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흑염룡이 산다!-129화 (129/200)

§ 129화. 오르문 (4)

“잠깐만……! 형 저거 방사능 물이잖아?!”

실험관에 가득 든 액체가 이 시설을 덮치기 직전.

히로시의 다급한 한마디였다.

아차.

오르문을 구출한다는 생각이 앞서 행동이 먼저 나와 버렸다.

심지어 이곳엔 다른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나와 히로시도 정령이 아닌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

아무리 헌터라고 한들, 저걸 몸에 맞고서도 멀쩡할 수 있을까?

촤아아아악-!

쏟아지는 액체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액체가 이 지하 연구시설을 완전히 덮치기 전.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쏟아지는 액체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난 다급하게 쏟아지는 액체를 염력을 사용해 그대로 허공에 묶어놨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려는 찰나, 내 염력에 의해 허공에서 멈춘 액체.

난 그 액체를 다시 동그랗게 모았다.

“휴우…….”

십 년은 감수했다는 반응인 히로시.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없애요?”

“그러게…….”

일반적인 액체도 아니고. 이 연구시설에서 정령을 흐릿하게나마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 만든 특수한 액체.

게다가 안에 들어간 성분이 방사능이라고 하니, 지금은 크루즈보다도 훨씬 무섭게 느껴졌다.

즉, 어떠한 것에도 닿지 않은 상태로 없애야만 한다.

우리의 능력을 이용해서.

“히로시. 너 능력이 뭐냐? 혹시 이걸 없앨 수 있는 능력 같은 거 없어?”

“그럴 리가……. 제 능력은 이런 거라고요.”

그렇게 답한 히로시는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다.

“은신……?”

“아니요. 제 스스로 ‘마하’라고 이름 붙였어요.”

마하면 속도를 나타내는 단위를 말하는 건데…….

“그저 몸을 빠르게 하는 거라고?”

“네. 제 몸에 흐르는 시간만 빠르게 가속시킨다고 보면 돼요.”

방금 히로시의 몸이 잠깐 사라진 것은 그가 실제로 몸을 가리는 어떤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 액체를 없애기에는 적합한 능력이 아니다.

오직 전투에만 치중한 능력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여기 연구진들한테 넘기면…… 되지 않아요? 알아서 처리하라고.”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왜요?”

일은 내가 저질러 버렸다. 그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똥이 나온 상태.

즉, 이 연구진들의 시선으로는 난 그저 똥만 싸지른 꼴이 된다.

그래 놓고 저들에게 치우라는 식으로 나간다?

아무리 내가 중앙 협회 소속이라고 해도, 쉽게 넘어갈 리가 없다.

난 그런 정황들을 히로시에게 설명했다.

“아…… 그러고도 남겠네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따라서 우리가 알아서 없애야 한다는 뜻.”

술집에서 술 마시다가 실수로 뭐 하나 부숴도 까딱하다간 기물파손죄로 고소당하는 세상 아닌가?

피해를 입힌 것도 모자라 연구진들에게 일을 수습하도록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과연 내가 가진 능력 중에서 이 방사능 액체를 없앨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정말 아무런 피해도 없이 자연스럽게 소멸시킬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로버트 윤의 능력처럼…….

“로버트 윤?”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요? 로버트 윤을 부르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 중 ‘만물’이 있지 않던가?

드래곤도 소환한 적이 있다.

심지어 만물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흑염룡이 그랬으니.

로버트 윤이 가진 능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아닌 듯했다.

로버트 윤의 능력을 듣기만 한 게 아닌, 직접 본 적도 있기에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난 곧장 행동으로 나섰다.

로버트 윤이 자신의 능력인 압축을 계속 회상하며.

똑같은 효과가 나오길 기대하며 만물 능력에 집중한 순간.

드드드드득-!

동그랗게 모은 액체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의 징조는 로버트 윤이 가진 압축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뜻.

능력에 더욱 박차를 가한 뒤에.

콰과과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액체는 사라졌다.

“……어떻게 한 거예요?”

히로시가 놀라며 물었다.

“있어, 그런 게.”

난 이제 연구진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액체가 터져 나올 때 재난이 일어난 것과 같은 반응이었으나, 내가 완벽하게 없앤 뒤엔 히로시처럼 어안이 벙벙한 채였다.

“내 능력 자랑하려고 보여준 거 아니니까.”

부서진 실험관에 가까이 다가가, 혼이 나간 듯한 오르문을 두 손으로 들었다.

정령들은 몸체가 원체 작기에, 아기를 드는 것처럼 들어야 한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오르문을 든 직후.

[오르문. 정신 차려.]

오르문의 주위로 흑염룡과 오리가미가 몰려들었다.

두 정령은 오르문의 뺨을 조심스럽게 툭툭 치며, 그의 정신이 돌아오길 간절히 빌었다.

나 역시 오르문이란 정령을 오늘 처음 보는 중이지만.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직접 봤기 때문일까?

이대로 정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할까.

혹시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불안한 생각만 가득하던 그때.

[아…….]

오르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래 입을 벌린 채로, 동공이 풀린 끔찍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동공에 생기도 있다.

여전히 입을 벌리긴 했으나, 그래도 혼이 나갔을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당히 호전적인 상태다.

[오르문!]

흑염룡이 소리쳤다.

[……린느 님이 어떻게 제 앞에……?]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상당히 당황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우리가 이곳에 오고, 내가 그를 실험관에서 꺼내준 과정 전부.

그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일이란 뜻이다.

[고생했다……. 오르문.]

