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오르문 (2)
점점 더 끓는 흑염룡의 분노.
하지만 흑염룡의 분노를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연구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한 사람이 내 앞에 서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51구역 중에서도 헌터 구역의 모든 연구, 실험을 총괄하는 연구팀장 패트릭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물론, 지금 상황상 자신을 소개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하지만, 흑염룡의 상태 때문에 집중이 안 됐다.
“네. 반갑습니다.”
대충 그와 인사를 마친 뒤에, 흑염룡의 안정을 위해 힘쓰려고 했으나.
“로버트 윤에게는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우리의 프로젝트에 응해주신다고요.”
이들에게 내 상황이 중요할까?
프로젝트 네이션인지 뭔지.
헌터의 능력을 추출, 저장하여 자신들 멋대로 사용하는 그 일만 관심이 있는 듯한 말이었다.
[린느 님. 저도 화가 많이 나지만…… 어느 정도는 들으셨다면서요. 그러니까 참으세요. 지금은 참아야 해요. 린느 님의 주인도 저 녀석을 구출하기 위해 온 거라면서요?]
오리가미가 나를 대신하여 흑염룡의 안정을 도왔다.
[하지만…… 늘 밝았던 저 녀석이 어떤 꼴을 당했길래 저렇게 피폐해지냐고. 아무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건 인간들의 도가 지나쳐.]
흑염룡은 완고했다.
그래, 미리 듣기는 했지.
로버트 윤은 51구역에서 의문의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여 실험을 했다고 미리 밝혔으니까.
심지어 실험 내용은 강한 충격을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흑염룡과 같은 마음이다.
말로만 미리 들었다고 했어도.
실제로 내 눈으로 목격한 이름 모를 저 정령은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걸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흑염룡, 그리고 오리가미.
내가 여태까지 본 두 정령은 사람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고, 성별도 존재한다.
두 정령은 여자였지만, 지금 실험관 안에 갇힌 채로 미친 것처럼 입을 멍하니 벌린 저 정령은 남자다.
반듯하게 가르마를 탄 갈색의 머리카락.
아마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꽤 훈훈한 외모를 가진 정령으로 보였겠지만…….
지금은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그의 외모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흡사, 지금 정령의 상태를 보니 예전에 봤던 기괴한 사진 모음집 같은 것이 떠올랐다.
내가 봤던 그 사진 모음집은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면 찾아오는 변화’와 같은 제목이었다.
예쁜 사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괴상한 인상이었고.
반대로 잘생긴 사람 역시 그렇게 변했다.
그토록 빛나던 외모들이 약물 하나에 저렇게 망가질 수 있는가?
이런 경각심을 주기 위해 존재했던 게시물로 기억한다.
지금 실험관 안에 갇힌 정령의 모습을 보자니 딱 그것과 일치했다.
[오르문! 정신 차려! 오르문!!]
그때, 오리가미가 실험관 속에 갇힌 정령에게 소리쳤다.
덕분에 정령의 이름이 오르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그렇게 얼빠진 상태로 있으니까 린느 님이 화가 나셨잖아……! 어서……! 빨리 정신 차리라고!]
심지어 이제 오리가미는 실험관을 쾅쾅 두들기며, 안에 있는 정령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애썼다.
저렇게 피폐한 모습으로 인해 흑염룡은 분노를 느꼈고.
오르문이 빨리 정신을 조금이라도 회복한 모습을 보인다면 흑염룡의 분노가 조금은 사라질 거라 예상한 듯했다.
[비르. 놔둬.]
이어서 들리는 흑염룡의 냉철한 목소리.
설마 싶어서 난 흑염룡의 상태를 살폈다.
이토록 냉철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이미 분노 한계치가 차 버린 걸까?
그렇다면 51구역에 다시 몬스터 소동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그것을 걱정하며 쳐다봤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흑염룡은 내가 걱정한 것처럼 게이트로 변하던 중이 아니었다.
“뒤는 갑자기 왜 돌아보시죠?”
내가 흑염룡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린 것을 보고 연구팀장 패트릭은 의아함을 가득 담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낯선 곳에 오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일단…… 흑염룡에 대한 것은 오리가미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했다.
오리가미에게 눈빛으로 전했다.
계속 그렇게 흑염룡을 안정시켜달라는 의미였다.
오리가미는 그래도 잘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일단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로버트 윤이 저희에게 전달했습니다. 51구역에서 진행했던 실험과 연구에 대해서 알려주라고 하던데요?”
대표적으로 프로젝트 네이션의 발명 시기나.
혹은 실험관에 갇힌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발산하는 초월석과 비슷한 에너지.
그것들을 나에게 자세히 알리라는 지시였을 거다.
“프로젝트 네이션이라고 했었죠? 51구역이 자랑하는 기술력.”
하지만 그런 것. 어차피 나한테는 안중에도 없다.
“정식 명칭은 프로젝트 원 네이션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어차피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초월석을 이용하여, 특정 헌터의 능력 레벨을 갑자기 올릴 수가 있고, 또 어떤 경우엔 헌터가 가진 능력을 기계에 저장하는 형태로 사용한다고요.”
“정확합니다. 일단 그 기술을 터득한 배경을 알려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더군요.”
나도 로버트 윤이 왜 그런 조치를 한 것인지는 모른다.
설마 나와 로버트 윤 사이에는 아직 신뢰가 없다는 그 말 때문인가?
이런 걸 알려주면 나와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건가?
뭐, 로버트 윤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게다가 패트릭 연구팀장은 “이해할 수 없는 지시”라고 칭한 것을 보니,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절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중앙 협회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이런 반항적인 성향도 드러났다.
