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가호 (6)
이젠 손가락까지 동원해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접히는 손가락이 하나, 둘, 셋…….
잠시 멈췄다.
그리곤 이어서 넷, 다섯.
한쪽 손가락이 전부 접힌 뒤였다.
[날 포함해서 8명이네.]
‘한국에 있는 건 너 하나고?’
[그렇지.]
‘미국에 하나 더 있고.’
[응.]
‘나머지 정령은? 어디에 있어?’
[그건 나도 몰라.]
‘네가 정령의 왕인데 각자 어디로 퍼졌는지 아예 모른다고? 던전을 통해 너희들끼리 만날 수도 있는데, 신보미의 능력처럼 정령끼리 대화하는 방법은 없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 정신이 이어진 상대와 대화할 수 있는 신보미의 능력처럼, 정령들 사이에서도 그런 능력이 없냐는 질문이었다.
[없는데?]
‘참 쾌활하게도 말하네. 3초 정도 생각은 해 보고 답하지.’
[3초 생각한다고 없는 게 생기는 건 아니잖아?]
‘예…… 어련하시겠어요.’
그렇다면 현재 서로 떨어져 있는 정령이 각자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던전이 완전 정복되기 이전엔 다들 어떻게 교류한 거야?’
[던전에서!]
이번엔 발랄하게 답했다.
던전이 시오스들에겐 만남의 광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든,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정령은 8명.
따라서 세계엔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능력자가 8명이 탄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흑염룡 너랑 대화하니까 궁금한 것만 계속 생겨.’
[이번엔 뭔데?]
‘내가 네 주인이잖아?’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그런데 주인은 한 명의 정령만 데리고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게 있나?’
[아니? 그런 건 없는데?]
‘그럼 미국에 있는 정령을 데리고 오라고 한 건…….’
[단순히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네가 데리고 있으라는 뜻이기도 해!]
흑염룡과 같이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정령이 내게 하나 더 생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게 큰 의미가 있을까?
‘그 정령도 너처럼 감정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만 게이트를 만드는 거 아냐? 모든 정령이 게이트를 만드는 방식이 너랑 똑같은 거 아니냐고.’
[아닌데?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래? 그럼 너랑 게이트를 만드는 방식이 달라?’
[똑같은 정령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정령도 있지. 모두가 나랑 같은 방식은 아니야.]
‘그렇단 말이지?’
이제 슬슬 중2병도 통하지 않아서 ‘줄기’라고 불리는 게이트를 보존하는 일에 신경 써야 하나, 싶었는데.
잘 됐다.
흑염룡과 다른 방식으로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면, 나에게도 필요한 정령이다.
물론, 흑염룡은 정령의 왕이기에 흑염룡이 만드는 게이트 속에 있는 초월석이 가장 강한 힘을 가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거 일일이 따질 겨를은 없었다.
‘미국에 있는 정령. 그 정령도 결국, 생명에 위협을 받아서 그런 거니까 미국 정령이 게이트를 만드는 방법은 너랑 같다고 봐야 하나?’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는 것은 곧 감정에 기복이 찾아왔기에 그런 것.
적어도 미국에 있는 정령의 정보를 간략하게는 알아야 했다.
[그건 모르지. 직접 만나서 누구인지 알기 전까진 알 수 없어.]
단순히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 하나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하기엔 이르단 뜻이었다.
역시, 이렇게 되면 직접 가서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령이 누구인지도, 흑염룡이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자, 고객님. 열심히 뭔가를 생각 중인 것 같은데.”
또다시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신동원이 정신을 일깨워주듯이 말했다.
“미국에서 먼저 우리 쪽에 접근하도록 만드는 방법. 그걸 새롭게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저도 다방면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휴대폰을 들어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죠?”
“지금 당장 해결 방안이 나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나중에 연락해서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제가 일정이…….”
하긴, 나처럼 한가한 부서장도 아니고.
무려 기업인이신데 하루에도 많은 미팅이 잡혀 있을 것.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태강 그룹에 중요한 일로 보였다.
언뜻 보면 아무런 소득도 없는 상태에서 급하게 신동원이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난 아니다.
흑염룡을 통해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동원에게 흔쾌히 답했다.
“아, 네. 저도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바쁘신 와중에 직접 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보고 괜찮은 방법 떠오르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신동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와 함께 온 장길수의 팀도 신동원의 뒤를 따랐다.
“그럼, 이만.”
신동원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대로 내 부서를 떠났다.
차라리 잘 됐다.
지금 나에게 떠오른 방법이 있으니까.
“흑염룡.”
신동원이 떠난 뒤. 이제 육성으로 흑염룡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왜 또 불러.]
흑염룡은 어느덧 내 어깨에 걸터앉은 상태다.
“한 가지. 시도해 볼 방법이 떠올랐는데. 들어볼래?”
[말해 봐.]
“미국에 있는 그 정령 말야. 그 정령이 다시 게이트를 만들기를 기다리는 거, 어때?”
그러면서 난 문제의 영상을 확인했다.
미국 네바다주에서 일어난 몬스터 소동 사건.
거대한 거북이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그 영상을 유심히 살폈다.
거대한 몬스터 뒤로 보이는 게이트.
분명히 저 게이트를 통해 나왔으리라.
난 영상을 확인하면서 슬쩍, 흑염룡의 눈치를 봤다.
이 영상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흑염룡이 감정이 또 요동쳐 이성을 잃은 상태가 되면 어쩌나 싶은 조바심이 있었지만.
