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욕심 (3)
이렇게 속내를 훤히 드러내면서 막무가내로 한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철저히 준비한 게 있다는 뜻.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어차피 오지 말라고 해도 최현민처럼 갑자기 불쑥 찾아올 건 뻔하다.
그리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몰라도, 최현민과 무조건 연관이 있을 거다.
최현민은 일부러 뒤로 물러나, 모르는 척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선전포고 같은 건가?”
나도 숨기지 않고 대놓고 물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아~ 혹시 식사 준비하려면 많이 해. 손님이 꽤 많을 거거든.
“밤 9시가 넘었는데 식사는 무슨. 댁은 원래 9시 넘어서 저녁 먹나?”
-일이 바쁘면 식사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지.
손님이 많을 거다.
그 부분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혼자 오는 게 아닌 무리로 온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 몇 명이나 와? 몇 인분 준비해 줄까?”
-10인분은 넘을걸?
“그러던가.”
거기까지 답하고 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장길수에게 받은 호출벨을 눌렀다.
딸깍.
“……?”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 이 호출벨을 누르면 바로 워프를 통해 내게 온다고 했었는데…….
왜 5분 가까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딸깍.
다시 한번 눌러봤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아무래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았다.
***
“후~ 이거 꽤 괜찮지 않아? 성능이 확실한데?”
“콜록! 콜록! 어우, 센데요?”
강만식과 박우민. 그리고 강만식이 거느린 관리부원들.
그들은 현재 이지은의 건물에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경호팀.
바로 장길수와 그의 팀원들이었다.
부상으로 인해 쓰러진 게 아니다.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쓰러진 그들은 기절을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강만식이 들고 있는 화분이 원인이다.
화분에 심어진 한 송이의 꽃에서 나오는 꽃가루에, 기절, 수면 등등.
시전자가 원하는 효과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역시 헌터의 능력이었다.
단, 기존의 관리부원이 아닌, 정훈섭처럼 새롭게 영입한 보원이다.
하지만 정훈섭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으니.
과거 관리부원이었다가, 방출된 헌터였다.
당시 강만식은 이 능력의 활용도가 너무 좁고 무엇보다 쓰잘데기 없는 능력이라고 여겼기에 방출한 것이었다.
아군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절하지만, 그래도 눈이나 코가 따갑거나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등의 부작용은 있었다.
그래서 박우민이 기침하던 중이었다.
“얘 능력이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은 누가 알았냐고.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는데?”
강만식이 한 여자를 보며 한 말이다.
그녀가 바로 방출됐다가 새롭게 복귀한 관리부원, 권다정이다.
헌터를 은퇴한 것은 아니지만, 잠정 은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헌터계 활동이 없었던 그녀.
현재는 평범한 꽃집의 사장님으로 활동하던 그녀가 근 5년 만에 헌터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필요에 의해 부르고, 다시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당신 성격은 고쳐야 해. 사람은 물건이 아니라고.”
그녀는 강만식을 비난했다.
이번에 복귀하게 된 계기도 순전히 강만식의 욕심 때문이었다.
권다정이 가진 능력의 명칭은 ‘방출’.
원하는 효과를 특정 매개체를 이용해 효과가 발현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다.
그렇다 보니 꽃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발현됐고, 이번에 장길수의 팀에게 사용한 꽃가루의 효과는 기절.
하지만 그녀의 능력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바로 일반적인 인류의 흙으로 자란 식물에 방출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게 아닌, 던전의 토양으로 자란 식물만 해당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던전 정복을 나설 때, 남들은 몬스터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할 때, 혼자서 느긋하게 보일 정도로 던전의 흙을 수집하곤 했기 때문에 강만식에 의해 방출된 계기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던전의 모습이 숲이나 정글과 같은 흙이 있는 던전이 아니라면 그대로 나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번거로운 작업을 걸쳐야 했고, 그 능력도 일회성에 지나지 않기에 관리부원이란 엘리트 타이틀이 걸맞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권다정은 따로 국내, 해외 헌터에게 개인적인 의뢰를 시작했다.
이 역시 던전이 완전 정복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바로 던전 모습이 흙이 가득한 곳이라면, 그 흙을 수집해 kg당 일정 가격을 치르고, 사겠다는 의뢰다.
헌터 활동을 하며 모은 돈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던전 정복 활동을 하며 수집하고 싶어도.
이미 강만식에 의해 자신의 단점이 소문으로 퍼질 대로 퍼진 터라 레이드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수집한 흙들에 식물을 키우고, 그 식물을 통해 혼자 5년 간이나 폐관 수련을 한 덕에 과거와는 확연하게 다른, 강한 능력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강만식이 다시 그녀를 영입하려 했을 때, 강만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승낙할 수밖에 없던 이유.
돈이 가장 컸다.
이미 헌터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 전부를 던전의 흙을 수집하는 데 썼고, 헌터 활동은 단점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
여기저기 대출을 끌어 꽃집을 차리고, 그 수익으로 또 흙을 수집하려 했지만.
상황이 갑자기 좋아지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던전의 개수가 줄어들수록, 그녀가 원하는 던전의 흙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문제.
빚이 빚을 낳듯, 또 빚을 내면서까지 수집했지만, 이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를 넘어서 버렸다.
당장 대출금도 갚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을 때.
강만식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달라진 능력을 보고 곧장 재영입을 제안하면서, 강만식은 빚을 갚아주겠단 조건과.
권다정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인.
던전의 흙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겠단 조건까지 걸었다.
무엇 하나 권다정에게 절실한 조건이었기에, 수락하고 다시금 관리부원이 된 것이었다.
처음 권다정은 의아했다.
던전이 전부 사라진 이 시대에서.
