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흑염룡이 산다!-181화 (181/200)

§ 181화. 베이스캠프 (3)

사사삭-!

후우웅-!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포진한 크루즈들 사이를 전광석화처럼 훑었다.

‘이게, 히로시가 보는 진짜 세상…….’

히로시가 가진 능력을 따라 하면서 나는 비로소 그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제대로 알게 됐다.

신속.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빠르게 움직인다는 개념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처음 히로시의 능력을 봤을 때, 히로시에게 주어진 시간만 유독 느리게 흘러, 그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은 즉, 평범한 사람의 1초가 히로시에게는 10초 정도로 늘어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정확하게 맞았다.

실제로 내가 히로시의 능력인 신속을 따라 하며 크루즈 사이를 누비는 중인데도.

크루즈들은 반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사악-!

게다가 검으로 외형을 바꾼 발톱의 가호를 그들에게 휘두를 때도.

역시, 크루즈들은 반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그대로 썰려 나갔다.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서는 일사불란한 폭발이 일어나는 중.

크루즈의 메테오와 오문성의 능력인 보랏빛 혜성이 서로 부딪치며, 하늘에서 터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빨랐던 오문성의 혜성과 크루즈의 메테오.

내 눈에 초고속 카메라 기능이라도 탑재된 것처럼, 그것들 모두가 아주 천천히 떨어지고 터지는 중이다.

심지어 오문성이 크루즈의 메테오를 요격한 순간.

정말 초고속 카메라로 물풍선이 터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처럼, 물이 일정한 모양을 그리며 퍼지는 듯이.

크루즈의 메테오는 슬로모션처럼 터졌다.

[나도 겪으니까 제대로 알겠다. 이거 신속이 아니라 우린 ‘가속’이라고 부르는 능력인데…….]

내 정령인 흑염룡도 지금 내가 보는 세상과 똑같은 세상을 보는 중인 듯했다.

‘가속이라, 무슨 차이지?’

[너도 이미 드래곤 님에게 들어서 알잖아. 정령은 나이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위력이 다르단 거.]

흑염룡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을 수 없던 이유.

당시 대정령으로서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제대로 각성이 되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렇구나, 가속이라는 건 결국…….’

[응, 정령의 각성을 빠르게 앞당기기 위함. 우리 할머니가 잘했거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겠네.’

[노화를 조절할 수 없지. 남용하게 되면 오히려 너무 늙어서 어린 정령보다 약해져 버리니까.]

흑염룡의 할머니, 레베카.

그 정령은 오히려 가속이란 능력을 너무 남용했기에 몸이 노쇠해져 가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히로시한테도 경고해야겠어. 이 능력 너무 자주 쓰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어. 신속은 가속의 전 단계야. 따라서 마음껏 써도 우리 할머니처럼 되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

‘이런 상황에서도 남한테 위로를 다 하다니. 일단 크루즈에게 집중한다, 흑염룡.’

[얼마든지!]

그렇게 나와 흑염룡은 잠시 대화를 멈춘 채로, 크루즈 소탕에 온 힘을 쏟았다.

다행히 아이슬란드를 덮친 크루즈는 본대라고 하더라도, 크루즈 내에서는 그다지 강한 쪽에 속하진 않는 것 같았다.

가호의 힘과 만물의 힘을 이용해 아주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하늘에서 낙하하는 메테오를 향해 염력을 방출하지 않아도 됐다.

오문성이 적중률 90%에 육박할 정도로 전부 요격했기에 난 오직 지상에만 있는 크루즈에만 신경을 썼다.

그렇게 나의 시간이 약 20분쯤 흘렀을 때.

난 신속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후우…….”

“드디어 끝인가……?”

내 시간은 고작 20분이 흘렀을 뿐이다.

히로시의 능력인 신속을 사용한 상태이기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5분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을 보냈다.

아마 2~3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이제 주변을 확인했다.

크루즈 무리들은 잿더미로 변했고, 메테오도 더는 떨어지지 않았다.

즉, 아이슬란드를 덮친 크루즈 무리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어 버린 것이다.

“살았어요! 협회장님! 꿈이 아니라 정말로 살았다고요! 와하하!”

메테오가 아이슬란드 협회장 하들도르를 덮치기 직전.

그의 앞에 있던 헌터가 희망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하들도르를 와락 안았다.

지옥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어……. 그러네…… 이렇게 살았다니…….”

반면에 하들도르는 아직도 실감이 제대로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난 하들도르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리세요. 할 이야기가 조금 있으니까.”

크루즈들도 전부 정리했으니, 이제 우리 계획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할 이야기…… 그랬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죠…….”

하들도르는 여전히 잠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아이슬란드로 온 크루즈들은 진짜 약했던 애들이야. 굳이 따지자면 더스티의 바로 위 단계라고 해야 할까?]

흑염룡이 슬쩍 알려 줬다.

어쩐지 너무 쉽더라니.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과 다를 바가 없는 난이도.

게다가 크루즈의 최말단, 더스티 바로 위의 단계였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건 일단 제쳐 두자고. 아이슬란드에 정화석을 만드는 일. 그게 가장 급하니까.’

아이슬란드 탈환은 성공.

이제 아이슬란드를 유지해야 하는 판도로 바뀐다.

그리고 크루즈와의 전쟁에서는 정화석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준비물이다.

“얘기할 곳이…….”

하들도르가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하지만 이미 크루즈의 메테오에 의해 건물이건 땅이건.