흑염룡은 오르문을 위로하며 꼭 안아주었다.

[아니, 제가 마지막에 린느 님을 부르긴 했지만…… 어떻게 제 앞에 오신 거지…….]

오르문이 말한 마지막이란.

분명 이곳 51구역에 크루즈와 닮은 몬스터를 소환하기 직전의 일일 것.

그때 자신의 지도자인 흑염룡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 듯하다.

[이 멍청이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돼서! 멍청하게 헌터한테 잡히고 그래!]

이젠 오리가미도 그런 오르문을 꼭 껴안았다.

[……린느 님. 이 하얀 정령은 누구예요? 이런 정령이 있었나……?]

오르문은 자신을 안아주는 오리가미를 낯설게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모습은 본래 오리가미의 모습이 아니라고 했지.

주인인 히로시가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비르잖아.]

[비……비르요?! 제가 아는 그 비르라고요?!]

[그래!]

[그럼 지금 비르가…… 저를 안아준 거예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오르문은 오리가미가 자신을 안아줬다는 것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비르야.]

[네, 린느 님.]

[얘 정신 돌아왔네. 반응 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오리가미는 그렇게 매정하게 답하고는 오르문을 뒤로 밀치듯이 서둘러 그와 떨어졌다.

“뭔데? 왜 갑자기 저러는 거야?”

흑염룡에게 조용히 묻자.

[아~ 오르문이 원래 비르 좋아해서 쫓아다니고 귀찮게 하고 막 그랬거든.]

“……그랬니?”

어쩐지 안아준 것에 유독 집착하는 것 같더니.

또 그런 비화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오리가미도 오르문의 반응을 보자마자 냉철하게 뿌리친 이유가.

이제 걱정스러운 상태가 아닌, 그들이 알던 오르문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되었다.

[아무튼. 정신 돌아온 거 같으니, 넌 당분간 비르랑 가까이 붙어 있지 마. 명령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하세요.]

[네가 적당히 해야 나도 이런 명령을 안 내리지.]

[……알겠습니다.]

정말 오리가미를 그렇게 좋아했던 건가.

가까이 붙지 말라는 명령에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이다.

아마도 오르문에겐 크루즈보다 오리가미와 가까이 있지 말란 명령이 더욱 무서운 듯 느껴졌다.

의기소침하게 축 늘어진 오르문은 이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내 주인.]

[린느 님의 주인이라면……!]

[널 구하러 온 사람이다.]

오르문은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연신 숙여대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직접 구하러 와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인 듯하다.

감사하단 말을 저렇게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보니까.

“무사했으면 됐어.”

이렇게 나와 오르문은 처음으로 인사를 하게 됐다.

이제 오르문은 히로시에게 향했다.

[그럼 이 사람은……?]

[비르의 주인.]

[……감사했어요.]

히로시에겐 퉁명스럽게 감사를 전하는 오르문.

그 모습이 귀여웠다. 나에겐 정말 진심을 다 해서 감사를 전하곤, 히로시에겐 마지 못해서 하는 이유도.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오리가미가 주인이란 이유에서였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구출 성공인가.”

일 하나를 처리하긴 했지만…….

부서진 실험관을 바라봤다.

그리곤 연구진들의 상황을 살폈다.

저들이 곱게 내보낼 리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책임자랑 얘기하는 게 낫겠지.”

난 이곳에 오기 전 미국 협회의 통역사 윌리엄.

그리고 연구팀장 패트릭에게 염력을 이용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 그들에게 걸어둔 염력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타다다다닥!

내가 왔던 그 길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연구팀장 패트릭이 도착했다.

윌리엄과 함께.

그들은 부서진 실험관을 멍하니 쳐다보며, 패트릭이 물었다.

“무슨 소리가 나서 불안하던 참인데……. 도대체 뭘 한 겁니까?”

“뭐긴요. 이 안에 있던 정령. 제가 데리고 갑니다.”

아, 이제 피곤한 말싸움의 시작이겠지.

난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다.

헌터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면서 내가 딱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바로 뻔뻔함.

최현민의 경우를 보자.

양산부라는 독자적인 부서를 세우고, 기쁜 마음에 게이트를 펼쳤을 때.

강만식을 보내 나와 충돌하게 만들고는 최현민은 그저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따지러 갔을 때 그는 어땠던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고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잡아뗐다.

최현민이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뻔뻔함을 배웠고 난 배운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써먹었다.

“……지금. 실험관을 부수고 안에 있던 정령을 강탈했다는 겁니까?”

패트릭의 목소리엔 분노가 느껴졌다.

그런데 강탈……?

이거 어째 흘러가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데……?

이 상황에서 강탈이란 단어가 나올 리가 없을 텐데.

설마…….

“51구역 소유인 정령을 어떻게 멋대로 가져가겠단 겁니까! 아무리 중앙 협회 소속이라고 해도 그렇지! 중앙 협회도 그런 식으로는 안 해!”

진짜 설마 했는데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난 답답함에 이마를 찰싹 때렸다.

“51구역 소유…….”

그 말이 귀에 내내 거슬린다.

소유라니. 정령을 여태껏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 주장을 하는 게 아닌가?

“이미 로버트 윤에게 다 말했는데도 똑같은 소리를 여기에서 하다니.”

“무슨 뜻입니까.”

“정령을 소유했다? 정령은 우리와 같은 생명체란 소리. 못 들었습니까?”

“…….”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패트릭이 갑자기 내 눈치를 보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거짓말로 변명하려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딱 저렇던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