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신세계 (1)
로버트 윤은 여유로운 손짓으로 어서 빨리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고.
여전히 장길수는 이 상황이 납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로버트 윤이 자신을 부른 곳은 협회가 아닌, 강만식과 최현민을 구속시킨 호텔.
심지어 그의 감찰부원이 숙소로 사용하는 방으로 온 것이다.
“왜 안 앉아요?”
“아. 예……. 앉습니다.”
그제야 장길수는 마지못해서 앉았다.
“그런데 저는 왜 갑자기 보자고 한 겁니까……? 그것도 협회에서 보면 될 걸 굳이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또 뭐고요.”
“미스터 윤이 없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요.”
“우리 고객님은 왜요?”
윤도원의 이름에 장길수가 조금은 사납게 반응했다.
윤도원이 없는 곳에서 얘기를 하고 싶다라.
이것은 필시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다.
하지만 장길수는 열렬히 윤도원만을 생각한다.
단순히 그가 고객이라서?
그건 아니다. 어느덧 윤도원과 알게 되고, 같은 공간에서 지낸 지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장길수는 윤도원이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때 길드장까지 지내고, 협회장 후보까지 올라갔던 장길수.
그렇기에 적어도 사람을 볼 때 자신만의 확신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윤도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로버트 윤이 하는 말은 그런 윤도원을 배신이라도 하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물론,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윤도원이 없는 곳에서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도 정황은 충분한 셈이다.
“흐음~”
로버트 윤은 장길수의 표정을 읽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 순간만큼은 표정에 훤히 드러나는 듯했다.
“경계가 너무 심하군요. 하긴, 이해는 합니다. 협회장 성격이 그랬으니. 사람을 대할 때 의심이 가득한 게 당연하죠. 더군다나 상대가 권력을 가진 상대라면요.”
이에 로버트 윤은 조금 더 부드럽게 다가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 고객님이 없는 자리에서 얘기를 하고 싶다는 건 별로 긍정적인 신호가 아닌데.”
“오해하지 마세요. 미스터 윤이 제게 한 가지를 요청했습니다.”
“뭘요?”
“미스터 윤과 히로시 헌터는 곧 우리의 비밀 기관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미국 네바다주에 있죠.”
“아…… 그 장소는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그곳 아닙니까.”
“네. 하지만 문제가 있죠. 미스터 윤이 게이트를 만들어 놓은 장소를 비우고, 미국으로 향하는 것을 망설이는 중입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세상천지에 게이트를 노리는 짐승들이 많은데.”
게이트가 먹기 좋은 먹이인 상황이니, 충분히 윤도원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전 미스터 윤이 자리를 비운 기간 동안 중앙 협회에서 게이트를 지킬 추가 인원을 요청했고, 중앙 협회에서도 그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미스터 윤은 거절했습니다.”
“이유는요?”
윤도원도 생각이 있으니 이런 제안을 거절했을 것.
그의 생각이 궁금하여 물었다.
“우릴 못 믿겠다고 하던데요?”
“푸하하하!”
로버트 윤의 답을 듣고, 장길수는 그대로 폭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 나 참…….”
급기야 눈가 끝에는 작은 눈물이 맺힐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웃은 뒤였다.
장길수는 속에 있던 웃음을 전부 토해낸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슥 닦으며 말했다.
“이래서 내가 우리 고객님을 좋아한다니까.”
세상 어떤 헌터가 중앙 협회의 제안을 거절할까?
아니, 백번 양보해서 거절할 수 있다.
그런데 거절하는 이유가 단순히 중앙 협회를 못 믿어서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헌터가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을 거다.
중앙 협회가 얼마나 거대한 곳인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물론, 윤도원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안다.
초월석이 귀한 시대에서 초월석을 만들 수 있는 구세주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단순히 초월석 하나만 믿고 중앙 협회 상대로 그런 답을 냉큼 한다는 것 자체가.
윤도원이 비상할 땐 비상한 모습을 보인다는 증거다.
이에 로버트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스터 윤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당신에게 경비를 부탁했습니다.”
“원래 하던 일인데요. 근데 이 얘기를 하려고 고객님이 없는 곳에서 얘기하자고 한 건가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던 중, 장길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설마…… 정말로 저한테 고객님을 배신해라,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음~”
로버트 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추임새를 보인 다음.
갑자기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현실적인 소리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뭐하러 제가 당신에게. 미스터 윤을 배신하라고 합니까? 당신을 게이트 경비로 세워둬도.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당신과 사설 경호팀 정도는 가볍게 제압하고 게이트를 뺏을 수 있습니다.”
“…….”
거짓은 아니다.
명백한 사실이다. 저들은 충분히 그럴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로버트 윤은 장길수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미스터 윤도 이 사실을 잘 알 겁니다. 무엇보다. 저와 미스터 장이 검문소에서 격돌했을 때. 당신이 저를 막지 못한 걸 직접 본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우린 할 생각 없다는 겁니다. 적어도 정말로 중앙 협회는 미스터 윤을 도울 생각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굳이 왜 고객님이 없는 곳에서 하고 싶었냐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숨겨야 할 게 있던 것도 아닌데도 윤도원이 없는 곳을 고집했던 이유가.
