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평화로운 날도 잠시 (3)
흑염룡의 반응 때문에 나도 모르게 리모컨에서 손을 뗐다.
흑염룡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화면 속 뉴스만 응시했다.
미국 플로리다 해협에서 발견된 괴이한 현상.
푸르른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소용돌이.
‘검은……?’
난 소용돌이의 색깔에 집중했다.
보통 바다에 생긴 소용돌이라 하면, 바다의 색을 따라가기 마련.
하지만 지금 뉴스가 보여주는 소용돌이는 바다의 색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소용돌이처럼.
[한편, 플로리다 해협에서 시작된 이 괴이한 현상은 점차 그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대서양까지 상당히 번진 상태입니다.]
뉴스 화면은 이제 바뀌었다.
2개월 전 플로리다 해협에서 최초로 관측된 괴이한 현상은.
정말 암세포가 점차 몸속에 번지는 것처럼, 플로리다 해협과 이어진 바다에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대서양 상당 부분에도 검은 소용돌이가 펼쳐진 상태다.
물론, 최초 근원지인 플로리다 해협에 비하면 그 크기도 작고, 검은색도 연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이상 현상은 맞다.
[이 정체불명의 현상은 아직 대서양에 국한되어 있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해역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전문가들의 걱정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앵커는 열심히 속보를 전했다.
[린느 님. 저거…….]
그리고 이제 다른 정령.
오르문까지 반응했다.
흑염룡과 오르문이 반응할 정도면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는 듯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난 슬쩍 권다정을 쳐다봤다.
권다정 역시 함께 뉴스를 시청했고, 무언가를 눈치챈 표정이다.
“거래하기로 한 미국 헌터한테 보낸 흙. 혹시 저 경로랑 겹쳐요?”
“……응, 무조건 겹쳐. 특히 플로리다 해협. 저거 버뮤다 삼각지대로 유명한 곳이잖아? 안 겹칠 수가 없지.”
버뮤다 삼각지대.
한때 미스터리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그저 부풀려진 소문이라고 치부되는 곳.
버뮤다 삼각지대엔 유독 사건 사고, 그리고 괴이한 현상이 많았다고 전해지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괴이한 현상은 부풀려진 소문이 많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으니.
바로 버뮤다 삼각지대에는 사건, 사고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실, 버뮤다 삼각지대가 사건이 많은 게 절대 이상한 건 아니다.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플로리다 해협을 포함한 버뮤다 삼각지대의 하늘, 바다는 세계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기로 유명해서였다.
지나다니는 비행기, 선박이 많으니 그만큼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높아지는 단순한 이유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낸 화물 중 저 해협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권다정의 거래 상대는 대금을 지불했음에도 흙을 받지 못한 사실이 이제야 드러났다.
푸르른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소용돌이가 생겨난 것처럼.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에 검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한 참이다.
한편, 흑염룡과 오르문은 심각한 대화를 이어갔다.
[린느 님,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지난 2개월 동안 저희는 게이트도 상당히 많이 늘렸잖아요? 지금은 무려 400개라고요.]
[나도 알지.]
[400개면 정식 던전으로 쳤을 때, 80개나 있는 거라고요. 물론, 예전에 비하면 한없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억제는 될 텐데…….]
[어쩌면 우리의 가설이 완벽히 틀렸을 수도 있고.]
이 현상에 대해서 심도 깊게 고민하는 오르문과 달리 흑염룡을 비교적 깔끔한 결론을 냈다.
그리고 이제 나를 향해 말했다.
[윤도원. 너도 이미 눈치챘지?]
“응. 너희 반응 보니까 확신해도 될 정도야.”
[네가 예상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지?]
“정도?”
일단, 세계에서 이제 많은 사람이 크루즈라는 존재를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뉴스가 전하는 괴이한 현상은 크루즈가 인간계로 완전히 넘어왔다는 증거가 되는 일들이었다.
흑염룡과 오르문이 부정하지 않고 고민하는 것을 보니 이는 확실한 게 맞다.
