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감찰부의 영향력 (2)
일본 헌터 옆에 있는 정령은 온통 새하얬다.
피부도, 단발의 머리카락도, 심지어 입고 있는 옷까지.
순백의 신부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미모도 훌륭한 정령이었다.
온통 하얀 정령이 등장하다 보니, 내 사무실에 등대 하나가 들어선 것과 같은 효과가 나오는 착각이 들었다.
게다가 정령이 입고 있는 드레스 때문에 흑염룡이 야하다고 말한 것인데.
일반적인 드레스가 아닌, 무슨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나 나오는 신관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형태의 드레스다.
심지어는 엄청 얇은 천으로 만들었다.
저대로 물을 붓는다면, 단순히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정도가 아닌.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리……린느 님?!]
상대 정령이 흑염룡을 보고 반응했다.
[뭐야? 너 누구냐니까? 목소리는 낯이 익은데…….]
[린느 님! 저예요! 저 비르라고요!]
[엥?! 비르?! 너 근데 모습이 왜 그래? 원래 그렇게 안 다녔잖아? 뭐야, 머리도 염색한 거야?]
[네…….]
[갑자기 왜? 머리도 원래 엄청 길었는데 단발로 잘라 버렸네?]
[왜긴요. 이 머저리 때문이죠.]
비르라는 정령이 답을 하면서, 제 주인을 가리켰다.
바로 그 일본 헌터.
나이는 나보다 어려 보였고, 키도 조금은 작았다.
그러나 일본 헌터는 인상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상의 얼굴을 가졌다.
그런데…… 머저리라니.
아무리 그래도 제 주인 아니던가? 주인에 대한 존경심은 그리 없어 보였다.
[저 머저리가 왜?]
[아니 글쎄! 지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랑 똑같이 만든 거라니까요! 이거! 전 하기 싫어 죽겠는데, 어떡해요! 주인이란 놈이 시키니까 할 수밖에 없었지!]
[아~ 그랬구나. 그래도 잘 어울리는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미치게 싫으니까! 지금 이 모습!]
[어……. 그래……. 미안.]
‘흑염룡. 대정령이라는 녀석이. 딱히 권위적이진 않네? 부하한테도 쩔쩔매는 거 보니까.’
[우린 서로를 굴복시키는 존재 아니거든! 다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이니까 대정령이라고 해도 친구처럼 편하게 하는 게 좋지!]
흑염룡이 내게 발끈하며 한 설명이다.
‘그래…….’
[우와…….]
그런데 비르라는 정령이 나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봤다.
[뭐야, 비르. 왜 그래?]
[저분이…… 린느 님 주인님……?]
[응. 내 주인. 윤도원이라는 앤데.]
[우와…… 린느 님…….]
[왜? 어엇?! 야! 너 그런 눈빛 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놈 아니니까!]
뭐야?
뭔데 정령 둘이 갑자기 신나서 저런 대화야?
라고 생각했을 때.
[진짜 부럽다……. 주인님 엄청 잘생기셨네요? 저랑 주인 바꾸면 안 돼요?!]
이건 또 왜 대화가 이렇게 되는 거냐……?
[비르으으!! 진짜 네가 생각하는 그런 놈 아니라니까! 이놈이 얼마나 악질인데!!]
흑염룡이 발작을 일으키며 절규할 때.
“하하하, 안녕하세요! 당신 옆에 정령이 있는 거 보니까. 당신이군요? 오다카 히로시라고 합니다!”
“으음? 뭐야……?”
신기한 현상을 겪었다.
히로시라는 일본 헌터는 분명 모국어인 일본어로 내게 말하는 중인데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 전달이 확실히 되는 중이다.
내 귀에는 일본어로 들리지만, 귀를 통과해 뇌를 거쳤을 때.
한국어로 완전히 뒤바뀌어 이해하는 것만 같은 현상이다.
흑염룡에게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신기했다.