“사실 이건 그냥 상황이 그렇게 됐다고 전하는 것뿐이고,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제 나올 이야기가 윤도원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본질이다.
장길수도 바짝 긴장하며, 로버트 윤이 꺼낼 말에 집중했다.
“뭡니까?”
장길수가 본격적으로 물었을 때.
갑자기 로버트 윤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고, 녹음 기능을 켰다.
“녹음은 왜……?”
“증거로 활용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미스터 윤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이유였죠. 경계하지 마세요. 미스터 윤과는 크게 연관 없으니까요. 우린 당신의 개인적인 사정을 정확히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래도 녹음까지 켜 놓고 저렇게 말하면, 장길수 입장에서는 안심이 될 리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 취조실에 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로버트 윤은 그런 장길수의 심정을 무시하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나 묻고 싶습니다. 우리 조사에 의하면 당신은 최현민 협회장과 함께 협회장 후보로 오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추천인이…… 전대 협회장이었죠?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역시나 질문의 형식은 취조와 똑같았다.
그러나 조금 의문스러웠던 것은…….
왜 머나먼 과거인 최현민과 자신이 협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느냐였다.
“협회장 후보에서 밀려난 뒤, 태강 길드의 일반 길드원으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태강 길드는 자발적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당시 태강 길드장이 누군지 몰라서 하는 질문은 아니죠?”
“그걸 모르겠습니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왜 미스터 장 당신이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생각을 정확히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당시 태강 길드장. 지금은 태강 그룹 본사 신동원 본부장님이죠. 이미 최현민과의 후보 경쟁에서 헌터계에는 신물이 다 났던 제게, 편하게 있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단순히 그게 이유였습니까?”
“네.”
“하지만 일반 길드원 신분으로 들어갔습니다. 길드 내 주요 직책을 맡지 않은, 전직 길드장에 협회장 후보였던 신분을 생각하면 한없이 낮죠. 혹시 미스터 신이 갑자기 말을 바꿨다거나 이런 게 없었습니까?”
“크큭.”
로버트 윤의 질문에 그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보슈, 감찰부장 양반. 만약에 정말 신동원 본부장님이 내게 그런 짓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가정이 아니라 사실을 얘기해야…….”
“아직 내 말 안 끝났수. 얘기는 전부 듣고 질문하슈.”
“…….”
무언가 확고하게 전하고 싶었던 게 있던 걸까?
조금은 강압적인 어조로 강조했다.
“그러시죠.”
“정말 만약에 신동원 본부장님이 내게 말을 바꾸는 양아치 짓을 했다면. 은퇴한 뒤에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수?”
장길수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태원 서큐리티의 유니폼.
헌터를 은퇴한 뒤 일반인이 된 그는 태강 그룹의 계열사인 태원 서큐리티 직원으로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협박이나 길드 입단 당시의 부당한 계약으로 인해서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런 건 없수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었으면 내가 태강 길드에 들어가지도 않았수.”
“그렇다면…… 일반 길드원 신분으로 들어간 게 본인의 선택입니까?”
“그렇수.”
“이유가 뭡니까?”
“말했잖수? 헌터계에는 진절머리가 다 났다고. 그래서 관리인 직책은 더는 맡기 싫었고 그냥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마음이 편한 위치에 있고 싶었을 뿐이유.”
“좋습니다. 진절머리가 난 결정적인 이유가. 최현민과의 경쟁에서 밀려서였습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죠.”
“그 정황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습니까? 돌연 후보직 사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최현민 협회장이 단독 후보로 오르게 됐던데. 정작 미스터 장 당신이 왜 갑자기 후보 사퇴를 하게 됐는지에 대해선 알기 힘들더군요.”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닌데 천하의 중앙 협회도 그건 몰랐다, 이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 이유. 이번에 공개할 수 있는 겁니까?”
“흐음…….”
장길수는 로버트 윤이 켜 놓은 녹음기능의 휴대폰에 자꾸만 시선이 뺏겼다.
“꼭 이걸 켠 상태로 답해야 합니까?”
“그건 양해해 주십시오. 최현민 협회장의 청문회 때 사용될 증거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거라면 어쩔 수 없구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그렇게 잠시 동안 고민한 뒤.
“담배 한 대 태워도 되겠수?”
“얼마든지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내뱉었다.
“로버트 윤. 당신이 내게 물은 것을 답하기 전에. 역으로 내가 하나 물어도 됩니까?”
“예. 기밀만 아니라면 답할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내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듯한 느낌인지, 궁금해서 그렇수.”
“말했잖습니까. 최현민 협회장 청문회 증거물이 될 거라…….”
로버트 윤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장길수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거 말고. 내가 태강 길드 일반 길드원 신분으로 들어간 건 최현민 청문회랑은 아무 상관도 없지 않수? 내 개인적인 사정일 뿐인데. 그거까지 물은 이유가 분명히 있는 거 아니우?”
“…….”
“이거 봐. 반응 보니까 맞는갑네. 왜 그거까지 물었는지, 그 이유부터 설명해 주쇼. 듣고 난 뒤에 답해드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