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가호 (4)
-이거 진귀한 손님에게 온 전화군요?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신동원.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비밀이 유지되면서 영어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동원의 기사 몇 개만 검색해도 그의 영어 실력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통역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해외 기업인들과 미팅에 참여.
계약도 곧장 잘 따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가 심심찮게 있다.
그게 태강 길드를 정리하고 나서의 신동원의 삶이었다.
과연 한국의 대표 기업인다운 능력이다.
단순히 재력만이 아닌, 가진 능력도 확실히 일반인과는 다른 수준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동원밖에 없었다.
“어디십니까? 부탁할 게 생겼는데.”
-혹시 최현민 협회장 때문인가요?
이미 장길수의 팀이 떠난 게 벌써 3주나 되었다.
그간 장길수도 내게 휴대폰으로 특이사항은 없는지 등.
내 안전을 묻는 연락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례적으로 내가 신동원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으니, 단순히 강만식이 문제가 아닌, 그 윗선인 최현민과의 마찰이 있다고 예상한 모양이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어어…… 아닌가? 연관 있나?”
우린 지금 미국으로 향할 방법을 찾는 중.
그 해결책으로 우리가 직접 미국 협회로 초월석과 게이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내고 어떤 반응이 올지 살펴보려고 하는 거다.
미국 협회를 상대하는 일이기에 최현민과 완전히 별개로 보기도 힘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말하기가 조금 길어서요. 제 부서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아, 참. 본부장님은 레드뷰 못 봤어요?”
-레드뷰요? 그 동영상 사이트요?
반응 보니까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일단 그거 먼저 보고 오세요. 미국 협회 관련 영상이요.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바로 보일 겁니다. 지금 원체 화제라서.”
-알겠습니다, 금방 다시 연락드리죠.
“그 전에.”
-네.
“영어 잘하시는 거 맞죠?”
-할 만큼은 합니다.
“그러니까 할 만큼이라는 게 영문 계약서를 직접 작성할 수 있는, 그런 수준 맞죠?”
이미 기사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은 했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확실하게 묻는 것도 좋아 보였다.
-어떤 분야의 계약이냐에 따라 다른데요. 업종별로 사용하는 단어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요.
답변을 보니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닌 듯하다.
“그거면 됐습니다. 보시고 연락 주시죠.”
-알겠습니다.
신동원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제 그의 연락만 기다리면 된다.
***
미국 네바다주.
로버트 윤은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의문의 몬스터를 완벽하게 제압했다.
비록 150명의 헌터가 희생당하긴 했어도, 로버트 윤에 의해 사태를 확실하게 잠재울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성공이었다.
몬스터를 제압한 뒤, 로버트 윤은 연구팀장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 경위를 자세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그 의문의 생명체를 담은 캡슐이 게이트로 변했단 거죠?”
이 부분도 이미 세계 중앙 협회의 일원인 로버트 윤이 알고 있던 사실.
미국에 있던 던전에서 정복 활동을 하던 중,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낀 헌터가 던전 안에서 그것을 수집했고.
그대로 이곳 네바다주에 있는 연구 기관으로 가지고 온 뒤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강한 충격을 주면, 정해진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의문의 생명체.
그리고 그 에너지는 초월석이 가진 에너지와 상당히 유사했기에, 어쩌면 던전이 완전 정복된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에너지를 이용하면 초월석을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올 것이란 믿음으로 실험을 진행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오늘 터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지금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정보 통신이 비약적으로 발단한 시대.
그렇기에 네바다주에서 일어난 일이 미국 전역의 뉴스는 물론, 해외까지도 그 소식이 퍼지는 중이다.
“로버트 윤? 그런데 아까 한국에서는 이미 이 사실이 퍼졌단 이유가 궁금한데요. 설마, 한국 협회가 나선 겁니까?”
연구팀장이 불안하게 물었다.
한국의 정보력은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실제로 미국 협회에서도 한국 협회를 상대로 실 보유 게이트 정보를 파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 협회의 시스템은 겉보기엔 초라할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 정보를 빼내 올 수 없는 은근히 단단한 방화벽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해커들이 유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실력은 세계 레벨 수준입니다.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거죠.”
로버트 윤이 단호하게 답했다.
“역시, 한국 협회가 이 정보를 취득하자마자 퍼트린 거군요…….”
“아니요. 이거 때문이죠.”
로버트 윤은 휴대폰으로 레드뷰 화면을 보여줬다.
방금까지 이곳에서 일어난 의문의 몬스터가 활개 치는 장면.
동영상에 한글 자막까지 입혀진 상태로 누군가가 게시했다.
“레드뷰 사용자는 한국이 유독 인구 대비, 세계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많아요. 이 영상 하나 때문에 우리의 일이 한국 전역에 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로버트 윤은 한국계 미국인.
그렇기에 한국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네바다주의 상황이 유출되었어요. 이걸 최대한 막아야 하는 상황인 거, 다들 알고 계시죠?”
로버트 윤의 물음에 연구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세계에서는 사실 던전이 완전 정복된 게 아닌, 어딘가에 미처 파악 못 한 던전이 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어요.”
던전이 완전 정복되고 나서.