“방금! ‘으음, 뭐야?’라고 말한 거 맞죠?! 오! 오리가미! 이거 엄청 신기하잖아! 미리 듣긴 했지만, 이렇게 느껴지니까 진짜 신기하다!”
[오리가미? 그건 또 무슨 소리래?]
흑염룡이 물었을 때.
[말했잖아요……. 저 주인 놈이 지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모습으로 바꿨다고요. 그 캐릭터 이름이 오리가미래요. 그래서 저도 저렇게 불러요.]
[오리가미? 그래도 이름 예쁜데……?]
[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전 창피해 죽겠는데.]
[난 내 주인 놈이 흑염룡이라고 불러.]
[흑염룡이요……? 그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이래요……?]
[있어 그런 게.]
[별로 좋은 뜻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말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놈 아니라고. 너나 나나…… 주인들이 왜 다 이 모양이니?]
정령들의 한탄은 무시하고, 난 이제 히로시에게 집중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전 윤도원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뭐가 멀어요~ 2시간도 안 걸렸어요. 그런데 나이를 물어도 돼요?”
“나이? 이제 서른인데.”
“전 스물다섯! 어차피 서로 정령의 주인들이니 편하게 형이라고 해도 되죠?”
“마음대로.”
성격도 꽤 마음에 들었다.
격식을 따지지 않을 뿐 예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친화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왜 따라다니는 거래?”
강만식을 쳐다보면서.
히로시에게 묻자, 히로시가 곧장 답변했다.
“자신을 강만식이라고 소개한 그 사람은 제 보디가드라던데요?”
“보디가드? 왜? 내가 무슨 해코지라도 한다는 것처럼 느껴지네.”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죠. 그리고 외교부장은 제 통역가 신분으로 동행하던 중이라던데.”
하긴, 협회 입장에서는 우리가 통역사가 없어도 대화가 이어질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통역사를 붙이는 일이 이상한 건 아니다.
“저…… 강만식 부장. 분위기가 이상한데? 윤도원 부장이랑 히로시라는 헌터가 통역 없이도 각자의 언어로 대화가 가능한 상황인데……?”
임동식이 강만식에게 조용히 상황을 전했다.
이제 난 강만식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번엔 무슨 꿍꿍이로 히로시 헌터를 보낸 걸까? 히로시 헌터도 게이트 능력자라는 걸 알자마자 이렇게 보낸 걸로 아는데.”
“…….”
“그런데 이를 어쩌나? 당신 이제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하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못된 어린이를 잡아갈 경찰 아저씨가 이제 생겨 버렸단 뜻이지.”
“……못된. 어린이?”
“최현민 백 믿고 수습도 못할 정도의 사고를 치고 다녔으니 그게 어린이가 아니고 뭐야?”
나와 강만식이 한창이나 실랑이를 벌일 때.
“음, 내 눈으로 직접 보니까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는군.”
로버트 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 말했다.
그제야 강만식과 임동식은 로버트 윤을 쳐다봤다.
“뭐야, 저건?”
역시나 경솔한 강만식은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지도 않고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이 말을 로버트 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요. 그 ‘저거’라는 게 자기소개 좀 하려는데, 괜찮겠습니까?”
“뭐냐고.”
강만식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갈 때.
로버트 윤은 명함 하나를 느긋한 손짓으로 꺼내 강만식에게 들이밀었다.
명함을 내밀 때도 공손하게 주는 게 아닌,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알아서 가져가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이윽고 명함을 확인한 강만식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다.
“……아니, 어떻게. 중앙 협회 사람이 여기에. 난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중앙 협회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감찰부라면. 해당 국가 협회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입국할 수 있거든요. 그건 몰랐던가?”
“…….”
“강만식 관리부장이라고 했죠? 그 문제의 헌터.”
“문제의…… 헌터?”
“당신과 관련된 자료쯤이야 예전부터 우리가 수집은 하고 있었으니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대충 알고 있지.”
순식간에 두 명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이곳이 내 부서 사무실이 아닌, 검찰 취조실처럼 느껴졌다.
