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그을린 대지와 하늘 (1)
페르 협회장이 나를 귀빈 대접하듯, 문을 열며 말했다.
여기에서 떠들 시간 없다.
내가 먼저 차에 올라타자 그 뒤로 페르 협회장이 동승했다.
나와 페르 협회장은 뒷좌석.
그리고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운전기사와 통역사는 앞좌석에 앉았다.
일부러 이런 식으로 타기 위해서 4인 탑승 스포츠카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창문 밖을 살피니, 히로시, 로버트 윤, 오문성도 각각 타고 갈 스포츠카에 탑승하려 했다.
노르웨이 협회에서 준비한 차량은 4대.
그렇다 보니 나처럼 뒷좌석에 둘씩 앉는 게 아닌, 남은 3대에 각각 한 명씩 들어가는 구조가 되었다.
“다른 차량에도 상황 설명을 전달하기 위한 통역사가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혹시 몰라 여유롭게 1대 더 준비했던 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대화가 되지 않는 오문성에게도 상황을 설명해 줄 통역사가 있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적어도 상황을 아예 모르는 것보다 간략하게나마 누군가가 알려주는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필요했던 시점이었으니까.
그렇게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의 목표인 베르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조금 서두르다 보니 승차감이 불편할 겁니다.”
페르 협회장이 권고의 말을 한 직후.
“으윽……!”
몸이 갑자기 뒤로 훅 쏠렸다.
엔진이 광야의 들소 떼처럼 난폭하게 뛰며, 최고 속력을 내면서 달려갔기 때문이다.
반면, 페르 협회장은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이런 속력은 익숙하단 듯이, 아주 평온해 보였다.
“무슨 레이싱 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 빠른 속도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인가 보군요.”
체감상 시속 300km가 넘게 달리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빠른 느낌이다.
“베르겐까지는 1시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뭐라고요?”
400km나 떨어져 있다면서, 도착 예상 시간은 1시간?
그렇다면 지금 달리는 속력이 400km쯤은 된다는 뜻이었다.
“경주용 레이싱 카도 아니면서…… 그런 속력이 나옵니까……?”
“당연히 안 나오죠. 제 능력을 조금 더했을 뿐입니다.”
페르 협회장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줬다.
기체? 아니면 아지랑이?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와, 창밖으로 향했다.
창문을 통해 확인하니, 페르 협회장의 손바닥에서 나온 그 알 수 없는 기류가 우리가 달리는 도로에 퍼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능력. 보신 적 있습니까?”
“……처음 보는데요.”
“가속 관문이라는 능력입니다. 일정 구역에 저만의 영역을 설치하여, 빠른 속도를 갖게 하죠.”
즉, 지금 도로에는 페르 협회장의 능력이 깔린 상태.
그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의 속력을 본래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만들었단 뜻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 안 그래 보이면서.”
“젊었을 때부터 그런 소리 자주 들었습니다. 능력은 치타 같으면서 왜 행동은 굼벵이냐고요.”
나와 처음으로 직접 만나, 인사를 했을 때 보였던 느긋함.
페르 협회장도 자신의 이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본래 이런 말이 있잖아요,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원래 사람이란 게 한 몸에 상반되는 기운을 가지기 마련이니, 전 개의치 않습니다.”
그 말이 이런 식으로 통용될 줄은 몰랐으나…….
뭐, 해석해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본래 소심한 사람이 인터넷이란 환경에 들어오면 극악무도한 폭군이 되거나, 혹은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실제와 다른 사람들이 더러 있기 마련이니까.
페르 협회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로 보였다.
“그리고 이거.”
이제 페르 협회장은 본격적으로 상황을 전달했다.
내 자리로 태블릿 PC를 놨다.
어떤 동영상 하나를 저장한 채로.
“봐보세요.”
동영상을 재생하자, 미국이 최초로 크루즈의 공격을 받았던 것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서 메테오가 떨어진 영상이었다.
영상은 고작 10초가 조금 넘는 정도.
상당히 짧았다.
“이걸 보여준 이유는요?”
내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굳이 이렇게까지 다시 보여준 의도가 궁금했다.
페르 협회장은 대답 대신, 이번엔 A4 사이즈의 종이봉투를 내게 건넸다.
“확인해보세요.”
봉투에는 A4 사이즈의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위성사진으로 보였다.
지구의 형태를 보여주는 그런 위성사진 말이다.
사진을 다음 장으로 넘길수록, 마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확대하는 것처럼.
특정 구역이 점점 더 커진 순간.
사진의 정체가 뭔지 알게 되었다.
“이건…….”
“네, 위성으로 찍은 미국의 실태입니다. 고작 하루 사이에 보시는 바와 같이…….”
미국 대륙에 피멍이 든 것처럼, 여기저기 검붉게 변한 상태다.
저 검붉게 변한 구역은 전부 크루즈에 의한 것이었다.
단순히 검붉은 것만 있는 것인가?
아니다.
분명히 대륙이 존재했던 자리에. 스멀스멀 바닷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위성사진으로만 보고 판단하자면, 온전한 대륙을 가진 미국이.
필리핀과 같은 섬으로 구성된 나라가 된 듯이 보였다.
“하루 사이에 미국의 국토 2/3가량이 소실되었더군요.”
“…….”
세계 헌터력 1위.
게다가 중앙 협회까지 장악한 나라가.
크루즈에게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루 사이에 국토 2/3를 소실할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받았다.
크루즈들이 강한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까지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슬쩍 흑염룡을 쳐다보자.
[크루즈들이면 가능해. 그런데 미국 본토를 왜 바다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 난 그걸 가장 경계해야 할 것 같은데.]
