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오르문 (1)
꼬박 20시간가량의 비행 끝에.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서툰 영어를 써가며 입국 심사까지 마치고 나온 뒤.
[윤도원, 오카다 히로시 환영합니다.]
라고 적힌 피켓이 공항 게이트 앞에 훤히 보였다.
흰 바탕에 어설픈 검은 글씨체.
한눈에 봐도 급하게 프린트한 티가 나는 피켓이다.
나와 히로시가 피켓을 들고 있는 미국인 앞에 서자,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당쉰이? 윤도원임니카?”
로버트 윤을 상대하다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 발음을 듣자니 조금 귀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한국어는 꽤 할 줄 아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했다.
아마도 나와 히로시의 사진을 확인한 듯하다.
모든 확인이 끝난 뒤.
그는 그제야 내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 반갑슴미다! 져는 미국 혀페에서 나온 통역사 윌리엄 앤더슨임미다!”
나이는 대략 40대를 막 넘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다지 젊지도, 그렇다고 늙었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이대다.
윌리엄이 먼저 악수를 청하고, 내가 그의 손을 맞잡은 뒤에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한국어 통역사는 그렇다고 치고. 일본어 통역사는 없습니까?”
나와 히로시는 정령을 서로 가지고 있기에, 각자의 언어로 말해도 대화에 큰 무리가 없지만, 결정적으로 이 사실은 숨기고 있는 중이기에 귀찮더라도 이런 연기를 해야 했다.
“와타시와! 니혼고모 데키맛스!”
윌리엄의 입에선 다행히 일본어도 나왔다.
일본어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모국어, 한국어, 일본어.
최소 3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발음이 이상한데.”
하지만 히로시의 귀에도 그의 일본어는 불편하게 들린 모양이다.
하긴, 한국인이 내가 듣기에도 ‘맛스’라고 말할 때 어딘가 이질적인 것을 느꼈는데.
일본인인 히로시의 귀에 그게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통역사 한 명으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건 변함이 없다.
게다가 윌리엄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상황을 보니.
전형적인 토종 외국어 능력자로 보였다.
토종 외국어 능력자란, 책으로만 공부하다 보니 회화 능력이나 발음이 현지인과는 많이 떨어져 본토인이 들었을 땐 상당히 이상하게 들리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래도 뭐……. 한 사람이 두 언어 통역을 맡으면 편하겠지.”
난 히로시에게 전하기 위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윌리엄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 둘이 자연스럽게 각자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은 충분히 이상해 보일 수 있다.
“바로 출발합니까?”
윌리엄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용기를 탈 겁미다. 5시간은 더 가야 합니다.”
“5시간이나……?”
우리가 내린 공항은 JFK 공항이라고도 불리는 뉴욕 공항.
여기에서 따로 51구역으로 직행하는 전용기를 타야만 도착할 수 있단 뜻이다.
한국에서 여기로 오는데 꼬박 20시간.
거기다가 5시간을 더 사용하니, 이동 시간에만 하루를 넘게 소비할 정도다.
미국이란 나라가 정말 넓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죠!”
윌리엄의 안내에 따라 우린 다른 공항 게이트 앞으로 이동했고, 공항 게이트 앞을 지키는 직원들에게 윌리엄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줬다.
온통 영어로 된 신분증이긴 하나, 그게 눈치껏 미국 협회 직원을 증명하는 ID 카드인 것은 알았다.
“Two?”
공항 직원이 윌리엄 뒤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물은 말이다.
윌리엄이 “Yes.”라고 답하자 그들은 게이트를 열어줬고, 그렇게 또 다른 비행기로 올라탔다.
이번 비행기는 흔한 여객기가 아닌, 정말 첩보 영화에서나 볼 듯한 비행기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타고 온 비행기처럼 이코노미 좌석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 이 비행기 객실 전체가 퍼스트 클래스로 이루어진 듯하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마 이런 구조를 가지지 않았던가?
좌석 앞에 테이블도 있고, 우아하게 비행하면서 스테이크도 썰 수 있는 그런 비행기다.
“우와…….”
히로시 역시 격이 다른 기체에 매료된 듯 보였다.
“승무원들을 소개하겠슴미다.”
“굳이……?”
우린 조용히 비행기 타고 51구역으로 가면 되는데, 승무원까지 소개하겠다니.
뭔가 과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윌리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승무원 전원을 우리 앞에 집결시켰다.
기장과 부기장.
그리고 객실 승무원은 총 7명.
승객이라고 해 봤자 나와 윌리엄, 히로시. 총 3명인데 승무원이 더 많은 꼴을 보자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단 말이 딱 이런 걸 놓고 하는 말 같다.
“안전한 비행을 약속드립니다.”
그들은 모국어로 그 말을 다짐하듯, 나와 히로시에 건넨 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와 히로시도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꽉 맨 뒤.
비행기는 51구역을 향하기 위해 하늘 위로 떴다.
“우와, 진짜 우리 특별한 사람 된 거 같지 않아요? 형?”
히로시는 처음 느껴보는 특별함에 잠깐 상황을 망각한 것일까.
바로 옆에 윌리엄이 있는데도 내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난 그저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웃어 보이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사람이 된 거 가따고 함미다.”
윌리엄이 눈치껏 통역했다.
역시 난 고개만 끄덕였다.
[안 답답하냐? 그런 연기 하는 거? 그냥 말해. 통역 필요 없다고.]
오히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흑염룡이 답답했는지, 내게 제안했지만.
‘쟤들이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데 그런 중대한 사실을 어떻게 알려주겠냐? 이 멍청아.’
난 흑염룡을 나무라자.
[흐흣, 멍청이요?]
오리가미는 멍청이란 단어를 따라 하며 상당히 재미있는 반응이었다.