지금 강만식은 분명하게 떨고 있다.
최대한 태연한 척, 불안한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내 눈에는 전부 훤히 보인다.
“강만식 부장. 중앙 협회 한국 감찰부장으로서 명합니다. 우리의 집행이 시작될 것이니 당신은 지금 당장 협회로 돌아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으세요.”
“……무슨 집행을 말하는 겁니까?”
“이미 여기 있는 미스터 윤에게 전부 들었지요. 특히 당신과 협회장 최현민은 미스터 윤이 게이트 능력자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억압하고, 심지어는 공격까지 했다는 것을요.”
“…….”
반박의 여지가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로버트 윤은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우리 중앙 협회는 게이트를 보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총 44개의 게이트. 전부 중앙 협회가 보존을 위해 협조를 결정하였으니, 그간 당신네들이 한 짓도 비리로 들어간단 뜻이죠.”
“아무리 중앙 협회라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도 되는 겁니까?”
“막무가내? 그럴 리가. 여기 게이트의 주인 미스터 윤이 우리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우린 그것을 수락했을 뿐인데?”
그 말을 들은 뒤.
강만식은 나를 쳐다봤다.
아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의 눈빛은 마치, “너도 잘한 것 하나 없는데 뒤통수치기냐?”라고 묻는 듯하다.
뭐, 강만식 입장에서야 나도 똑같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실제로 나도 독립 부서인 양산부장이란 특혜를 받았으면서, 이제와 청렴한 척하지 말라는 경고로 느껴졌지만.
하나도 와닿지가 않는다.
와닿지 않으니 당연히 죄책감도 느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누구였는데?
이제 와서 신분을 세탁하려는 듯한 저런 행동이 그저 역겹게만 보였다.
“내 명령. 못 들었습니까? 명령을 거부한다면, 상당히 피곤한 일이 벌어질 텐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로버트 윤이 강압적으로 협박하자.
그제야 강만식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단, 그러면서 갑자기 휴대폰을 드는 의아한 행동을 보일 때.
드드드득-!
로버트 윤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강만식의 휴대폰을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지금 이게 뭐하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헌터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의 휴대폰이 사라지자, 강만식이 발끈한 모습을 보였지만.
로버트 윤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뭐하긴요? 이 상황에서 휴대폰을 든다는 것은, 최현민 협회장에게 어떤 보고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잠깐 시간 확인하려고 했던 겁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웃기지도 않은 변명을 해대는 강만식.
로버트 윤은 오히려 느긋하게 그에게 답변했다.
“네~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그리고 휴대폰은 제가 변상해 드리죠. 최신형으로.”
“…….”
“그리고 당신도.”
외교부장 임동식에게 한 말이다.
“저는 왜…….”
“당신도 휴대폰 내놓으세요. 제가 협회로 향하기 전까지는 압수입니다.”
“……무슨 권리로.”
“중앙 협회 한국 감찰부장의 권리로.”
“아니, 왜 제 것까지 압수를 한다는 거죠? 이해할 수 없는데.”
“왜긴요? 협회 직원인 당신이니 최현민 협회장에게 몰래 지금 상황을 알릴 수 있고, 그로 인해 도주할 수도 있으니 귀찮은 상황을 차단하려고 하는 거죠. 물론, 도주해도 금방 찾을 수 있는데 귀찮아서 그래요. 내가 귀찮으면 성격이 더러워지거든.”
왜 휴대폰을 갑자기 능력까지 사용하며 없애 버렸나 했더니.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역시 프로는 프로다.
로버트 윤은 이제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짧은 영어를 남겼다.
전화를 끊은 뒤, 로버트 윤이 내게 부탁했다.
“워프 능력자의 도움을 또 받을 수 있습니까?”
“무리는 아니지만 어떤 목적이죠? 그건 알아야 해서.”
“지금 이 전화는 제 부원들에게 한 전화입니다. 당장 협회로 갈 준비 하라고요. 감찰부 집행 시작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