하지만 갑자기 정도를 묻는다면.
크루즈가 넘어온 것은 사실이나, 과연 얼마나 넘어 온 것으로 보이냐는 질문이었다.
즉, 현재 인간계로 넘어온 것이 과연 크루즈의 소수라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크루즈 전체인지.
그것을 예상해 보라는 말이었다.
“저 정도면…….”
뉴스가 보여준 화면.
미국 대륙과 인접한 해역인 대서양.
그곳은 적어도 크루즈가 전부 점령한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설마, 크루즈의 본대 전체가 넘어온 거야?!”
[아직은 정확히 모르지만, 꽤 많이 넘어 온 것 같아. 확실하게 확인하긴 해야겠지만……. ‘그놈’만 안 넘어왔다면 아직 희망이 있긴 한데……. 하아, 우리 가설이 완벽하게 틀렸을 거란 생각은 정말 하지 못했는데…….]
흑염룡이 예전에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시오스들이 만든 던전이란 것은, 크루즈가 인간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억제기였다고.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인간들은.
그저 던전은 재앙적인 존재로만 여겨 신인류라 불리는 헌터들을 앞세워 전부 정복해 버렸다.
지금 흑염룡이 말하는 가설은.
그런 던전이 크루즈를 억제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정식 던전이 사라지면서, 임시방편으로 나와 흑염룡이 만든 간이 게이트.
그것들이 다수 모인다면 정식 던전과 같은 효과를 낼 것이며.
크루즈들을 억제할 수 있을 거라는 그 말.
그것이 완벽하게 틀렸다는 게 증명된 순간이다.
“흑염룡, 너 그럼 그때 한 말이…… 정확하지도 않은데 했던 말이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나 역시도 크루즈에 대한 지식은 없다.
크루즈의 말단 병사라 불리는 더스티를 딱 한 번 상대해 본 게 전부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흑염룡의 말 전부를 믿어야 했고.
그 사실을 중앙 의회 회원국에게도 널리 알렸다.
졸지에 중앙 의회의 상임국인 한국은.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 꼴이다.
“미치겠군…….”
엄연히 우리가 의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남들이 봤을 땐 거짓말과 다름이 없을 거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왜 몰랐을까.]
그런데 흑염룡은 지금 뉴스 속보 말고도, 다른 일화로 이미 의심스러웠던 적이 있는 모양이다.
“그때라니? 언제를 말하는 거야?”
[강만식이랑 정식으로 한 판 하러 갔을 때. 정확히는 네 몸에 구멍 뚫린 날.]
“그때면…….”
이지은이 가진 상가에서 강만식의 관리부와 격돌했던 날이었다.
“아……!”
무엇을 말하는 중인지 알았다.
당시 이지은의 상가 건물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게이트는 5개.
초월석에 눈이 멀었던 강만식은 어린 정다훈을 억지로 게이트 속으로 밀어 넣었고.
내가 정다훈을 데리고 오기 위해 게이트를 들어갔던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게이트가.
과거에 크루즈에 의해 점령된 던전이라서 더스티가 나온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차츰차츰, 그때부터 크루즈들은 아주 천천히 인간계로 넘어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까 네가 말한 그놈은 누굴 말하는 거야?”
흑염룡은 그놈만 넘어오지 않은 상태라면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고 해도.
어느 정도 주워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크루즈들의 대장, 벨로스.]
“벨로……스?”
어쨌든, 크루즈의 대장이라고 한다면.
크루즈를 통솔하는 자.
시오스에겐 대정령 흑염룡이 있다면.
그와 똑같은 직위의 크루즈가 있단 뜻이었다.
“그 벨로스란 녀석까지 넘어오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인간계는 끝이야. 사람들 죽는 걸로 안 끝나!]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정도라니.
도대체 벨로스란 녀석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지, 현재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윤도원. 우리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당장 게이트 전부 없애야 해! 이지은의 건물에서 마주쳤던 더스티처럼. 크루즈들이 이미 펼쳐 놓은 게이트를 이용해서 이곳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고!]
