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신세계 (2)
“촉이 좋으신 분일까요, 눈치가 빠르신 분일까요?”
로버트 윤의 질문에 장길수는 그저 허허실실 웃기만 했다.
“내가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라고 답하고 싶수.”
“하하하, 재밌는 분이십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제가 답변을 드리자면…….”
로버트 윤은 장길수를 향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만큼 중요한 답변이니, 강조하고 싶은 행동이었다.
“중앙 협회에서 미스터 장. 당신의 은퇴에 대해서 정확한 경위를 알고 싶어 합니다. 왜 태강 길드가 사라지면서, 갑자기 길드장을 따라 은퇴를 하게 됐는지요. 이 역시…….”
“아까부터 당신이 의심하는, 부당한 계약의 일환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로버트 윤은 처음에 장길수가 헌터 출신인데도 지금은 사설 경호원을 하고 있는 게.
태강 길드에 들어갔던 조건 중에 부당한 조항이 있었고, 그 조항의 여파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태강 길드장이었던 신동원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은 사실.
아무리 어떤 공작이 들어갔다 한들, 그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협회장 후보까지 오른 장길수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게 아닐까.
이 궁금증을 확실하게 풀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장길수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럼,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자세히라고 할 것도 없지요. 협회장이 최현민인데 더 자세한 뭐가 더 필요합니까?”
“…….”
정말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답변이다.
장길수의 경우엔 이미 협회장 후보 시절에 최현민이 어떤 사람인지 가까이서 느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보금자리인 태강 길드.
협회장이 된 최현민이 얼마나 유치한 수작으로 길드장 하나를 매장시켰는지 뻔히 봤다.
그런 자신이.
계속 헌터계에 남아 있다고 한들 해 뜰 날이 있기나 할까?
게다가 최현민과 직접 경쟁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비록 당시 태강 길드가 표적이 된 이유는 독보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가장 넓은 길드 부지를 가진 게 이유다.
하지만 장길수는 자신이 태강 길드에 있어서 더 그랬을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장길수는 최현민에게 있어서 아픈 손가락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앞으로 최현민이 또 자신의 보금자리를 쫓아다니며 얼마나 못살게 굴지 모르는 노릇.
게다가 이제는 협회장이었으니, 장길수가 숨을 곳은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아무리 최현민을 피해 다녀도 협회장에 오른 그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이 헌터 신분을 계속 가지고 있는 한은 그랬다.
“최현민 협회장 때문에 홧김에 은퇴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잘 봤수다.”
장길수는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흔쾌히 답했다.
“정말…… 그게 다입니까? 그럼 결국엔 최현민 협회장 때문에 은퇴를 결심한 게 아닙니까?”
“그렇죠.”
“흐음…….”
‘뭐야…… 생각 외로 복잡한 문제가 있던 게 아니잖아?’
로버트 윤의 생각이다.
뭔가 더 복잡한 사연이 있어서 은퇴한 것이라 짐작했다.
보통 헌터에게 은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장길수는 정말 사소한 이유로 은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좋습니다. 제게 왜 미스터 장의 개인사까지 물었느냐고 그랬죠?”
장길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은퇴를 번복할 마음이 있는지, 그걸 묻고 싶어서였습니다.”
“은퇴를…… 번복?”
하지만 지금 당장 장길수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왜 저런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은퇴라는 건 한 번 정하면 절대 돌릴 수 없다.
일전에 윤도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윤도원의 경우에야 헌터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충분히 그런 궁금증을 가진 게 납득은 되나…….
로버트 윤의 경우엔 중앙 협회에 있기에 번복이 불가능하단 것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 결국에 미스터 장이 은퇴를 한 이유는 최현민 협회장이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사실이다.
정말 100% 최현민 때문에 은퇴해 버린 거니까.
덕분에 헌터계를 떠나 머리 아픈 나날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로버트 윤은 장길수를 회유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 최현민은 사라졌습니다.”
“아직 완벽히 사라진 건 아니죠. 청문회가 있는데요.”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는 저희가 이미 다량으로 확보한 뒤입니다. 그에게 내려질 처벌도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죠.”
“……정해졌다는 뜻은.”
“최현민 협회장의 말년은 교도소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사실 이 정도면 청문회를 주관하는 중앙 협회에서도 그에게 내려질 징계를 정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는 건 청문회가 단순히 무죄, 유죄를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다.
최현민의 태도를 보고 가중처벌을 하느냐, 아니면 조금 감형해주느냐.
이것을 결정하기 위한 자리라고 봐야 했다.
“최현민 협회장은 이제 사라질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미스터 장. 당신의 고민도 사라지게 되는 것인데. 은퇴를 번복할 수 있다면, 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아는데…….”
로버트 윤이 이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집요하게 묻는 이유는 단 하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으로 보였다.
“네. 원래 은퇴라는 건 번복이 불가능한 게 원칙이죠.”
“그런데 왜 내겐…….”
“단, 범죄로 인한 은퇴가 아닌 자발적인 은퇴에 한해서는 협회가 번복 정당성을 심사할 수 있습니다.”
“예?”