다행히 흑염룡은 아까보다는 이성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다시 봐도 괜찮은 거지?”
[응. 네가 데리고 와 준다고 했으니까. 근데 미국에 있는 정령이 게이트를 다시 만들기를 기다리자는 거, 무슨 뜻이야?]
난 영상 안에 있는 게이트를 가리켰다.
“몬스터는 여기에서 나온 거잖아. 보니까 몬스터가 이미 게이트 밖으로 나왔는데도, 게이트가 계속 열려 있네?”
이미 게이트 안에 있는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온 상황인데도 게이트는 활짝 열려 있었다.
[저런 경우엔 정령이 정신을 잃거나, 반대로 정신을 차려서 닫아야 하는 경우니까.]
본래 게이트를 통해 던전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 있는 초월석을 습득한 순간부터, 던전의 붕괴가 시작된다.
그 뒤로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던전의 입구인 게이트는 완벽히 붕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미국에 있는 정령이. 다시 한번 저런 경우가 일어나지 않을까? 주인을 위해서 게이트를 만들진 않더라도. 그 주인이 또 무슨 짓을 한다면 저런 폭주가 또 한 번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필연적으로 미국의 정령과 누군지 모를 정령의 주인은 서로 붙어 있어야만 한다.
흑염룡이 예전에 내게 설명했던 것처럼, 일정 반경 이상 벗어나려고 하면 무언가에 튕겨 그대로 주인에게 돌아오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할 건데…… 그건 정령한테 너무 가혹한데.]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잖아?”
신동원의 의견을 듣고, 미국 협회로 메일을 직접 보내는 것은 이미 철회했다.
따라서 미국 협회가 아쉬움에 내게 먼저 접근하는 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난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미국에 있는 정령이 다시 한번 폭주가 일어났을 때.
내가 이미 만들어둔 43개의 게이트 중 하나에 들어가서, 시오스들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한 특권.
바로 던전을 통해 미국으로 가는 방법을 사용할 계획이다.
물론, 그 방법이 내게도 적용되는지 어떤지는 현재로썬 알 수 없지만, 지금 기댈 수 있는 방법은 이거 하나뿐이다.
이것이 성공하기만 하면, 굳이 입국 신청을 할 일도 없고.
미국에서도 게이트가 열렸을 때, 정말 잠깐만 들렸다가 정령을 데리고 오면 되니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끝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문제는 만약, 우리의 특권이 네게 적용되지 않으면?]
“음…….”
난 뚜벅뚜벅 걸어, 43개의 게이트가 펼쳐진 곳으로 왔다.
그리고 문득, 한 가지 썩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흑염룡. 실험해 볼 수 있는 방법, 있지 않아?”
[실험해 봐? 시오스의 특권이라 말하는 그거?]
“응. 그 능력의 정식 명칭 뭐야? 한국의 던전으로 들어갔다가, 미국의 던전으로 나오는 식의 너희 특권이라는 능력의 명칭.”
[‘활류’라고 불러.]
“그래, 그 활류. 굳이 미국에 게이트가 새로 열리길 기다리는 것보다, 그 전에 확실히 나에게도 그 활류가 적용되는지 실험해 볼 순 없냐고.”
마침 내게는 43개의 게이트가 있다.
그리고 게이트 속에 있는 던전은, 하나의 개미굴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웠다.
서로 날씨, 배경 등등.
모든 환경이 다르지만, 결국엔 하나로 이어진 개미굴.
따라서 43개의 게이트 중에서 아무 게이트에 들어간 뒤, 내가 들어갔던 게이트가 아닌 다른 게이트로 나올 수만 있다면.
활류가 내게도 적용이 되는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을 흑염룡에게 전부 설명했다.
[확실히…… 그거 좋은 방법인데?]
실험에 동의함과 동시에.
미국에 있는 정령을 구출할 방법도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다.
흑염룡의 생각에도 인간의 몸을 가졌고, 더군다나 헌터 신분이 된 지금.
해외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단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러다 또 크루즈가 나오면 어떡하지?]
불안감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어떡하긴. 잡아야지.”
[너 혼자……?]
“드래곤도 부를 수 있잖아? 믿을 구석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는데, 무서울 게 뭐 있어? 내가 예전에도 말했잖아. 난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니까?”
좋게 생각하자.
크루즈가 점령한 던전으로 들어간다 해도.
크루즈를 잡으면 그만.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진 세 개의 능력인 은신, 염력, 만물의 숙련도를 나타내는 레벨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43개의 게이트를 만들면서 이 세 능력의 연습도 틈틈이 했다.
하지만 결과는…….
“흑염룡. 내 능력 현황 보여줘.”
흑염룡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내 능력의 레벨을 확인하기 위해 그 두루마리를 꺼내는 행위를 ‘능력 현황’이라고 미리 정해뒀다.
흑염룡은 즉각 명령을 이행했다.
[은신 Lv 23]
[염력 Lv 32]
[만물 Lv 7]
은신과 염력은 진전이 없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레벨 그대로다.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니, 역시 혼자만의 연습으로는 더는 레벨을 올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만물은 마지막이 레벨 5였는데, 지금은 7.
아마도 흑염룡의 폭주를 막으려 드래곤을 다시금 부르고. 가호를 잠시 체험한 게 컸던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정체된 능력의 레벨도 올릴 수 있는 기회다.
반대로 크루즈를 만나지 않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다.
평화적으로 활류를 실험만 할 수 있으니까.
“시작해 볼까?”
본격적으로 활류를 실험하기 위해 게이트 앞에 섰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