[야! 윤도원! 아무리 그래도 애들이 보고 있는데 멍청이는 심하잖아! 나 그래도 대정령이라고!]
‘언제는 부하가 아니라 친구처럼 지낸다며? 왜 말이 바뀌니?’
[으으……!]
할 말이 없었는지, 흑염룡은 팔짱을 끼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나 지금 상당히 삐쳤어!”라고 시위하는 듯한 행동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별로 와닿지도 않는다.
‘그래, 그렇게 조용히 있어라. 그편이 나 도와주는 거니까.’
[진짜 주인 잘못 골랐어.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제발 자신을 위로해달라는 듯이 들렸지만, 역시 무시했다.
[린느 님, 괜찮아요? 많이 서운했어요?]
오리가미가 대신 흑염룡을 위로하려 했지만, 역시 오리가미의 말투에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야. 죽을래?]
[어머. 이제 저한테 화내는 건 아니죠?]
[입 닫고 가자?]
어금니까지 꽉 물며 협박하는 게 정령계의 깡패나 다름이 없다.
그때, 윌리엄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밥은 먹었슴미까?”
“식사요?”
“오, 식사. 네, 식사요.”
“먹기야 했는데…….”
슬슬 배가 고플 때긴 하다.
20시간이나 비행을 했고, 또 5시간을 이동해야 하니까.
아무리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한들,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배는 슬슬 고프네요.”
“스을스을?”
슬슬이란 말은 모르는 듯하다.
“어…….”
문제는 나도 슬슬이란 말이 영어로 뭔지 몰라.
그래서 그냥 “Yes. hungry.”라고 답했다.
이래 가지곤 통역사가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은 묘한 기분이다.
“오, 잠칸만 기다리십시오!”
승무원들이 모인 곳으로 간 윌리엄은 시간이 꽤 지난 뒤에 접시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접시 위에 담긴 것은 스테이크.
맙소사, 이 비행기에 처음 들어설 때, 비행하며 스테이크나 썰고 있으면 참 우아하겠다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금세 실현이 될지는 몰랐다.
애써 준비해 준 것을 먹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와 히로시는 그렇게 스테이크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자니, 정말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마치 내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나 나오는 신 중의 신, 제우스 같고.
그런 제우스가 인간계를 내려다보면서 식사를 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기분이다.
식사를 해치우고 난 뒤. 그대로 난 잠에 빠졌다.
역시, 한국에서 이곳으로 올 때 탔던 비행기와는 격이 다르기에 좌석 자체도 편하게 설계되어 잠이 쏟아졌다.
스르륵 눈을 감고, 무감각의 영역으로 돌아간 뒤.
누군가 나를 조심스럽게 툭툭 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 왔습니다.”
윌리엄의 말이다.
***
비행기에서 내리자.
공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정도.
한국에서 출발한 게 오후 3시.
그리고 이동에만 꼬박 25시간을 사용했으니, 하루가 지난 오후 5시에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미지에 싸였던 51구역의 정체가 내 눈에 들어온 순간이다.
나와 히로시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과정도 남달랐다.
공항에서 내렸을 때는 공항으로 연결된 게이트를 통해서 내렸고, 곧장 공항 내부로 나올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활주로 한가운데 비행기가 멈춘 상태고, 비행기에 연결한 이동식 계단을 통해 우린 활주로 한가운데서 내렸다.
이런 건 보통 뉴스에서 많이 봤던 거다.
해외의 어느 정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나.
반대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해외 어느 곳을 갈 때, 이런 식으로 활주로에서 내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는 전용기이기에 일반 비행기와 달라서였다.
일반 비행기의 경우엔 착륙 허가를 받고, 어디 어디 게이트로 이동하라는 관제탑의 명령을 받아야 하지만.
전용기는 그런 별도 허가 없이 그냥 활주로에 내리면 끝.
게다가 51구역은 처음부터 공항이 없기에, 공항처럼 비행기와 연결된 게이트를 통해 공항 내부로 내리는 게 아니었다.
드넓은 활주로에 덩그러니 선 우리.
주변에는 미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대거 있었다.
[무슨 군인이 이렇게 많아?]
흑염룡은 주변에 널린 군인을 보며 신기하게 반응했다.
‘그야 원래 이곳은 공군 기지니까.’
51구역은 원래 예전부터 비밀 공군 기지로 사용했다.
공군 기지에 군인이 있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 빅뱅이 시작되면서, 헌터나 몬스터에 관한 연구, 실험도 시작되다 보니 헌터들까지 출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윌리엄의 안내를 따라, 51구역에서도 깊숙한 곳으로 이동할 때였다.
이제 슬슬 내 눈에 익숙한 구조물들이 보였다.
바로 51구역에서 처음 몬스터가 나타난 그 사고가 터졌을 때.
레드뷰 영상 속에 있던 그 장소.
그곳으로 우리가 왔단 것을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이곳은 51구역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덩달아 윌리엄의 말투가 변했다.
처음엔 어눌하기 짝이 없는 한국어를 구사하더니, 지금은 꽤 수준 높은 한국어다.
비밀스러운 장소에 온 만큼, 긴장감에 그의 한국어도 진지하게 변한 듯하다.
그렇게 윌리엄의 안내를 받아 계속 어딘가로 향했고, 우린 어느 지하 시설로 들어갔을 때였다.
거대한 실험관 앞.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듯이 나열된 의사 가운을 입은 외국인들.
[…….]
[세상에…….]
실험관을 보자마자 흑염룡과 오리가미의 표정이 변했다.
그 속에는 정령 하나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동공까지 풀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으로 치면 약에 중독되어 완전히 폐인이 된 모습과 흡사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걸 보자마자 흑염룡은 분노했다.
“이런……!”
저 분노를 놔두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난 알지 않던가?
그것부터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