이건 장길수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협회가 정당성을 심사할 수 있다는 뜻이 뭡니까? 중앙 협회에서 그걸 관여한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자국 협회에서 1차적인 심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럴 리가?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로버트 윤의 말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은퇴를 한 헌터가 번복을 희망한다면.
1차적으로 자국 협회에서 심사하게 되어 있단 뜻이다.
그러나 길드장까지 지낸 장길수는 이런 말을 처음 들었다.
“왜 그렇게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심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차 심사가 끝나고 자국 협회에서 번복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 최종적으로 중앙 협회에 보고합니다.”
“그럼…… 중앙 협회도 심사해 보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네. 번복이 인정되고 헌터 신분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거죠.”
“……우린 여태까지 한 번 은퇴하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최현민 협회장이 따로 손을 써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최현민은 상당히 오래 협회장 자리에 있었다.
이전 협회장이 있었을 때의 헌터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은퇴한 경우가 많으니.
그 중간에 최현민이 슬쩍 바꿨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따라서 그 속된 말로 썩은 물들이 헌터계에서 사라졌으니, 최현민이 중간에 규정을 새롭게 정해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장길수는 썩은 물까지는 아닌, 고인 물 정도는 됐으나.
그런 고인 물조차도 몰랐던 조항이었으니까.
“아무튼, 은퇴를 번복할 마음은…… 있으십니까?”
“잠깐, 왜 나를 복귀시키고 싶은 거죠? 은퇴 번복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가요? 아니면 나와 함께 일하는 중인 신동원 본부장에게도 해당되는 건가요?”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버트 윤은 자신을 꼭 복귀시킬 생각은 확실해 보였다.
그것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미스터 신은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 경호팀은요? 걔들도 자발적으로 은퇴했는데.”
“아직 해당 사항 없습니다.”
로버트 윤은 단호하게 답했다.
즉, 은퇴 번복을 제안하는 건 그 많은 사람 중에 장길수만 해당된다는 뜻이다.
“왜 내게만 그런 특혜를 주는 거죠?”
장길수가 물었을 때, 로버트 윤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복귀를 특혜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없진 않군요?”
“……뭐, 그렇수다.”
솔직히 은퇴를 후회하긴 했다.
악의 근원인 최현민이 사라졌으니까.
그런 헌터계에서 다시 헌터로 활동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이런 맑은 공기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특혜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왜 나에게만 그런 제안을 하느냐, 이겁니다. 혹시 고객님 때문입니까? 우리가 고객님을 돕고 있다고 판단해서?”
“절대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 영향은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신동원 본부장님이 가장 공이 큰데요? 왜 그분은 해당 사항이 없는지…….”
“말했잖습니까? 자발적인 은퇴에 한해서 번복 심사가 가능하다고요. 미스터 신은. 자신이 잘못한 건 사실 아닙니까?”
“…….”
그렇다.
아무리 최현민의 계략이 들어갔다고 한들, 어쨌든 물의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기에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제 경호팀들은 그럼 왜……. 걔들도 착실하게 헌터 생활하다가 최현민에 지쳐서 나온 것인데.”
“그것 또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아직은 해당 사항이 없을 뿐이라고요. 영원히 없단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그 해당 사항이란 게 생겨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오직 장길수만 해당된다는 뜻이었다.
“좋습니다. 왜 저를 복귀시키려는 겁니까?”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최현민 협회장. 어차피 처벌 정해져 있다고 했죠?”
“네. 교도소행이 될 거라고.”
“최현민 협회장이 공식적으로 영구 제명되면. 그 뒤를 이을 협회장이 필요합니다.”
“…….”
설마 싶었지만, 장길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을까?
그런 은근한 기대도 서린 상태였고, 혹시 아니라면 실망감을 느끼기 싫어서다.
로버트 윤은 설명을 이었다.
“보통 이렇게 영구 제명이 되면. 규정상으로는 전임 협회장이 협회장직을 다시 맡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전임 협회장. 어디 있죠?”
“교도소……. 하지만! 그분도……!”
“압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요.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 헌터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건 자발적 은퇴를 번복하는 심사보다 훨씬 오래 걸립니다. 그렇기에 당장은 전임 협회장을 꺼낼 수 없지요. 문제는 1주일 후에 최현민의 청문회가 있는데, 그 전에 정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전임 협회장을 교도소에서 빼 오는 일은 최소 몇 년이 걸립니다.”
“……그래서 저한테?”
“네, 전임 협회장이 대행할 수 없을 경우엔. 규정상 협회장 선거 당시 득표율 2위 후보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본격적인 선거가 시작됐을 땐 후보는 최현민 하나였으니까…….”
“그렇기에 미스터 장이 규정에도 문제가 없는 차기 협회장입니다. 어차피 후보였던 건 사실이니까요.”
전임 협회장도 불러올 수 없고.
심지어 득표율 2위 후보도 없다.
그렇기에 최현민과 후보에 섰던 적이 있는 장길수에게 협회장 자격이 주어진 상황이다.
그러나 문제는 장길수는 현재 은퇴한 상태.
협회장이 되기 위해선 이 은퇴를 번복해야 했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미스터 장이 궁금해한 것은 답변 다 했습니다. 이제 미스터 장이 답해 주십시오. 은퇴 번복.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