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가호 (2)
[왜? 쉬운 거 아니야?]
정말 남의 일이라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 같다.
“정다훈도 결국 워프 능력자야. 그 능력은 워프시킬 수 있는 제한 거리란 게 있다고. 미국이랑 한국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 줄 알아?”
흑염룡을 다그치듯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한국은 서울을 기준으로.
미국은 문제가 발생한 네바다주를 기준으로 잡고 거리를 계산해 봤다.
직선거리로 무려 약 9,500km.
서울과 부산의 거리를 약 300km로 잡고, 왕복을 무려 16번이나 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거리다.
“9,500km나 떨어진 거리를 정다훈이 워프시킬 수 있겠어?”
정다혜의 경우엔 직접 가 본 곳만 워프할 수 있다고 했다.
반명 정다훈은 사진으로 본 곳도 가능은 하다.
워프 능력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고 말할 수 있지만…….
9500km나 떨어진 곳에 워프가 가능할까?
내가 SF 길드 직원을 했을 당시에도 그런 일이 가능한 헌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정다훈도 마찬가지일 거다.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할 수 있냐고.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 된다고 해도 문제야. 그래, 정다훈이 워프를 시켜서 갔다고 치자. 그 뒤엔 어떡할 건데?”
[당연히 그 문제의 장소를 찾아가야지.]
“미국이라니까? 한국이 아니라?”
살면서 미국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나인데.
영상에 나왔던 그 장소가 미국 네바다주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주소도 모른다.
한국에서도 그냥 지역만 알려주고 어느 건축물 사진을 보여준 다음에, 찾아보라고 하면 못 찾는데.
하물며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에서 영상 속에 나온 건물만 보고, 찾아가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미국은 한국이랑은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넓은 곳.
찾아갈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었다.
이런 문제들을 설명했다.
[……아, 인간들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지. 우린 인간들이 무슨 언어를 사용하건,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제야 흑염룡도 문제점을 파악한 모습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수행자. 꼭 그 정령을 데리고 올 방법을 찾아라. 저 정령은 직접 데리고 오지 않는 한, 폭주가 계속될 거다. 폭주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 너도 봐서 알 것 아닌가?]
“몬스터가 계속 나오겠지.”
[그렇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진압하기 위해 헌터들을 투입할 것이고. 그 끝은…….]
드래곤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았다.
결국, 이 사태가 지속되면 정령은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을 피하고 싶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엔, 단순히 한 정령의 생명을 지키려는 것보다.
다른 궁극적인 이유도 섞인 것 같았다.
“드래곤.”
[뭐지?]
“정령을 살리는 건 시오스의 수호신인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긴 한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 맞지?”
[정령 하나하나가 소중해서 그렇다. 우리의 상황은 네가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 이유 때문이다.]
크루즈를 반격하기 위해서는 정령의 숫자도 중요할 테니까.
“미치겠네.”
[수행자. 이건 전적으로 네가 해결해 줘야만 한다. 우리가 나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곳은 인간들의 세상이니까.]
가뜩이나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드래곤은 부담만 더 줬다.
상황을 이렇게 전달 들었는데,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문제의 정령이 이 사태가 오래 유지되면 죽을 거란 사실까지 알았으니 나도 조급해졌다.
처음엔 솔직한 심정으로 별로 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주려는 가호는 ‘비늘의 가호’다.]
드래곤이 가진 네 가지의 가호는 각각 비늘, 날개, 발톱, 그리고 정신.
그중에서도 왜 하필 비늘인지는 몰랐다.
이름만 봐도 정신 쪽이 가장 강해 보였는데, 비늘은 그에 비하면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하필 비늘이지? 정신이 가장 강해 보이는데.”
[눈치는 있구나. 그렇다. 정신의 가호가 가장 강하다.]
“그럼 정신의 가호를 줘야 하는 것 아냐? 나도 온갖 문제를 해결하고, 정령을 구출하는데.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또 왜.”
