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정화석 (1)
“네가 해결할 수 있다니?”
드래곤에게 곧장 물었다.
이것이 크루즈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만 해결될 수 있다면, 한시름 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크루즈 대항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쩍 히로시와 로버트 윤의 반응도 살폈다.
드래곤의 이어질 말을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린 지금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게이트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슬란드에 있는 크루즈들을 몰아내고, 아이슬란드를 재탈환한다고 해도.
전용 게이트가 있는 크루즈는 내가 아이슬란드를 비운 사이 탈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절대 끝나지 않는 싸움이 되니, 무조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 불리한 위치를 드래곤이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다고 하니, 나 역시도 그 방법이 궁금했다.
[애초에 크루즈가 시오스를 왜 점령했는데. 우리가 가진 정화석이란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함이었어.]
“정화석……? 그게 뭐야……?”
시오스들의 유물.
초월석. 게다가 지금 드래곤이 말한 정화석.
둘 다 돌을 뜻하는 말이기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였다.
[우리 시오스가 인간계에 던전을 만든 이유가 크루즈가 넘어오는 것을 억제하기 위함이라고 했지. 어떻게 억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지 않나?]
“그렇지?”
단순히 던전을 만들었단 이유로 크루즈가 넘어 오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어딘가 이상했다.
게다가 크루즈에게도 시오스의 활류와 같은 능력이 있어, 우리가 만든 게이트를 점령할 수도 있는 위험성까지 있었기에 부랴부랴 게이트 전부를 없애기도 했다.
일반 게이트와 드래곤이 말한 정화석이라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정화석을 꽂아 넣게 되면, 일정한 주기로 프리즘이 생성된다.]
“프리즘?”
[결계라고 생각하면 편해. 크루즈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지.]
“그럼…… 인간계에 펼쳐놨던 던전 역시…….”
[인간계 전체에 퍼진 던전이 인간계 전부를 감싸는 결계가 된 것이지.]
이제야 이해가 완벽하게 되었다.
던전을 세계 곳곳으로 퍼트린 이유도.
크루즈가 물고기고, 던전이 촘촘한 그물망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런 물고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전체적으로 퍼트렸고,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인간들은 던전 안에 몬스터가 있으니 인류에겐 재앙스러운 존재라고 여겨 정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시오스가 펼쳐 놓은 촘촘한 그물망에 서서히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며.
그 구멍은 크루즈들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이다.
[애초에 초월석이란 것도 정화석에서 나온 부속물이야. 그 부속물을 다시 세우기만 하면, 크루즈들은 해당 지역에 들어올 수 없다. 벨로스가 없는 한.]
“하지만 벨로스까지 오게 된다면, 결국 그 결계도 무용지물이 되는 게 아닌가?”
드래곤의 말을 해석하면 정화석에 저항할 수 있는 크루즈는 대장 벨로스가 유일하다.
벨로스가 결계를 뚫어 버린다면. 애써 막은 크루즈 군대까지 우르르 몰려올 예정이니, 정화석 역시도 확실한 해결 방안은 아닌 듯했다.
그런 실망감을 살짝 드러냈을 때.
[아니다. 벨로스도 너와 똑같이 몸이 하나지. 그 뜻이 무엇이지?]
“정화석의 결계가 깨진 곳에 벨로스가 나타났다…….”
[그렇다. 즉, 벨로스를 유도할 수 있는 장치기도 해. 그리고 벨로스만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면. 크루즈와의 전쟁은 끝이야. 나와 시오스는 우리가 있던 세계에서 그러지 못했기에 인간계로 피신을 온 것이다.]
정화석을 이용하며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게 되면, 길고 길었던 크루즈와 시오스의 전쟁도 끝이 나며.
승리로 매듭만 확실하게 지을 수만 있다면, 시오스들도 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단 뜻이다.
“그래서. 정화석이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데?”
[일단, 초월석이 필요하다.]
그럼, 그렇지.
시작부터 난항이다.
인간계로 침투한 크루즈 때문에 게이트는 전부 없앤 상황.
이런 상황에서 게이트를 다시 만들기엔 불가능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
내가 반박하려 할 때, 드래곤이 내 말을 자르며 먼저 말했다.
[온전한 초월석이 아니어도 된다. 효력을 잃은 초월석을 가지고 와도 돼.]
“뭐……?”
불행 중 다행이란, 정말 이런 상황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효력을 잃은 초월석.
즉, 게이트와 던전이 전부 사라지면서 평범한 돌멩이로 전락한 초월석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뜻이다.
하지만 이것에도 문제는 분명히 존재했다.
“잠깐.”
이번엔 로버트 윤이 물었다.
“그렇다면 효력을 잃은 초월석을 전부 회수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 초월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나라는 미국이야. 미국은 알다시피…….”
로버트 윤의 걱정도 이해가 되었다.
세계에서 초월석을 가장 많이 보유했던 나라 미국.
그런데 그 미국은 크루즈의 공격이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국토 2/3이 소실되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말이 안 되는 수준의 피해다.
그리고 이것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하면, 미국이란 나라가 머지않아 지도상에서 사라질 정도의 위기다.
게다가 미국을 점령한 크루즈들은 초월석이 얼마나 치명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는지 잘 안다.
그렇기에 그런 초월석을 가만히 놔뒀을 리도 없고.
평범한 돌멩이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전부 부숴서 가루로 만들었을 건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답은 조금은 태평했다.
[전부까진 필요 없다. 이미 수행자는 400개가 넘는 게이트를 없애면서, 효력을 잃은 초월석 400개 이상을 가지게 되었지. 그것만 하더라도 2개 정도의 나라를 보호할 수준은 된다.]
