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청문회 (3)
“해 보시죠.”
확실한 것은.
로버트 윤은 숨김없이 전부를 설명할 의향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취할 태도는 그저 경청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들어주는 게 먼저다.
듣고 나서 뭐를 어떻게 할지를 정하면 된다.
로버트 윤은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시작에 앞서, 그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편지 봉투로 보이는 것 하나를 꺼냈다.
“뭡니까? 이건.”
새하얀 봉투. 분명히 돈 봉투는 아니다.
현재 상황에서 느닷없이 돈 봉투가 나올 일은 없었으니까.
“열어 보시죠.”
로버트 윤의 제안을 듣고 봉투를 열자, 안에는 고이 접힌 종이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꺼내서 읽으셔도 돼요.”
그의 말대로 꺼내 봤다.
온통 자필 영문으로 적힌 무언가다.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버트 윤의 자필인 건 확실하다.
“봐도 모르겠는데요? 영어를 몰라서.”
“신기하군요. 정령이 있으면 영어를 몰라도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문자 형식의 외국어는 예외인가 보군요.”
“말로 하는 언어만 해당이니까.”
별로 숨길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솔직히 답했다.
문자와 말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제 사직서입니다.”
그제야 로버트 윤은 봉투의 정체를 밝혔다.
“사직서……?”
“중앙 협회 직원을 관두겠다는 사직서죠. 최현민의 청문회. 그리고 일본 협회장의 계획이 어느 정도 완성됐을 때, 전 관두고 그쪽으로 합류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 협회장 대행직을 맡고 있는 지금, 당신의 이름으로 합류를 결정했다, 이 말입니까?”
“네. 그래야 일본 협회장도 믿고 받아주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러시아 협회와 독일 협회가 그에게 제안했지만, 적어도 인맥으로만 들어가고 싶진 않다는 강한 의사다.
설계자인 일본 협회장에게 눈에 보이는 신뢰를 준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겠다.
이런 생각으로 한 결정이었다.
“뭐, 의도는 알겠습니다만. 현재 당신은 한국 협회 대행이잖아요? 정식 협회장이 아니라.”
“당연히. 내정된 다음 협회장, 장길수와도 얘기는 끝났습니다. 따라서 한국 협회의 합류는 제 대행 기간이 끝나도 유효할 겁니다. 물론, 저 역시 중앙 협회에는 철저히 비밀로 부칠 것이고요.”
내가 쓰러진 3일 동안 두 사람은 별도로 합의를 본 듯하다.
“나 참.”
하지만 3일 전의 일 때문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그러시죠?”
“이렇게 할 거였으면 왜 그렇게까지 한 겁니까?”
“뭘요?”
“뭐긴. 내 부원들이랑 장길수 팀장님까지 밧줄로 묶어두고 게이트는 왜 정복하고 그랬냐고요.”
물론, 나에게 막아달라고 하고 진행한 일이긴 하지만.
사람이 앞뒤 행동이 너무 다르니, 그 간극에서 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야 당연히 중앙 협회에서 제게 지시를 그렇게 내렸고,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랬죠. 제가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저도 수상하게 볼 테니까요.”
“그렇다는 것은. 일단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모습을 보여줘서 의심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게 기본 아닙니까?”
로버트 윤은 아주 당연하단 듯이 답했다.
“그 당시에도 일본 협회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단 것을. 몰랐을 텐데?”
로버트 윤이 직접 나서서 내 부서의 게이트를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난 일본 협회장에게 초월석은 주겠으니, 합류하겠다는 협회 모아 보라고 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로버트 윤에게까지 전달될 여유가 없다.
로버트 윤은 일본 협회의 계획도 모르고 일단 나에게 막으러 오라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무슨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 협회가 무언가를 시작할 거야!’라며 일을 시작하진 않았을 테니까.
“아, 어차피 저만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걸 완성시키기 위해 한 일이죠. 단, 이 계획에는 미스터 윤. 당신이 꼭 필요했고, 당신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저를 막으러 오란 소릴 한 거니까요.”