어떻게 던전의 흙을 얻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현장에 오고 나니, 그 의문은 전부 풀렸다.
이곳에 있는 4개의 게이트.
분명히 저 중 하나의 던전은 흙이 가득한, 숲의 던전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양산부장인가 뭔가가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녀석이고. 강만식 당신은 그 녀석이 만든 게이트를 약탈하겠다, 이거지?”
“그렇지. 실제로 지금 하고 있잖아.”
권다정도 장길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친분은 없어도, 그의 이름과 어떤 실력을 가진 사람인지는 잘 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자신의 꽃가루를 맞고 쓰러진 상태다.
“장길수 길드장이 제일 걸림돌이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어서. 놀랐지?”
“당연하지.”
강만식이 과거에 권다정을 방출한 이유도 그게 가장 컸다.
강만식은 힘이 다라고 믿은 사람이다.
그래서 부원들을 들일 때도, 강한 전투 능력을 가진 부원들만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다훈을 만나고 나서, 보조 역할을 하는 능력도 상당히 강력하단 걸 깨닫게 된다.
시너지라는 것을 그때부터 깨닫게 되었고, 자신과 시너지가 잘 맞는 능력을 가진 부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5년 전의 권다정은 그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꽃가루에 상태 이상 효과를 넣는 방식이 아닌, 꽃이 거대한 식인 식물로 변한다든가 등등의 1차원적인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5년 전에 방출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권다정도 보조 역할로 훌륭하단 것을 입증한 상태.
이 상태라면 강만식이 만족스러운 능력을 가진 헌터임은 확실하다.
그 장길수가 꽃가루 한 방에 저렇게 기절한 것만 봐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권다정이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굳이 그 양산부장이랑 싸우려고 해? 게이트를 만드는 능력자면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서 필요할 때 초월석도 받고 하면 되지 않나? 적으로 돌리면 피곤한 것만 많을 것 같은데.”
권다정은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권다정은 지속적으로 던전의 흙이 필요한 상태.
그런 양산부장과 친분을 유지한다면, 초월석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흙 정도는 정말 산 하나를 이룰 정도로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어린놈이 싸가지가 없잖아. 낙하산 주제에.”
“낙하산? 백이 든든해?”
“아니. 게이트 만드는 능력 아니었으면 인정도 못 받을 놈이 내 부원까지 뺏어가고……. 적당히 설쳐야지.”
“근데 어리다고? 몇 살인데?”
“서른이었지, 아마?”
“아~ 그래? 잘생겼어?”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잘생겼으면 내가 데리고 살려고 했지. 요즘에 연상녀, 연하남 조합이 대세라던데.”
“웃기지도 않은 소리 하네.”
“왜? 나한테는 그게 더 현실적인데? 내가 나이치고는 동안이잖아? 아니야?”
지금은 상황에 의해 강만식과 함께하지만, 오히려 권다정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얘기만 들어도 양산부장 윤도원이었기 때문이다.
던전의 흙만 얻을 수만 있다면, 뭐든 못하리.
게다가 잘생긴 연하남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어이. 우리 적이니까 그런 안일한 마음 갖지 말고. 언제든 배신할 기세네?”
“글쎄, 사람이 원래 배가 부르면 다른 생각이 나기 마련이잖아?”
“선전포고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뭘. 그래도 지금 당장은 나한테 필요한 건 강만식 당신이니까. 나도 원하는 거 다 받기 전까진 성심성의껏 임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그 증거로 저기.”
쓰러진 장길수를 가리켰다.
“확실하게 했잖아?”
“그래, 알았다. 그리고 어차피 네가 작정하고 그놈 유혹한다고 해도 안 넘어 올 거다.”
“왜? 눈이 높은가? 아니 눈이 높아도 난 괜찮을 것 같은데.”
“걔 의자왕이야. 이따 걔네 부서 가면 무슨 뜻인지 알걸? 나도 이지은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생긴 거로만 보면 걔가 낫지.”
“지은이? 확실히. 조금 힘든 경쟁 상대네.”
같은 관리부원이었으니, 권다정도 이지은을 잘 알고 있다.
“아무튼. 잡소리는 그만하고. 우민아.”
“예.”
“저 게이트 4개 회수해.”
“알겠습니다.”
강만식의 지시에 박우민이 움직였고, 함께 온 관리부원들이 전부 게이트에 들어가려던 찰나.
“잠깐! 뭐야, 약속 지켜야지?”
맨몸으로 들어가려던 그들을 권다정이 붙잡았다.
“하아……. 알겠어.”
박우민이 답하자, 권다정은 한껏 들뜬 표정을 짓고 게이트에 들어가려던 부원들에게 모래 마대를 쥐여줬다.
각자 2개씩. 개당 약 20kg 정도의 모래를 넣을 수 있는 마대다.
심지어 게이트로 들어가는 헌터는 박우민을 포함해 6명.
총 120kg 분량의 흙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다.
어차피 강만식도 초월석만 회수하면 끝나는 일.
흙 따위는 권다정에게 주고, 초월석만 챙기면 된다.
“정훈섭 씨.”
강만식이 그를 불렀다.
이곳엔 정훈섭도 함께 왔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전투에 부적합해, 레이드 참여 인원에서는 제외됐다.
“당신도 거들어.”
“……예? 하지만 전 전투 인원이 아니라서 레이드 제외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놀고 있을 거야?”
“아, 아니 그건…….”
강만식이 고개를 돌려 권다정을 불렀다.
“권다정.”
“응.”
“저 양반한테도 마대 쥐여 줘.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냐? 교도소에서 나오게 해줬으면 이거라도 해.”
“……예.”
“여기요. 아저씨. 꽉꽉 눌러서 담아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