연신 부정적인 답만 늘어놓으니, 이젠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다.
[내게 있는 가호가 괜히 네 가지나 있는 게 아니다. 전부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비늘의 가호가 가장 기본이 된다는 거야?”
[그렇다. 비늘의 가호가 있어야 다음 가호도 받을 수 있다. 내 가호에도 엄연히 순서란 게 존재해.]
비늘의 가호는 그 이름만 봐도 어떤 의미를 품었는지 대략적으로 알 것 같다.
비늘은 드래곤의 피부.
즉, 드래곤의 피부와 같은 능력을 얻는 것일지도.
[비늘이 가장 기본인 이유는 이것이 너의 몸을 아주 단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강한 힘을 사용하는 만큼, 몸에도 큰 부담이 가는데, 비늘의 가호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불어, 내 가호를 받으면 앞으로 너도 활동하기에 편할 거다.]
“편하다니?”
[잠시 체험하게 해주겠다. 아주 잠깐이니까 잘 느끼도록.]
그 말이 끝난 직후.
드래곤의 눈에서 빛이 났다.
빛은 회오리 모양으로 변하며 내 몸 전체를 감쌌다.
팟-!
그리고 빛이 사라지고 나자.
내 몸에선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뭐야! 이거!”
비늘의 가호란 말 그대로.
내 피부도 드래곤의 피부와 같이 비늘로 변한 것.
단, 차이는 있었다.
피부가 비늘로 변했을 뿐, 피부색은 내 본연의 색 그대로다.
[그 가호가 기본인 이유는 이거 때문이다.]
펄럭-!
그리고 드래곤은 날개를 활짝 펴고.
퍽!
내 가슴을 강타했다.
“……응?”
난 순간 당황했다.
드래곤이 갑자기 날 공격해서?
그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분명히 드래곤의 날개는 전력으로 내 가슴을 쳤는데, 둔탁한 소리만 날 뿐.
통증이 정말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직후, 비늘의 가호는 완전히 사라지고 내 피부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방금 뭐야. 그거? 분명히 날개로 시원하게 한 대 제대로 맞았는데.”
[비늘의 가호는 널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 효과 중 하나일 뿐이다.]
잠깐만…… 그렇다면.
드래곤이 비늘의 가호를 받으면 앞으로 활동하기에도 편할 거라고 했던 게?
3주 전쯤의 일화가 떠올랐다.
바로 처음으로 강만식과 대면하고, 그의 능력에 무기력하게 당한 날이 떠올랐다.
비늘의 가호가 있으면, 강만식의 능력에 당해도.
고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거다.
어디 강만식 뿐일까?
몬스터, 크루즈, 다른 헌터들.
전부 나를 공격해도 난 무적의 상태가 된다.
물론, 제한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전투 능력이 다른 S급 헌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내게는 상당히 유용한 가호인 건 맞았다.
“일단…… 알겠어. 가호라는 거 확실히 대단한 것 맞네.”
[잠깐 체험해준 것이기에 위력이 상당히 약해진 것을 감안해라.]
위력이 떨어졌는데도 이 정도 방어력이라면, 정말 정식으로 비늘의 가호를 받게 되었을 땐 어디까지 가능해질지 기대가 될 정도다.
“일단은 알았어. 정령을 구출해 올게.”
나도 망설였던 드래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수두룩하다.
[고맙다, 수행자여.]
“아직 안전하게 구해온 것 아니잖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그리고…….”
흑염룡의 상태를 슬쩍 살폈다.
이젠 정말 정상이다.
다시 폭주할 일은 없어 보였다.
“흑염룡도 정상이 된 것 같으니까. 그만 돌아가.”
[알겠다.]
“고마웠어. 위급할 때 도와줘서.”
드래곤이 사라지기 직전, 그래도 내 부름에 응해줬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남겼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정령만 구출해 오면 되니까.]
“……그래, 알았다.”
