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정화석 (3)
드래곤은 벨로스를 상대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화석이 되면 그 자리에 고정된다고 했지?]
“응.”
[고정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래곤은 정신의 가호를 통해 크루즈와 최초로 맞섰을 때부터 보여줬다.
그런 기억들을 보여준 것은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설마, 정화석이 되면 여태 드래곤 네가 정령들을 지켜줬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거구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크루즈와 최초 전쟁을 시작했을 때, 내가 정화석이 되지 못했고, 내가 정화석이 된다는 것은 도리어 나를 지켜줄 누군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간단했다.
정화석이 된 드래곤은 프리즘 발생을 위해 계속 정화석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 프리즘으로 크루즈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으니, 크루즈로부터 정령들을 보호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문제는 정화석의 존재를 크루즈도 알고 있었고, 드래곤이 정화석이 된다면 총공세를 펼친다.
게다가 벨로스는 정화석에 내성까지 있는 녀석.
그런 벨로스를 완벽하게 제압해야만 드래곤이 정화석을 유지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정화석이 된 드래곤은 프리즘을 이용해 잔챙이 크루즈를 정리할 수 있지만, 크루즈의 대장인 벨로스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정화석이 된 이상, 드래곤이 직접 움직일 수 없으니 드래곤을 공격하려는 벨로스를 내가 막아줘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최초 전쟁 땐 드래곤 네가 정화석이 될 수 없었지만, 전쟁을 지속하다가 정화석이 된 적이 있고, 벨로스에게 당한 적이 있던 거구나?”
[그렇다.]
예상한 대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방법은 없었을 테니까.
[너에게 네 가지 가호를 전부 준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가호를 이용해, 내가 직접 벨로스를 상대해야 한다. 이거구나?”
드래곤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의 무응답은 그렇단 답을 대신한 것임을 잘 알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드래곤이 가진 네 개의 가호 중, 정신의 가호가 가장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게다가 비늘의 가호는 가장 기본이라고 했고.”
[정신의 가호가 마지막인 만큼, 그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가 있냐는 질문이겠지.]
“맞아.”
드래곤이 가진 네 개의 가호에는 각각 순서가 있다고 했다.
시작은 비늘.
그리고 끝은 정신.
괜히 순서가 있을까? 분명 어떤 차이가 있으니까 순서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네가 생각한 대로 정신의 가호가 최종 가호인 만큼, 가장 강력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넌 이미 그 강력함을 겪은 적이 있지 않던가?]
“……융합을 말하는 거구나.”
[그렇다.]
드래곤이 융합을 진행할 때, 정신의 가호도 없이 진행한 융합이기에 부작용으로 쓰러질 것이라 경고했다.
실제로 융합의 부작용이 나오자마자 난 쓰러졌고, 그대로 3일이나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말은 정신의 가호가 있는 이상, 융합의 부작용은 없다는 건가?”
[그뿐만이 아니지.]
드래곤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심지어는 그뿐만이 아니라니.
대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듯한 답이다.
[당시에 융합은 내가 주도했지만, 이제 정신의 가호가 수행자 너에게 있는 이상, 네가 원할 때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여기까지 들은 것만 해도 상당한 힘인데 또 있단 말인가?
드래곤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융합과 네가 가진 능력인 ‘만물’ 그것을 조합할 수 있지.]
“조합이라니, 어떤 형태를 말하는 거지?”
내가 가진 능력들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었다.
염력의 경우엔 처음엔 단순히 물체를 들어 올리는 힘이라고 여겼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지정하는 물체, 혹은 사람을 멈추게도 가능하다.
이 힘 덕분에 크루즈가 등장하게 되면 쏟아지는 메테오에도 대응이 가능했다.
그리고 만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능력.
‘세상에’라는 것은, 비단 내가 살던 인간계만이 아닌, 시오스와 크루즈가 있는 이세계까지 포함이다.
즉, 인간계에는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인 능력이었다.
그런 만물과 드래곤의 가호는 서로 조합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궁금해졌다.
[간단하다. 특히 발톱의 가호를 예로 들지. 한번 꺼내 보겠느냐?]
드래곤의 물음에, 난 곧장 발톱의 가호를 꺼냈다.
동시에 내 손톱은 인간의 손가락에 달린 두껍고 날카로운 드래곤의 손톱으로 변했다.
상당히 이질적인 조합이기에 외관상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야 그런 형태의 발톱을 가진 게 불편하진 않지만, 너는 다르겠지? 수행자? 인간의 몸이었으니까.]
“그 뜻은…….”
[만물을 이용해 네가 원하는 형태로 외형만 바꿀 수 있다. 위력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말야.]
드래곤의 답을 들은 순간, 눈이 번뜩 뜨여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확실히 이 상태로는 불편한 걸 넘어, 내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은 불쾌함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발톱의 가호와 만물을 조합하게 되면, 발톱의 가호 위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외형만 바꿀 수 있다니.
내가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난 지체하지 않고 곧장 연습에 돌입했다.
“내가 사용하기 편한…… 형태라.”
드래곤의 발톱은 비늘의 가호와 달리, 공격형이다.
적에게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거나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등의 공격형이란 뜻이다.
순간적으로 내가 염력 능력을 단련하기 위해 했던 훈련이 떠올랐다.
의식하지 않아도 원하는 물체는 띄울 수 있도록 했던 훈련.
바로 게임을 하면서 정신은 염력에 쏟았던 그때다.
그때 내 게임 캐릭터.
발톱의 가호란 것은 결국 공격형이니, 무기다.
내가 학창 시절 애지중지 키웠던 그 게임 캐릭터들이 가진 무기.
게임에서야 아주 기본적이지만, 현대 사회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무기.
바로 검이었다.