“일본 협회장의 계획을 몰라도. 처음부터 중앙 협회를 배신할 생각이 있었다, 이겁니까?”
“배신이라기보단…… 사직이라고 하죠. 배신은 별로 좋아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어쨌든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 보아하니, 미스터 윤. 당신은 일본 협회장의 진짜 목적이 뭔지 모르는 듯하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3일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제 막 깨어나셨으니.”
“로버트 윤 당신은 알고 있고요?”
“그럼요.”
“일본 협회장한테 직접 들었을 리는 없고.”
“역시, 러시아와 독일 협회에게 들었죠.”
나는 슬쩍 히로시를 쳐다봤다.
히로시 너는 일본 협회장의 진짜 생각을 알고 있냐는 눈빛을 담아서.
히로시는 짤막하게만 답했다.
“저도 알고 있긴 한데, 지금 설명할 자리가 아니라서…….”
“그렇구나.”
“이참에 로버트 윤이 어떻게 들었는지, 직접 들어보면 안 돼요? 제가 알고 있는 거랑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적어도 히로시는 로버트 윤의 생각 전부를 들은 덕일까.
이제 적대심은 어느 정도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처음엔 의심과 경계를 가득 담은 채로 로버트 윤을 상대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동료라는 생각이 드는 듯했다.
난 곧장 로버트 윤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이랍니까? 말 나온 김에 들어봅시다.”
“일본 협회장은 지금 중앙 의회라는 것을 만들려고 합니다.”
“중앙…… 의회?”
“네. 기존의 중앙 협회와 비슷한 새로운 기관이죠. 중앙 협회에 불만이나 실증이 쌓인 협회들 위주로 뭉친 것입니다. 즉, 새로운 세계 기관 하나가 등장할 거란 뜻이지요.”
하지만 난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그런 목적이라면. 기존과 크게 다를 게 있는 건가?
중앙 협회에 대항하는 세계 기관을 만드는 일.
나와 히로시는 어차피 새롭게 생길 중앙 의회 쪽으로 붙으면, 중앙 협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아서 무너진다.
왜냐, 지금은 초월석이 아주 귀하고 그런 초월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전부 중앙 의회에만 있으니까.
그러나 이게 과연 본질적인 문제가 되느냐다.
중앙 의회란 이름의 새로운 세계 기관이 등장했다고 해도.
결국엔 중앙 협회에서 중앙 의회로 이름만 바뀐 것이다.
“제가 지금 미스터 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맞혀 볼까요?”
그때, 로버트 윤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갑자기 독심술사라도 된 듯했다.
“그래 보시죠.”
“중앙 의회가 나온다고. 문제 해결이 되느냐, 이걸 걱정하는 것 같은데?”
“…….”
정확히 봤다.
“러시아, 독일 협회. 그리고 저까지. 그걸 생각 안 했겠습니까? 역시 일본 협회장도 그 부분을 생각했지요. 새로운 기관이 나온다고 해도, 결국 이름만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그에 따른 해결 방안도 있다는 것 같은데.”
“당연하죠. 그러니까 구성 협회인 러시아와 독일까지도 합류를 결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해결 방안이 뭐였습니까?”
“의회장이란 직책을 아예 만들지 않겠답니다.”
중앙 의회라는 이름은 있으나 총책임자인 의회장은 만들지 않겠다.
길드로 치면, 어떤 길드가 존재하지만, 길드장이란 총책임자는 없단 뜻이다.
이렇게 되면 보통 길드가 시장도 아니고 개판 5분 전이란 소리를 듣겠지만.
세계의 다양한 국가가 모인 중앙 의회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렇구나…….”
의회장을 만들지 않겠다는 일본 협회장의 공약과도 같은 말.
그 뜻의 본질을 알았다.
지금 중앙 협회에 불만이 쌓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중앙 협회장은 미국인이다.
단지 헌터력 세계 1위라는 이유로 올림픽이나 하물며 축구 월드컵과 같이 중앙 협회장 자리를 결정하는 어떠한 스포츠 리그 형식이나 아니면 공정한 투표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결국엔 미국인이 중앙 협회장이 되면서 미국 협회만을 위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협회가 된 근본적인 이유.