전부 처참하게 훼손된 뒤이기에, 조용히 이야기할 곳이 있을 리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와 하들도르만 따로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꼭 건물 안에서 얘기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일단은 협회장인 하들도르와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

“정화석……이라. 그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나와 하들도르만 사람이 모여 있지 않은 곳으로 온 뒤, 정화석에 대한 설명을 해 줬을 때.

그는 그제야 실감이 나는 표정으로 변했다.

물론, 로버트 윤도 함께다.

통역을 위해서는 그가 꼭 필요했기에 나, 하들도르, 로버트 윤.

이렇게 세 사람은 정화석에 대해 조율하기 시작했다.

“네. 가능하니까 자신 있게 말한 거죠.”

“정말…… 그걸 유지만 하면 크루즈에게 다시 공격받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맞습니까?”

얼마나 기다리던 말이었기에 저렇게 거듭 물어볼까.

하긴, 방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지옥에서 구르다가 해방되었으니, 그 심정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네, 맞아요. 일단. 그러기 위해선 초월석이 필요합니다.”

“……초월석이요? 그건 이미 한국에 있던 게이트 전부를 없앤 바람에 평범한 돌멩이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그 효력을 다한 초월석을 이용하면 정화석이 내뿜는 프리즘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에겐 평범한 돌멩이가 그런 진귀한 힘이…….”

“그래서 말입니다. 인류에 정식 던전이 있던 시절에 아이슬란드가 보유했던 초월석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초월석. 수량이 얼마나 되나요?”

당장 한국에 있는 초월석들을 가지고 올 수 없는 상황.

일단은 아이슬란드에 정화석을 만들고, 그 영역을 넓힌 다음 안전 구역을 최대한 넓게 확보해야 한다.

크루즈의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프리즘이 닿아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아이슬란드에 있는 초월석의 개수가 중요했다.

“……아시다시피,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상당히 적은 나라입니다.”

다 아는 사실을 지금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딱 하나.

애초에 아이슬란드는 가지고 있던 초월석의 개수가 상당히 적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알아요, 꼭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정화석에 합칠 수 있는 초월석의 개수가 최대한 얼마나 되냐는 질문일 뿐이에요.”

“아마…… 10개 정도밖에 없을 겁니다.”

“……네?”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인구가 적은 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10개만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10개면 보통 개인이 가진 수량과 비슷하다.

그런데도 어떻게 국가 단위에서 보유한 초월석의 개수가 고작 10개밖에 안 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슬란드의 특수성 때문이지요.”

“아이슬란드의…… 특수성?”

“정식 던전이 인류에 존재할 때, 아이슬란드 내에 있는 던전의 개수는 200개가 넘었죠.”

“그런데 어떻게 10개밖에 남지 않았단 거죠?”

초월석이 영구적인 게 아닌 것은 잘 안다.

소모품 개념이기에, 등급에 따라 효력의 지속 시간이 각각 달랐고, 그때마다 교체를 해 줘야 했다.

인류가 초월석을 이용한 가장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은 역시 자원 뻥튀기 기술.

아이슬란드 역시 그 기술에만 집중적으로 사용했을 거다.

그런데도 200개가 넘는 던전을 가진 나라에서.

어떻게 10개밖에 남지 않았는지,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그게 말씀드린 아이슬란드의 특수성입니다. 아이슬란드의 인구는 고작 35만도 되지 않아요. 게다가 헌터 비율은 인구대비 0.1% 수준이었죠.”

총 인구 35만.

거기에 0.1% 비율로 헌터가 있다고 한다면…….

“헌터 총원이…….”

빠르게 암산으로 계산한 결과, 충격적인 사실에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고작…… 헌터가 350명……?”

“네.”

헌터 총원이 350명.

한국 기준으로만 하더라도 350명의 헌터면 대형 길드 하나의 총원과 비슷하다.

작은 나라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상 이렇게 숫자로 대입하게 되니 정말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가 실감되었다.

350명이란 숫자도.

최고 랭크인 S급과 최하 랭크 E급을 다 합친 것.

200개가 넘는 던전을 무리 없이 레이드할 수 있는 헌터는 어쩌면 50명도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아무래도 하들도르 협회장이 말한 아이슬란드의 특수성으로 보였다.

“예상한 것 같군요. 자력으로는 도저히 아이슬란드에 존재하는 모든 게이트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들도르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상당히 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히 내가 미안함에 찔렸다.

“그렇기에 가까운 영국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아이슬란드에 있는 모든 던전 소유권을 영국에 넘기는 대신, 영국 헌터가 직접 와서 던전을 정복하고, 아이슬란드에게 초월석을 일부 제공하는 쪽으로요.”

“그럼 영국에서 초월석을 받아서 사용했다는 말이 되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왜 10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지, 이해가 되었다.

자력으로는 자국에 있는 던전 전부를 정복할 능력이 되지 않다 보니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영국이 아이슬란드에서 얻은 초월석을 일정한 비율로 나눠 주는 형태.

적은 인구를 가진 아이슬란드의 특수성의 정체는 말처럼 특별한 게 아닌, 고충이라고 하는 쪽이 맞는 듯하다.

“10개 가지곤……. 턱도 없겠죠……?”

하들도르가 여전히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로서는 영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드래곤, 10개로…… 어느 정도나 될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영역을 넓히기엔 무리로 보이는데.’

[수행자, 중요한 것을 놓쳤구나.]

하지만 드래곤의 목소리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렸다.

[중요한 것은 초월석의 개수가 아니다. 정화석의 위치지.]

‘정화석의 위치…….’

그 말을 속으로 읊으며 해석하려 할 때.

“아……!”

깨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