마침 크루즈의 대장 벨로스의 무기도 검.
살아있는 것처럼 공중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똑같은 검이 내게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번쩍-!
드래곤의 발톱으로 변한 내 손톱에선 빛이 나면서, 이질적인 손톱은 사라지고, 밝은 광채를 내는 검 한 자루로 변했다.
“어어……?”
“뭐야, 저거……?”
변화를 눈앞에서 목격한 히로시와 로버트 윤이 놀라며 반응했다.
“뭐야……? 갑자기 무기 하나가 나오네?”
오문성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난 검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휘둘러 봤다.
휘잉-!
휘잉-!
그러자 검격을 따라 바람의 파동이 내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그려졌고, 파동은 장풍처럼 날아간 뒤.
콰앙-!
의도치 않게 노르웨이 협회 베르겐 지부의 시설을 조금 파괴하고 말았다.
[바람의 파동까지 일어난 걸 보면……. 수행자, 발톱과 날개까지도 조합한 건가?]
“뭐야? 그게 보였어?”
드래곤의 몸이 여기로 온 것이 아닌, 정신만 이어진 상태기 때문에 이전까진 소리만 듣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 드래곤은 분명하게 내가 한 일을 보고 물은 듯했다.
[정신의 가호까지 준 상태니까 이제 잘 보이지.]
“오호라, 그런 비밀도 숨겨져 있던 거야?”
드래곤의 기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모자라, 드래곤도 내 상황을 볼 수 있다라.
당장에는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바뀐 차이점은 아니겠지만, 크루즈와 실제로 상대하다 보면 어떤 이점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이제 난 드래곤이 한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날개의 가호는…… 드래곤 네 기억을 봤을 때 아군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하던데.”
그런 줄만 알았다.
드래곤이 가진 거대한 날개로 쏟아지는 메테오를 보호해주는 용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가 검의 외형으로 바꾼 발톱을 휘둘렀는데, 날개의 효과가 일부분 발휘되었다는 뜻이었다.
[날개는 비늘과 발톱의 가호 사이에 있던 가호다. 기억하는가?]
드래곤이 가진 가호의 순서는 비늘, 날개, 발톱, 정신.
드래곤이 말한 대로 날개는 방어형인 비늘과 공격형인 발톱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잠깐, 그러면…… 어느 쪽이건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
방어형과 공격형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추측했고, 정답이었다.
드래곤이 사용했던 것처럼 날개에 비늘의 가호를 덮어 광역으로 보호하는 용도도 있지만.
도리어 발톱의 정신으로 전환하여 날개를 펄럭이는 것만으로 공격할 수 있는 형태도 존재한단 뜻이었다.
[그리고 정신의 가호까지 받은 지금, 비늘의 가호도 네가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다. 그것까지 해 봐도 좋을 거야.]
기존 비늘의 가호는 내 몸이 드래곤의 비늘처럼 변했다.
피부색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피부가 드래곤의 비늘처럼 변하니, 이 역시 발톱의 가호의 외형을 바꾸지 않았을 때처럼 외관이 썩 좋진 않았다.
“그렇다면…….”
난 곧장 내가 가진 능력인 ‘만류’를 이용해 비늘의 가호 외형을 바꿔 봤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검이 있다면, 갑옷도 있어야지.”
내가 중세 유럽의 기사가 된 것처럼.
몸을 보호하는 것에 대표적인 인간의 문물이라고 하면 갑옷밖에 없지 않던가?
비늘의 가호를 꺼내자마자 곧장 갑옷으로 외형을 바꿨다.
그러자 내 몸을 단단하게 보호하는 두꺼운 갑옷이 형성되었다.
“우와! 이번엔 갑옷!”
히로시가 가장 격하게 반응했다.
비늘의 가호는 완벽한 모습으로, 갑옷이 되었다.
두꺼운 갑옷과, 커다란 검을 든 나.
지금 나를 지켜보는 히로시, 로버트 윤, 그리고 오문성까지.
멀쩡하던 현대인이 시간을 거슬러 중세의 기사로 변모한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주 신기한 것은.
후웅-!
후웅-!
검을 한 번 더 휘둘러 봤다.
시설을 더 파괴할 작정이 아닌,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신기해…….”
검을 휘두른 뒤에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단 거지?]
“검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난 검도와 같이 검과 관련된 무술 같은 거 한 적이 없는데도 말야. 그리고…….”
이젠 갑옷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두꺼운 갑옷인데도 몸이 전혀 무겁지 않아.”
식상한 말이지만, 갑옷이 정말 깃처럼 가볍게 여겨졌다.
아주 얇은 반팔 티셔츠 하나 입은 것처럼.
혹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한 것처럼.
몸이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그야 당연하지. 이제 그 능력들은 전부 너의 것이니까. 너를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능력이니 불편함은 없을 거다.]
전수 한 번으로 내 몸에 꼭 맞게 변형되었단 뜻이다.
“그래?”
적어도 검술 따위를 몰라도.
검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휘두를 수 있고, 소위 말하는 검황 그 자체가 되었다는 뜻.
그렇다면 지체할 것 없다.
“이 정도 능력이면 아이슬란드 탈환 정도는 쉽지 않겠어? 믿을 구석이 이렇게 많은데?”
심지어 아이슬란드엔 가장 위험한 존재인 벨로스도 없다.
이제 대응법도 전부 알았겠다,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다들 어때? 난 준비됐는데.”
히로시, 로버트 윤, 오문성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불안한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든든한 대장이 있다면, 우리도 마다할 이유 없지.”
로버트 윤의 답이었다.
“그럼 당장 가 보자고. 아이슬란드부터 시작한다. 정화석 꽂으러 가자고.”
크루즈와의 전쟁.
이제 우리의 반격이 시작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