2개월 동안 애써 만든 400개가 넘는 게이트.
세상을 구원할 게이트가.
이젠 정말 세상을 멸망시킬 흉물로 전락해 버린 순간이다.
크루즈의 침범이 확인되었으니, 이제 더는 게이트를 늘려선 안 된다.
“설마, 그 말은…… 크루즈들도 정령의 고유 능력인 활류와 비슷한 걸 사용할 수 있다, 이 말인가?”
[더스티를 이미 마주쳐서 알잖아. 더스티가 어떤 용도의 크루즈 병기였는데!]
대상을 먹어 치우고, 대상이 가진 능력을 크루즈에게 맞게 변환시켜주는 병기라고 했었다.
하지만 시오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크루즈와 전쟁 중.
점점 패색이 짙어져 결국, 추후를 도모하기 위해 인간계로 도망쳐 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더스티에게 희생된 시오스 정령이 있었고, 그 정령이 가진 활류 능력이 크루즈들에게도 넘어간 상태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거…… 평화가 깨진 순간이 아니라…….”
정말 재앙이 코앞까지 다가온 뒤에야 뒤늦게 깨달은 순간이다.
[당장 게이트 전부 없애야 해! 지금 인간계로 넘어 온 크루즈들은 소수가 아니야! 심지어 우리가 보유한 게이트 숫자도 많아. 400개의 게이트 전부가 크루즈 전용 통로로 변해 버리면…….]
“대서양과 플로리다 해협에 퍼진 그 크루즈들이 전부 한국에서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이거구나……?”
[뉴스에서 본 검은 소용돌이는 크루즈들의 전용 게이트야. 너도 이미 봤잖아. 그 정도면 대규모 병력이라고.]
“돌아 버리겠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크루즈와의 전쟁.
솔직히 흑염룡과 15년 만에 재회했을 때.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각오했다고 전쟁이 달갑게 느껴질까?
가능하면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게이트를 펼쳐 놓은 것이며, 최대한 많은 수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변해 버렸다.
우리가 안전장치로 만들었던 게이트가 이젠 우리의 목을 잘라 버릴 섬뜩한 칼날로 변한 상태다.
난 서둘러 장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호호, 우리의 구원자 윤도원 헌터. 무슨 일인가?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는 장길수는 목소리에 농담기를 가득 담으며 전화를 받았다.
“협회장님, 지금 당장 한국 헌터 전원. 저희 양산부로 보내 주세요.”
-……엥?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한국 헌터 전원이라니? 한국이 보유한 헌터 전부를 말하는 거야?
“네! 전부요!”
-아니, 도대체 왜……?
“일단 설명은 나중에 하고……. 헌터들 전부 긁어모아 주세요! 아시겠죠?!”
-일단은 알겠다만…….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죄송합니다,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일단 끊습니다!”
상황이 급하다 보니 나도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렸다.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나라도 당장 게이트 정복에 나서려고 했던 때에.
[두 사람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다만.]
그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행자여. 그대는 미국에 게이트를 만들지 않았던가……? 그 게이트 설마, 여전히 미국에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
“참, 신기하네요? 그렇죠? 이런 변화는 세간에 보고된 게 없는데요.”
중앙 협회 별관 지하실.
복도를 막는 것처럼 우두커니 박힌 게이트.
약 2개월 전, 한국 헌터 윤도원이 만들어 놓고 간 게이트였다.
그 게이트 앞에 51구역의 연구진과 매튜 협회장이 게이트에서 이상 변화가 포착해, 다 함께 게이트를 살피던 중이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게이트의 포털.
대서양과 플로리다 해협에서 관찰된 괴이한 검은 소용돌이처럼.
포털도 똑같은 소용돌이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뜻하는 변화일까?”
매튜 협회장이 물었지만, 연구진들이 알 턱이 없어 고개를 저을 때.
[크크크크큭, 맛있는 냄새가 나네~?]
포털 속에서 분명히 사람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