래곤이 보이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내 쪽을 넋이 나간 채로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덮을 듯한 거대한 형체를 가진 드래곤이 내 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드래곤.”
[오랜만은 무슨. 방금까지 대화를 나눴으면서.]
“이렇게 실제로 만나는 건 오랜만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구나.]
“자, 어때, 간만에 인간계의 땅을 밟는 소감은?”
[그런 시시콜콜한 소감 말하러 온 게 아니지 않는가.]
“딱딱하긴, 그래, 시작하자고.”
내 말이 끝나자 드래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었다.
드래곤이 향한 방향은 바로.
바다와 최대한 가까운 곳.
이제 곧 드래곤은 정화석이 된다.
정화석에서 내뿜어진 프리즘에 최대한 많은 크루즈의 게이트가 닿을 수 있도록, 가장 좋은 위치를 선점하려는 듯했다.
쿵!
쿵!
“으윽…….”
“서 있기도 힘드네요…….”
다만, 원체 거대한 몸이 움직이는 탓에 걸을 때마다 지진이 일렁였고, 그 위에 선 인간은 몸을 휘청거렸다.
[수행자, 아무래도 날아서 움직여야 하겠구나. 아무리 폐허가 됐다고 한들, 내가 또 움직이면서 인간의 터전을 망가트리고 싶진 않아.]
바다는 눈에 보이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드래곤은 정말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정화석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걷기엔 조금 거리가 있고, 가는 길은 전부 잔해로 깔린 상태.
저 잔해들은 역시, 본래 아이슬란드인의 터전인 집들일 것.
아무리 크루즈로 인해 이미 무너졌다고 한들, 자신의 발로 또 망가트리고 싶지 않다는 그 뜻이 기특하게도 보였다.
“그러자.”
펄럭-!
내 답이 떨어진 즉시 드래곤은 날개를 활짝 폈다.
[타라. 함께 가자. 내가 정화석이 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이제 나를 지켜야 하니까.]
드래곤은 스스로 등을 구부렸다.
내가 그 등에 올라탄 뒤.
드래곤은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 도착한 뒤, 곧장 드래곤이 자리를 잡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상태에서 두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수행자. 잘해 줄 거라 믿는다.]
잘해 줄 거라 믿는다는 그 말.
이제 드래곤이 정화석이 되면 크루즈가 어떤 파상공세를 펼칠지 모른다.
그 파상공세를 거뜬하고, 든든하게 막아 달라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걱정 마. 여태껏 네가 날 지켰다면, 이젠 내가 널 지킬 수 있으니까. 가호까지 전부 받았잖아? 날 못 믿겠어도 네가 준 가호를 믿으라고.”
[믿는다. 내가 준 가호가 아닌 너를.]
드래곤은 그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몸을 감싼 날개 사이로 머리까지 넣은 직후.
쩌저저적-!
피부가 굳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동시에 드래곤의 피부는 단단하게 굳어지며, 찬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크리스탈 한 덩이가 박힌 것처럼.
번쩍!
섬광이 한 번 터진 뒤.
지이이잉-!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프리즘.
“끝난 거야?”
[응, 이게 정화석이야. 드래곤 님은 안전하게 정화석이 되셨어.]
이것이 크루즈를 몰아낼 수 있는 시오스의 유일한 카드.
정화석의 정체였다.
“이제…… 시작이구나.”
난 정화석 뒤로 펼쳐진 바다를 확인했다.
푸르른 바다는 어느 화가가 멋지게 그린 풍경화를 나타내는 듯했으나.
그 바닷속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검은 소용돌이.
모두 크루즈들의 전용 게이트였다.
그림 같은 바닷속에 점점이 박혀 있는 크루즈의 전용 게이트를 보고 있자니, 꼭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명화를 어떤 못된 놈이 검은 물감을 뿌려 망쳐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정화석이 내뿜는 프리즘에 크루즈의 전용 게이트가 닿은 순간.
치이이이익.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는 소리와 함께 회색빛 연기가 일렁였다.
그 직후, 검은 소용돌이는 우리가 흔히 봤던, 게이트의 입구 포털로 변했다.
“저렇게…… 정화가 되는 거야?”
[응. 이제 저 게이트는 우리의 것이 되었어.]
실로 간단했다.
굉장한 파괴력을 지녔기에, 그만큼 과정도 요란하고 소란스러울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조용히 이루어져 조금은 놀랐다.
그리고 정화석의 프리즘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고, 일정한 주기로 계속해서 발생했다.
난 정화석을 바라봤다.
분명히 일정한 주기로 프리즘을 발생한다고 했는데, 한 번 프리즘을 내뿜고는 계속 조용한 상태다.
“흑염룡, 이상한데. 일정한 주기라면서…… 더는 프리즘을 내뿜지 않잖아.”
[그거야 아직 정화석의 힘이 부족해서 그렇지. 아마 1시간 주기가 될 거야.]
“그 뜻은…….”
초월석을 넣으면 넣을수록, 영역이 넓어짐과 동시에 프리즘을 내뿜는 주기도 줄어든다.
정화석을 일단 설치하긴 했으나 역시 아직까지 불안한 점은 많다.
“1시간은 너무 길지.”
크루즈도 정화석에 대해 아는 상태.
내가 크루즈라면 정화석이 설치된 걸 아는 지금 어떻게 행동할까?
굳이 스스로에게 묻지 않아도 답은 뻔하다.
주기가 이렇게 긴 약점을 파고들어, 1시간 안에 정화석을 없앤다.
그 방법을 사용하고도 남았다.
“이게 그 정화석의 정체인가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타이밍이 아주 적절하게, 하들도르 협회장이 초월석을 가지고 정화석이 설치된 곳으로 온 것이다.
“당신 말이 맞더군요. 효력을 다한 초월석. 잔해 속에서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크루즈들은 관심도 없었던 모양이더군요.”
그는 두 손에 담은 10개의 초월석을 보여 줬다.
이제 초월석의 영역 넓히기.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