“개수에 따라서 프리즘의 영역이 달라진다, 이건가?”
[그렇다.]
우리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초월석은 400개 이상.
한국 기준만이다.
가까우면서 중앙 의회 회원국의 초월석까지 전부 합친다면 만 개 단위로 넘어갈 수 있다.
그 정도의 수량이면 최소 대륙 몇 개.
정말 운이 좋다면 지구 전체를 보호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장 필요한 건, 효력을 잃은 초월석인가? 한국에 있는 초월석을 여기 노르웨이까지 가지고 오는 것도 일인데.”
크루즈가 점령한 곳을 우리가 나서서 재탈환하고, 정화석만 박으면 최소한 그 지역은 이제 걱정이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
그러기 위해선 초월석을 빨리 노르웨이로 가지고 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드래곤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직접 몸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는 건가?]
“그래야지, 어떡해?”
[당장은 필요 없다. 게다가 크루즈를 코앞에 두고 다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지.]
“잠깐, 당장은 필요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초월석이 정화석에서 나온 부속물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정화석을 만들기 위해 초월석이 필요한 게 아니야. 초월석을 뭉쳐서 만드는 게 아니란 뜻이지.]
“그럼…… 어떻게 만드는데?”
[내가 직접 정화석이 된다. 즉, 정화석을 만드는 단계부터 초월석이 필요한 게 아니야. 내가 정화석이 먼저 되고, 초월석을 더하면서 그 범위를 넓혀가는 형식이다.]
“드래곤 네가 직접 정화석이 된다라…….”
[정화석은 내 심장 안에 들어 있어. 나무를 심듯, 내가 그 자리에 고정된 채로 정화석이 되는 거다.]
“고정된 채?”
정화석이라는 게 만능이 아닌 건 안다.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할 것이란 생각도 진작 들었다.
그런 훌륭한 수단이 있다면, 시오스가 크루즈를 상대로 패색이 짙어질 일도 없었으며.
인간계로 피신을 오지 않았어도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고정된 채’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어떠한 제약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제약이란 게 드래곤이 말한 ‘고정된 채’와 상당히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정화석으로 변하면 발이 묶이는 것과 다름이 없어. 프리즘 생성을 유지해야 하기에, 전처럼 수행자 네가 크루즈에게 위기를 겪었을 때, 도와줄 수 없다는 거지.]
“그럼…… 시오스들의 세계에서 크루즈와 싸울 때 정화석을 사용하지 못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은 그때보단 낫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적어도 수행자, 넌 내 가호를 받지 않았던가? 그 당시에는 내 가호를 받은 정령이 없었기에, 내가 정화석이 될 수 없었지.]
당시 흑염룡은 너무 어렸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역전의 발판으로 벨로스의 몸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희생됐다.
그렇기에 결국 남은 대정령은 흑염룡의 할머니, 레베카라는 정령.
하지만 또 레베카는 나이가 너무 들어 드래곤의 가호를 온전히 받을 수 없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였다.
[내가 정화석이 되면 내가 너희를 도와줄 수 없는 게 문제지만, 도리어 수행자 네 역할도 중요해진다.]
“어떻게 중요해지지?”
[정화석이 된 나를 지켜야 하니까. 분명히 크루즈들은 정화석이 된 나를 저지하기 위해 각종 방해 공작이 펼쳐질 거야. 내 가호를 이용해, 내가 정화석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한다.]
“결국, 그럼 우리도 발이 묶이는 상황이 일어나겠군.”
정화석이라는 게 만능의 해결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 상황에서는 가장 확실한 해경 방법은 맞다.
내가 발이 묶인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이 단점은 다른 장점으로 상쇄시킬 수 있다.
바로 크루즈들을 정화석이 있는 곳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것.
정화석이 내뿜는 프리즘이 점차 넓어지면, 크루즈들은 인간계에 더는 발을 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니, 정화석을 없애는 것이 1순위인 건 당연한 일.
즉, 드래곤이 노르웨이에서 정화석이 된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크루즈들을 노르웨이로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가 나온다.
따라서 내가 노르웨이에 발이 묶인다고 한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이윽고 벨로스까지 나올 수가 있지.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수행자, 넌 지금의 상태로는 절대 벨로스와 대항할 수 없다.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하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네.”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내 전투 경험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부족함이 근본적인 부족함은 아닐 것.
더스티와 마주친 적이 있기에, 크루즈가 어떤 존재인지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니, 상대법은 대충 안다.
아무리 더스티가 말단 병기였다고 한들, 그것을 제외하고도 크루즈가 나타나면 메테오가 떨어진다는 것까지 아는 상태이기에 크루즈 상대법은 머리로는 아는 상태다.
그렇다면 드래곤이 말한 근본적인 부족함.
그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전에 나한테 말했던 그거지? 드래곤의 가호는 총 4개가 있다고. 그런데 난 지금 가장 기초 가호인 비늘의 가호밖에 받지 않은 상태니까.”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이 답을 하면서, 내 몸에선 갑자기 빛이 일렁였다.
[수행자 너에게 남은 3개의 가호를 전부 전수할 생각이다. 네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방법은 현재로선 이것밖에 없다.]
빛의 징조는 드래곤이 남은 가호 전부를 주려는 전조였다.
[전수 중, 이상증세가 느껴진다면 곧장 말해라. 그리고 비늘의 가호를 유지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남은 3개의 가호를 한 번에 주는 일이기에, 인간의 몸으로는 상당한 부담일 테니까.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필요할 거다.]
드래곤이 알려준 대로, 난 곧장 비늘의 가호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