드래곤은 그 말을 끝으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후우…… 어떻게 한담.”
일단은 휴대폰을 들어 이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지은아. 애들 데리고 돌아와. 상황 끝났다. 다혜한테 길 열어달라고 해.”
-잘 마무리된 거야? 다친 곳은?
“없어. 그러니까 돌아와. 너희들 힘을 빌릴 일이 생겼어.”
-잘 마무리…… 안 된 것 같은데? 갑자기 우리 힘을 빌리겠다니?
“와서 들어. 그런 건 아니니까.”
아테네 길드장까지 해 봤던 이지은이라면.
이 문제의 해결 방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난 은근한 기대를 걸며 부원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내 앞에 정다혜의 포털이 생겼다.
***
미국 네바다주는 여전히 피바다가 진행 중이다.
아직도 진압하지 못한 몬스터가 날뛰는 중이며, 투입된 헌터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다.
“도대체 저 몬스터는 얼마나 강했던 거야!”
“이 기관에 있는 헌터들이 전부 죽다니…….”
대기하던 헌터의 총원은 150명.
그런데 그 헌터가 전부 숨통이 끊어졌다.
비록 C급이 주를 이뤘다곤 하나, 150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발생한 건 처음이다.
던전이 있던 시대에서도. 정복을 위해 던전 안으로 들어갔던 헌터 파티가 전멸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이변이 지금 미국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미국은 헌터력으로도 강대국.
헌터력이란 보유한 헌터의 수, 최상급 랭크인 S급이 헌터가 헌터 총원 중에서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는지, 보유한 헌터 총원은 또 인구 대비 몇 퍼센트인지 등등.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군사력과 같은 지표다.
가장 강한 S급 헌터가 상당수 포진되어 있어, 세계 중앙 협회장을 맡을 정도로 강한 나라다.
또한 나라마다 헌터 등급의 기준이 다르다 보니, 미국의 C급이라고 하더라도, 헌터력이 약한 나라로 가면 B급은 우스울 정도다.
“팀장님……! 일단은 피하시죠! 이 기관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고 발생 약 3시간 뒤.
결국, 연구팀 내의 생존자는 연구소를 버리자고 제안했다.
“안 돼……. 이 기관을 버리면, 세계의 눈치도 봐야 해.”
“이미 다 퍼졌던데요? 특히 한국에서 가장 빨리 퍼졌더군요.”
그러던 중, 절망에 빠진 연구원들 뒤에서 들린 목소리.
연구팀장은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당신은……!”
검은 머리의 미국 헌터.
미국 내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로버트 윤이란 이름을 가진 35살의 유능한 S급 헌터.
심지어 로버트 윤은 세계 중앙 협회 간부직을 지내고 있으며, 남극에 있던 인류 마지막 던전을 정복한 헌터다.
“비키세요.”
로버트 윤이 연구원들 앞에 섰다.
연구원들은 그의 말을 듣고, 뒷걸음질 치며 로버트 윤의 등만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당신네들이 그 이상한 이론을 보고하면서 연구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영 좋지 않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결국, 이렇게 됐군요.”
그 말은 이미 연구를 한창 진행했을 때부터 로버트 윤은 연구원들이 모르는 곳에서 감시하고 있었단 뜻이 된다.
“일단은. 저 몬스터가 먼저겠군요. 우린 그 뒤에 따로 얘기합시다.”
로버트 윤은 몬스터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드드드드득-!
그러자 로버트 윤 앞쪽의 공간이 마치 종이를 구긴 것처럼 심하게 일그러졌다.
로버트 윤이 능력을 사용하여 몬스터를 제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흑……! 왜 150명이나 되는 헌터가 전멸했는지 알겠네요…….”
하지만 천하의 로버트 윤도 애를 먹는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포기할 로버트 윤이 아니었다.
드드드드득-!
그가 자신의 스킬에 좀 더 집중하자, 공간의 구겨짐은 더욱 극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