그의 말 덕분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문제의 장소 51구역이 자체적으로 경비와 보안이 삼엄하다곤 하지만, 결국 헌터와 관련된 것은 중앙 협회의 통제를 받는 곳이란 뜻이었다.
[윤도원. 나 괜찮으니까 부탁 하나 들어줘.]
그때, 흑염룡이 내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목소리가 차갑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몸 안에 쌓인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중으로 보였다.
그래도 게이트로 변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난 흔쾌히 답했다.
‘얼마든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지.’
[오르문한테……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 줘.]
“…….”
조금 살벌한 부탁이다.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면, 여기에 있는 연구원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것만 같은 서늘함이다.
하지만 나도 궁금했던 문제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인간과는 완전히 별개의 생명체인 정령을 저렇게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도 이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령을 저렇게 치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인간들의 무기 중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고.
앞으로 혹시나 내가 거느린 정령 흑염룡이 해당 위험 물체와 가까이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으니까.
‘알았어.’
흑염룡은 고맙단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당연히 내가 그렇게 답을 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처럼.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패트릭 연구팀장에게 집중했다.
“어쨌든 당신이 하기 싫어도 중앙 협회에서 시켰으니까 해야 한다, 이렇게 느껴지는데. 내가 말이 틀린가?”
내 태도가 돌변하자 가장 놀란 것은 미국 협회에서 나온 윌리엄 통역사.
그는 갑자기 달라진 나의 분위기에 한껏 당황했다.
게다가 패트릭 연구팀장의 눈치를 보는 행동까지 보였다.
분명 이런 뜻이겠지.
내가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통역하게 됐을 경우, 연구팀장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고.
저들이 내 신분을 모를 리가 없다.
나와 히로시는 중앙 협회의 정식 구성원이 아니라고 해도, 중앙 협회 휘하에 있는 신설팀인 연합부원 소속.
이곳은 애초에 중앙 협회의 통제를 받으면서, 중앙 협회 휘하에 있는 우리는 배척하려 든다?
딱 하나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것도 동양인 비하 뭐 그런 건가?’
지금 연구팀장과 윌리엄 통역사의 반응이 딱 그랬으니까.
“왜 그러지?”
내가 분명히 말을 했는데도 윌리엄 통역사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눈치껏 불편한 내용이란 걸 깨닫고, 패트릭 연구팀장이 윌리엄에게 물었다.
“Umm…….”
역시, 윌리엄은 난처한 반응을 보이기만 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지.
윌리엄에게 경고했다.
“당신 미국 협회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난 중앙 협회 연합부원인데. 그걸 혹시 몰랐었나?”
“…….”
거 봐라. 말을 아끼는 거 보니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 구성원이 아니기도 하고, 헌터력도 약한 한국인이란 이유로 깔보고 있던 것이다.
“당신보다 상위 기관에 있는 사람이라고. 무슨 뜻인지 알지? 이 정도는 알아먹잖아?”
“…….”
입은 꾹 다문 채로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내가 한 말.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그대로 정해. 그리고…….”
난 윌리엄에게 대놓고 말했다.
미안하다, 히로시.
이건 계속 숨기고 싶었지만, 이들을 협박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지금 꺼내는 게 맞는 것 같아.
“내 말을 그대로 전했는지, 아닌지. 내가 들으면 알 거든? 영어를 몰라도 알아들을 수 있어. 나한텐 그런 능력도 있거든.”
“……What?”
정말 당황한 모습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는 듯이 보였다.
“너희들 언어인 영어로 대화해도.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못 믿겠지?”
그러면서 히로시를 쳐다봤다.
오리가미가 통역사 역할을 대신 해달라는 뜻이었다.
오리가미와 히로시는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윌리엄은 이번에도 입은 꾹 닫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연구팀장의 말을 통역하지 마. 내 말만 통역해. 일단은. 내가 한 말 그대로 전해.”
결국, 윌리엄이 마지 못해 내가 한 말을 그대로 패트릭 연구팀장에게 전했을 때였다.
“Oh, shit…….”
자신이 하기 싫어도 중앙 협회에서 시키니 해야 한다란 말을 듣자.
그가 중얼거린 말이다.
“반응 보니까 맞는 것 같네. 현재 내 신분은 중앙 협회 휘하의 연합부원. 나는 물론이고, 내 옆에 있는 이 친구. 히로시도 마찬가지. 즉, 이 뜻은 뭘까?”
윌리엄이 곧장 통역하자, 패트릭 연구팀장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뭐지?”
저쪽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우리 사이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찾을 수 없고, 서로를 물어뜯는 맹수의 분위기만 생겨났다.
윌리엄이 패트릭의 말을 통역하려 할 때, 난 조용히 관두라는 손짓을 보였다.
“잊었어? 난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통역할 필요 없어. 연구팀장.”
“뭐지?”
“저 실험관에 한 실험들. 기록한 게 있을 거 아냐? 그것 좀 보여줄 수 있나?”
정령 오르문이 든 실험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 로버트 윤은 강한 충격을 장기간 주었다고 했고, 정확히 어떤 종류의 충격을 주었는지.
그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나.
“그건 곤란한데.”
그의 고집은 완고했다.
“그래? 그럼 나도 프로젝트 네이션에 협조 안 해. 로버트 윤에게 그렇게 전해 봐.”
지금 상태에선 아쉬울 거 가득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몰라서 저러나.
내가 그 말을 뱉은 직후.
주위에는 무거운 공기가 가득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