흑염룡은 그다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예상 범주에 있다는 듯이, 아주 평온하고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미국 본토가 서서히 바닷물에 잠식되는 현상을 보고 크루즈들이 무언가를 노리는 것 같은 추측을 내세웠다.
‘지금 당장 알아낼 순 없으니까…….’
불안한 징조긴 하다.
인간계로 잠식한 크루즈들은 미국의 플로리다 해협을 시작으로.
연결된 대서양까지 우리가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본거지를 완벽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본토 전체에 바닷물이 드리운다면, 크루즈 전용 게이트가 더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건 내 추측인데. 크루즈들. 아무래도 벨로스를 인간계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저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 그게 아니고선…… 굳이 저렇게 할 필요가 없어. 우리와 전쟁을 할 땐, 저러지 않았거든.]
시오스와 싸울 땐 보이지 않았던 행동을 갑자기 보이니, 나도 흑염룡의 추측이 어느 정도 맞을 것이란 예상이 들었다.
“뭘 그렇게 보시죠?”
한편, 잠시 흑염룡과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허공을 바라보는 내게 페르 협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아, 잠시 정령과 대화를 했습니다. 크루즈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현상을 만들었는지, 추측하기 위해서요.”
적어도 한 가지는 편했다.
페르 협회장도 정령을 아는 사람이니, 예전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치미 떼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렇군요, 혹시 정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중앙 의회에서 아무리 추측을 해도 무슨 생각으로 이런 현상을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정령은 혹시 알고 있던가요?”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긴 하네요.”
“어떤……?”
“크루즈의 대장, 벨로스란 놈이 있습니다. 물론 저도 본 적은 없고요. 정령에게 들어서 알 뿐이죠.”
“벨로……스.”
“그놈은 아직 인간계로 넘어오지 않은 상태라고 해요. 아, 넘어오지 않은 건지, 아니면 그러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지만요.”
“그렇다면…….”
“그 벨로스를 인간계로 불러오기 위한 게 아닐까 추측하던 참이었습니다. 정령의 말에 의하면. 벨로스가 인간계로 넘어오게 되면 완전히 끝일 거라고 하더군요.”
“……이거, 상당히 심각한 현상이었군요.”
인공위성 사진을 다시 살폈다.
미국 국토 중 유독 검게 그을린 자국이 짙은 곳이 있었다.
난 그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부분만 유독…… 그을린 자국이 심하군요. 메테오를 가장 많이 맞은 지역 같은데.”
“워싱턴이 있는 곳입니다. 크루즈에게 최초로 공격을 받은 곳. 그게 워싱턴이었으니까요.”
“…….”
말을 아끼게 됐다.
워싱턴이 최초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유가.
중앙 협회 재판장이 있던 별관 지하실에.
내가 만든 게이트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했으니까.
“쯧, 그게 이렇게 될 줄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고 싶을 지경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앙 협회의 매튜 협회장은 안전하게 피신한 것 같더라고요. 현재 캐나다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듣던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중앙 협회에 있었고, 그 중앙 협회의 게이트에서 크루즈가 갑자기 나왔을 건데.
어떻게 캐나다까지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명운(命運)이 억세게 좋은 사람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에서 곧장 중앙 의회에 연락을 취했더라고요.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요.”
이것 역시 내가 비행기로 노르웨이로 오는 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페르 협회장에게 이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 의회의 답은. 뭐라고 했습니까?”
과연 상임국인 장길수와 헤이로 협회장은 뭐라고 답했을지.
그들의 답변에 기대가 되었다.
“보류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조금은 납득할 수 없는 답변이다.
“보류……요?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도와주는 것을 보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투표도 결과도 그렇게 나왔고요. 특히 일본의 헤이로 협회장. 그가 반대했죠.”
“어째서……?”
헤이로 협회장이 그저 묵은 감정 때문에 막무가내로 결정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
어떤 의혹을 헤이로 협회장은 분명히 본 것이고 그것 때문에 미국의 사태가 암울한데도 보류라는 강수를 둔 게 분명했다.
“매튜 협회장이 살아남은 과정에 석연찮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석연찮다니요?”
“중앙 협회가 있는 자리에서 최초로 크루즈가 등장했고, 하필이면 크루즈 등장 직전. 매튜 협회장은 51구역의 연구진과 함께 게이트 앞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페르 협회장의 설명에.
나와 흑염룡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아? 고작 헌터가? 게다가 너나 오문성처럼 능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것도 아닌데.]
역시, 내가 가진 의문을 흑염룡도 그대로 가졌다.
“헤이로 협회장은 그 사실이 수상해서 일단 보류하기로 한 겁니다. 혹시…….”
“혹시 뭐요?”
“매튜 협회장이 자신만 살겠다고 연구진이나 중앙 협회에 있던 헌터들을 강제로 희생시키고 살아온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니까요.”
확실히.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크루즈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도 아니고.
고기 방패 몇 명 세운다고 크루즈가 등장한 곳에서 살아남기란…….
아마 나라도 힘들 수준이었을 텐데, 어떻게 매튜 협회장이 가능했을지는 역시 의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을 당장 돕지 못하는 이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윤도원 씨를 비롯한 정령의 주인들이 이미 노르웨이에 온 이유가 가장 큽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구조에 나설 수 있는 헌터가 없던 게 이유였다.
“일단, 아이슬란드 먼저 집중하자는 게 그들의 의견입니다. 이상하게 크루즈들은 미국의 일정 부분을 점령한 뒤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거든요. 마치 배터리가 전부 소모된 전자제품처럼요.”
이것 역시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될 때.
[보통 그럴 땐…… 크루즈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었을 때만 휴식을 취하는 행위인데.]
크루즈를 잘 아는 흑염룡이 중얼거렸다.
원하는 무언가라…….
크루즈들은 도대체 미국에서 무엇을 얻었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