일본 협회장은 협회장이라는 총책임자의 존재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확실히. 의회장과 같은 총책임자가 없다면…….”
“중앙 의회는 모두의 것이죠. 기존 중앙 협회처럼 무언가 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을 때, 별도로 협회장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요.”
이것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와 독일 협회의 경우.
정확한 내부 사정은 모르나, 기존에 중앙 협회 구성 협회로 있으면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을 때.
번번이 협회장에 의해 묵살되고, 미국 협회의 의견만 들어준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로버트 윤은 시기에 맞게 설명했다.
“이미 많은 구성 협회가 중앙 협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 미국의 뒤를 너무 봐줬거든요. 대표적으로 51구역도 그렇고…… 심지어 던전이 존재하던 시기엔 던전의 실 보유량을 속이기까지 했으며, 초월석 소비량도 실제보다 낮게 공표하곤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잡음이 괜히 생기나?
어떤 문제가 있으면 생기게 된다.
중앙 협회는 예로부터 그런 문제가 차곡차곡 쌓여, 러시아와 독일 협회가 등을 돌리게 된 것이란 뜻이다.
너무 대놓고 미국의 편의만 봐줬으니까.
“하지만 의회장이 없으면. 어떤 계획을 진행하고자 할 때, 승인 방식은 어쩌고요? 업무 구조가 걱정인데.”
단순히 의회장이 없어진 것은 러시아와 독일 협회에게 긍정적일 수 있다.
기존 구성 협회로 존재하면서 겪었던 불이익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중앙 의회를 결성하자는 세계의 새 질서를 잡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나올 것인데.
그때마다 또 다른 마찰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거야 간단하지 않습니까? 인류에겐 아주 공정한 결정 방법이 있지요.”
“뭐랍니까, 그게?”
“투표죠. 어떤 프로젝트의 실행을 놓고, 중앙 의회 구성 협회의 협회장들이 대표로 나서서 전부 투표하는 겁니다. 과반수 이상의 찬성만 얻으면 그대로 진행. 일본 협회장은 짧은 시간인데도 꽤 구체적인 운영 방법을 계획했더군요.”
아니다.
이 정도 완성도면 절대 급하게 고안한 게 아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예전부터 홀로 생각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투표 방식.
나로서도 이건 찬성이다.
누군가 흑심을 품고, 로비를 한다고 해도 현재 상황에서 합류 결정된 협회는 무려 21개국.
최소 11개국을 대상으로 로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로비 과정이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협회장 야마다 헤이로의 계획.
구체적으로 전부 이해가 된 듯했다.
“이제 제 진심이 느껴지십니까?”
“그래도 여전히 궁금한 건 남았습니다.”
“뭐죠?”
“왜 중앙 협회를 배신……. 아니, 사직하기로 결정한 겁니까? 제가 본 당신은 중앙 협회에 헌신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과거엔 그랬죠. 아니, 4일 전쯤만 하더라도 그랬다고 봐야죠.”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4일 전의 일이 결정적이었다고 여긴 모양이다.
4일 전이면…….
“전 중앙 협회가 오직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집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제 오산이었더군요.”
“어떤 이유 때문에……?”
“당신이 가진 게이트 전부를 회수하란 말을 들었을 때, 결국. 중앙 협회도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같은 곳이란 것을 실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자신을 막으러 오라는 둥,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됐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끝난 게 아닙니다.”
“당연하죠. 아직 중앙 의회가 결성된 건 아니니까요.”
“아니요, 그거 말고요. 최현민의 청문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미스터 윤 당신도 참관하기로 했고요.”
“네. 그랬죠.”
“그 청문회가 끝나면 곧장 당신의 청문회가 진행될 겁니다. 그걸 대비해야 합니다.”
“…….”
뭐? 내 청문회는 왜?
이런 얘기 없었는데?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제가 구해드릴 테니까. 그 얘기 하고 싶어서 오라고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