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안정화 (4)
그 뒤로 우리 셋은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장길수가 부리고 싶다는 고집을 다른 협회에서 들었을 때, 협회들은 각각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 예상하던 중이었다.
“음, 사실. 고집이라고 보기도 힘들죠.”
그러던 중, 내가 말했다.
“고집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라…… 왜?”
“아니, 생각해 보면 간단하잖아요? 게이트를 만드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데. 그럼 제가 해외 투어라도 다니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세상에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총 3명.
흑염룡은 본래 인간계로 넘어온 정령이 8명이라고 했지만, 흑염룡, 오리가미, 오르문.
이 셋을 제외하곤 현재 어디에 있는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남은 5명의 정령이 주인을 정했다면,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어디선가 게이트 관련 소식이 들려와야 정상인데, 조용한 것을 보면 주인을 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심지어 초월석을 제공하겠다는 중앙 의회의 등장으로.
많은 협회가 합류 의사를 보이는 중이었다.
세계의 거의 모든 협회가 한국 협회를 통해 중앙 의회에 합류하고 싶다는 것은 역시 딱 하나의 뜻밖에 없다.
그들이 보유한 헌터 중 정령의 주인이 없으니, 초월석을 얻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닐까?
나머지 5명의 정령이 어디로 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상태로만 놓고 보면 나, 히로시, 그리고 로버트 윤.
이 세 명이 게이트 관련 능력자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들이 전부 한국에 밀집되어 있으니, 한국에서 만드는 게 당연한 상황이다.
“그렇죠. 미스터 윤. 당신은 나를 포함해 게이트 능력자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게이트는 오직 한국에서 만들겠다고 말했을 때, 타국의 협회는 소위 말하는 갑질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가장 크죠.”
장길수나 로버트 윤이나 무엇을 걱정해서 저러는 건지, 나도 알 수 있었다.
본래 신생 기관의 경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
초월석을 얻기 위해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그들의 입장에선.
게이트를 만드는 장소를 한국.
그것도 내 부서인 양산부에서만 진행하겠단 의견을 보였을 때, 폐단이라며 부당하단 뜻을 보일 협회가 많단 뜻이다.
중앙 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생긴 중앙 의회인데.
내부에서 그런 불협화음이 생겨나면 중앙 협회를 견제하기도 전에 와해될 가능성도 있었다.
“흠, 그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문제 아닌가?”
하지만 난 생각이 달랐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라? 무슨 뜻이죠?”
“생각해 보면, 합류 의사를 밝히는 협회들이 진정 우리가 중앙 협회를 견제할 생각이고, 그걸 전적으로 도울 생각으로 합류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
로버트 윤과 장길수가 차례대로 답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합류 의사를 밝히는 협회들의 목적은 단 하나.
초월석밖에 없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물가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고, 실제로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중이다.
다른 나라는 부러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며, 일반인은 아마 이민까지 심각하게 고려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 뜻대로 밀어붙이죠. 이건 양보할 수 없는 거 맞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세계 원정을 다니면서 게이트 하나씩 만들어주고 오라고? 그건 아니지.”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더군다나 아무리 지구촌이라 불리는, 대륙 간 이동이 편리한 시대라고 해도.
지구 한 바퀴 도는 게 동네 마실 나가는 정도로 쉬운 일도 아니다.
시간적 여유도 없으며,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없는 게 결정적이다.
“그게 싫은 협회는 중앙 의회에 가입하지 말라고 해요. 어차피 손해는 그쪽만 보는데, 우리가 그거까지 눈치 보면서 이래야 하나.”
정말 청렴하고, 아무런 흑심 없이 중앙 의회에 가입한 협회들은 차례대로 초월석을 받을 예정이다.
그런 협회가 있는 국가 역시, 한국처럼 안정화가 시작된다.
그렇게 차례대로 안정화가 시작되었을 때.
한국에서만 게이트를 만들고 초월석을 공급하겠단 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해 중앙 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의 경우 어떻게 될까?
“옆 나라는 중앙 의회에 가입해서 안정화에 들어갔는데 우린 왜 안 하냐!”라는 시위가 벌어질 거 뻔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월석이 기능을 잃었을 때.
물가 안정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어디 한국에서만 벌어졌나?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시위 대행진이었다.
어차피 분리한 건 욕심 많은 협회지 우리가 아니다.
난 그런 근거를 들며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우리의 기초가 부실하면 중앙 협회를 견제할 수 없으니 그렇지.”
장길수가 타이르듯 한 대답이다.
“소탐대실이란 말이 있잖아요? 사소한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간. 우리 일 못 합니다.”
엄연히, 냉정하게 따지면 중앙 협회 가입은 우리에게 있어선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중앙 의회를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게이트는 최대한 많이 늘리면서, 인류에게 딱 필요한 정도의 초월석만 사용하고.
일정량의 게이트를 유지하며 크루즈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국제기관 없이 우리의 자발적인 힘으로 행하기엔 불안한 면이 많아, 중앙 협회를 대신할 공권력을 가진 국제기관을 만들려고 했던 것뿐이다.
기존에 존재했던 중앙 협회의 경우.
이미 그들도 초월석을 탐낸다는 탐욕의 마음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따라서 우리가 안전하게 게이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로버트 윤. 내가 하나 묻죠.”
“네.”
“중앙 의회의 안정성 때문에 그런 것 알겠는데. 반대로 말하면, 중앙 협회에는 기존에 몇 개의 협회가 구성되어 있었죠?”
“……11개국의 협회였죠.”
세계 헌터력 TOP 11 협회들로 구성되어 있는 중앙 협회였으니까.