인류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대표적으로 자원 뻥튀기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유가를 비롯한 생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자원들의 값이 치솟은 것.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도 한국처럼, 물가를 안정화하라는 시위가 전역에서 들고 일어나는 중이다.
“차라리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죠. 던전 완전 정복이라는 평화를 맞이했는데, 필수 자원 고갈이라는 재앙도 함께 맞이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우리가 이런 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절대 안 됩니다. 당신들의 연구 계획. 저도 이미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성공하기만 하면 우린 세계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국가가 되는 게 확실하니까요.”
로버트 윤도 이들의 연구를 의심하면서도, 내심 기대도 됐다.
현재는 이론으로만 가능한 그 일이.
실현된 순간, 미국의 위상은 세계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게 되니까.
“뭐 얼버무릴 수 있는 방법 없어요? 마침 여긴 네바다주. 허가받지 않은 자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출입할 수 없는 비밀의 공간이라고요. 우리끼리 입만 맞추면 돼요. 저도 그걸 조율하려고 온 겁니다.”
“으음…….”
연구팀장이 그렇게 한참이나 고민한 뒤에.
“이런 것도 가능하려나…….”
무언가 떠오른 듯했지만, 자신은 없어 보였다.
“뭐죠? 말해 보세요.”
“영화사 하나를 매수해서 영화 제작 중이었다고 하는 거죠.”
“영화? 이런 상황에?”
“네. 뉴스로 나간 그 문제의 장면은 곧 개봉할 영화의 CG 작업을 마친 한 장면인데, 너무 리얼해서 오보한 거라고. 하는 건…….”
말하면서도 눈치를 심하게 봤다.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거짓말은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으음.”
하지만 로버트 윤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확실히…… 그게 말이 안 되긴 하는데 가장 그럴싸한 거짓말인 것 같은데?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그 장면은 어느 영화의 장면인 걸로. 다들 그렇게 철저하게 입단속 시키세요.”
“정말, 그대로 하신다는 겁니까?”
“그럼, 우리가 그런 실험을 하던 중에 몬스터가 튀어나온 거라고 솔직하게 말할까요? 그랬다간 난리 날 텐데요.”
“그것도 그렇죠…….”
“어차피 진실은 우리만 알고 있어요.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쉽죠. 그렇게 중앙 협회와 미국 협회에 전하겠습니다. 당신들은 빠른 시일 내에 이 기관 복구하세요.”
“예…….”
그들은 실험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도 완성시켰다.
“아, 참. 헌터들 장례식.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세요. 그리고 사망 사유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말고요.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럼 유가족한테는…….”
“비밀로 해야죠. 당분간은.”
유가족 없이 비공개 장례식을 치르라는 지시다.
헌터의 희생까지 감출 정도로, 이 실험이 그들에겐 중요했다.
실리를 따졌을 때, 이 실험의 존재가 세상에 들켰을 경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 알겠습니다.”
“전적으로 이 일의 책임은 팀장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책임지고 수습하세요. 저도 바깥에서 조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치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수습한 뒤에는 꼭. 실험 성공시키세요.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저도 이제 이 기관에 상주할 겁니다. 저 말고도 다른 중앙 협회 소속 헌터들이 올 거예요. 그러니까 당장은 마음 놓고 성공을 위한 실험을 계속하시죠.”
로버트 윤과 같이 중앙 협회 소속 미국 헌터가 이 기관으로 온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
만에 하나 또 이런 사태가 터졌을 경우.
그땐 정말 신속하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상태로 사태를 진압할 수 있다.
실제로 로버트 윤이 방금 보여준 게 그러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연구팀장도 본격적으로 연구단지 복구에 나섰다.
“당분간 귀찮은 일이 생기겠군…….”
로버트 윤의 한탄이다.
***
정말 몇 분 뒤.
신동원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예, 여보세요.”
-고객님. 지금 당장 가면 되는 겁니까?
반응이 바로 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겠다고 하니, 난 알겠다고 답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있는 부서에 포털 하나가 생겼고, 그 안에서 휴대폰을 귀에 댄 신동원이 걸어 나왔다.
그 뒤로는 장길수의 경호팀도 함께다.
아마도 이지은이 소유한 건물에 가 있던 장길수가 워프를 통해 신동원에게 갔고.
이젠 신동원과 함께 내 부서로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빠르네요?”
“일단 얘기 좀 합시다. 이거 뭡니까?”
그의 휴대폰 화면에 띄워진 영상.
문제의 그 레드뷰 영상이다.
“일단 앉으시죠. 얘기 길어질 겁니다.”
그렇게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난 신동원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줬다.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건 게이트를 만드는 능력을 가진 정령이 미국에도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미국인들은 그 정령을 생명이 위협할 정도로 괴롭혔고, 그것이 결과라고.
그리고 해당 정령을 데리고 오기 위해 미국으로 가기 위한 계획까지 말했을 때였다.
신동원의 표정이 급격하게 무너졌다.
“그건 정말 반대합니다. 진심으로.”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거세게 반대의 뜻을 보였다.
[뭐래는 거야! 무조건 가야 한다고!]
흑염룡은 나를 타박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신동원에게 노파심에 물었다.
“설마…… 이 계획을 반대한다는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