“11개국밖에 없었는데 세계 200개가 넘는 국가를 관리하고, 국제기관으로 자리 잡았어요. 중앙 의회에 가입된 국가의 수가 많아야만. 중앙 의회의 힘이 세지나요?”
“…….”
그 뒤로 로버트 윤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고, 이 반응은 장길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둘이 한참 생각에 잠긴 뒤.
로버트 윤과 장길수는 서로 눈을 마주친 다음이었다.
“하하하! 듣고 보니 그러네. 우린 왜 중요한 것을 놓쳤지?”
장길수의 답이다.
“그렇죠…… 때론 백지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곤 하죠.”
로버트 윤의 답이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랐다.
“뭔 소리지. 백지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돼?”
“스케치가 된 그림을 수정하는 것과. 완전히 새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엄연히 난이도가 다르니까요. 스케치가 된 그림은 이미 정해져 있어 수정 범위가 좁지만, 아무것도 없는 백지는 무엇이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이 지금 왜…….”
“저나 장길수 협회장님이나. 고정 관념이 박혀 버렸군요. 하긴, 우린 헌터들 사이에서도 정치 헌터라고 부를 수 있으니 무리도 아니죠.”
정치 헌터라 하면.
어느 기관에 속해 헌터법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장길수 역시 이젠 협회장.
그전에는 협회장 후보였으며, 더 이전엔 길드를 운영했던 사람이기에 정치 헌터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로버트 윤 역시 중앙 협회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으니, 몸에 그런 딱딱함이 밴 사람이다.
“미스터 윤. 당신의 말이 맞죠. 한 기관의 힘을 결정하는 건 단순히 머릿수로 따지는 게 아니죠.”
“그럼! 구성원이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 있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해답을 얻은 듯, 장길수가 이어서 말했다.
“중앙 협회가 와해한 이유가 뭐야? 러시아랑 독일이 빠져나왔잖아.”
“서로 마음이 안 맞아서.”
“그렇지! 그게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난 그래서 내가 생각한 고집을 부리면, 중앙 의회에 가입된 협회 사이에서 마음이 맞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미스터 윤의 말대로. 시작도 전에 그것을 확실히 정하고, 싫다는 협회는 안 받으면 그만이죠. 그게 우리에게 도움되는 일이니까요.”
장길수와 로버트 윤.
두 사람은 어느덧 내 생각에 적극적으로 따르려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로버트 윤이 말한 백지는.
나를 뜻하는 것이었다.
난 정치 헌터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렇게 단순한 1차원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반면에 장길수나 로버트 윤은 정치 헌터 생활이 길었기에, 늘 어렵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스케치가 되어 있는 그림처럼.
틀이 정해져 있었고,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내 덕에 확실한 방향을 얻었다는 반응이다.
“좋아, 결정됐군. 그럼 바로 시작할까? 헤이로 협회장도 불러야겠어.”
장길수가 자신의 허벅지를 짝, 치며 일어났다.
“바로 시작한다뇨?”
“어차피 자네가 협회로 온 이유도 중앙 협회 창설식 때문이잖아?”
그걸 이제 본격적으로 하겠단 뜻이었다.
“가자고.”
“잠깐만요, 협회장님. 창설식은 어떻게 하는데요? 21개국이 합류를 결정했지만, 전부 한자리에 모을 순 없잖아요?”
“허허, 젊은 친구가 왜 디지털 사회에서 아날로그로 돌아가려 해? 화상 회의로 소집하면 그만인데.”
“아.”
내가 살면서 화상통화는 한 적이 있어도.
화상 회의를 한 적이 있어야지.
나와 로버트 윤은 장길수를 따랐다.
***
장길수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국 협회 지하, 그것도 비밀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 구석의 한 회의실이었다.
넓은 회의실에는 모니터가 한쪽 벽면에 가득했다.
그 수만 족히 세어봐도 30대는 넘는, 누가 보면 모니터 매장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우리 셋이 먼저 들어왔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히로시와 헤이로 협회장이었다.
“우리가 늦진 않았죠?”
헤이로 협회장의 여유 가득한 질문.
이에 로버트 윤이 끄덕이며 답했다.
“네,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아이구야, 일본 협회장님. 오셨군요.”
장길수 역시,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를 청했다.
장길수와 헤이로 협회장은 정령이 없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지만.
얼굴에 서린 반가움 마음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난 두 협회장이 인사를 나눌 때, 슬쩍 히로시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히로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근처에 있었어?”
“네. 한국 협회장님이 앞으로 협회 자주 올 것 같다고, 협회랑 아주 가까운 곳에 숙소 잡아줬어요.”
협회 근처에 호텔이 있긴 한데…….
아무래도 그곳을 숙소로 사용하는 중인 듯하다.
“그리고 오늘 중앙 의회 결성되는 날이라면서요? 그러니까 꼭 와야죠.”
히로시는 뭔가 흥분된 모습이었다.
소풍 처음 가는 초등생처럼.
“로버트. 혹시 세팅 가능한가?”
그러던 중, 장길수가 로버트 윤에게 물었다.
화상 회의에 필요한 세팅을 부탁하는 물음이다.
그런 건 보통 협회 직원이 하는 거 아닌가, 싶었을 때.
“직원들 몰래 하고 싶어서 말야. 아직 직원들은 나를 협회장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최현민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장길수는 슬쩍 그런 고충을 남겼다.
하긴, 최현민이 협회장으로 군림한 기간이 꽤 길다 보니.
협회부터 장악하는 것이 쉬웠겠지.
“……피곤한 생활 중이군요. 협회장님도. 제게 맡기시죠. 중앙 협회에서 자주 한 거니까.”
그렇게 로버트 윤의 세팅은 시작됐고, 금세 끝이 났다.
벽면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하나둘씩, 외국인의 모습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