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전쟁 선포? (6)
[그대가 본 것을 보고 하라고 명했다.]
흑염룡의 반응이 없자 드래곤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여전히 반응은 없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점차 게이트로 변하는 중이었던 흑염룡의 날개가 아주 느리지만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며, 크기도 정상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오스의 지도자여.]
드래곤도 흑염룡의 상태를 주시하며, 정신이 돌아오도록 재촉하는 중이다.
드래곤의 눈으로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으니, 사태를 수습하려는 최선의 노력으로 보였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아.]
흑염룡은 게이트화를 멈추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흑염룡!”
[……뭐야,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핏줄기가 옅게 흐르는 내 볼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이 그래 놓고서는 도리어 묻는 것을 보니…….
역시, 이성이 완전히 먹혀서 자아가 잠시 사라졌던 것이다.
[아, 수호신님……]
그리곤 드래곤을 보며 잠시 발작하듯 놀라곤, 드래곤에게 정중한 예의를 갖췄다.
드래곤은 몸체 전제가 나온 상태가 아니다.
그저 얼굴만 빼꼼 내민 상태와 똑같다.
드래곤 같이 거대한 생명체 전신을 소환할 수 없다.
아무리 내 부서가 이전에는 공장 부지로 사용했을 만큼, 넓고 일반적인 건축물에 비교하면 천장이 높다곤 하지만.
빌딩 하나의 크기와 맞먹는 드래곤을 소환하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
[언제부터 와 계셨던 겁니까?]
흑염룡은 그제야 드래곤에게 인사를 건넸다.
드래곤의 목소리 덕에 정신이 들긴 했지만, 드래곤의 존재를 자각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란 뜻이다.
[그대가 그렇게 흥분한 걸 내가 살면서 처음 본 것 같군.]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질타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드래곤은 시오스의 수호신.
따라서 흑염룡과 같은 정령들은 드래곤을 보좌하는 파수꾼과 똑같은 위치다.
[아, 아니군. 한 번 본 적이 있구나. 크루즈들에게 시오스 상당수가 희생되었을 때도 그랬군.]
[…….]
흑염룡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얘기.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흑염룡의 할머니, 레베카 원로라는 말을 듣고 궁금해서 물었을 때.
본래 자신의 엄마가 원로 후계자였지만, 지금은 자신이라고.
이유는 엄마가 이제 없어져서 그렇게 됐단 말을 했었다.
드래곤이 말하는 시오스가 상당수 희생되던 날.
분명히 그 희생자 중에는 자신의 엄마도 포함이 되어 있을 거다.
입은 꾹 다문 상태지만, 몸이 조금 진동하는 게 분노를 느끼던 중이 확실했으니까.
[미안하구나, 괜한 이야기를 해서.]
[아닙니다.]
드래곤도 흑염룡의 상태를 보고 사과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본 것을 보고해라. 무엇을 봤길래 그대가 이렇게까지 된 거였지?]
[제가…… 뭘 하려고 했었나요?]
[폭주 상태였다. 그 상태로 게이트를 만들려고 했었고. 폭주한 상태에서 게이트를 만들면. 어떻게 될지 잘 알지 않던가?]
[……네. 또 제가 그런 행동을 하려고 했었군요.]
갑자기 분위기는 드래곤이 흑염룡을 나무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도 인해 아군인 시오스도 피해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흑염룡도 자신이 그런 폭주 상태였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는 자책하는 듯이 보였으니까.
[그대가 폭주 상태까지 가게 된 원인을 알고 싶구나.]
[그것이…….]
흑염룡은 우물쭈물하게 내 눈치를 보다가 이번엔 내게 말했다.
[그거 드래곤님한테도 보여 줘.]
“그거라면?”
[내가 봤던 거.]
미국의 영상을 말하는 거다.
난 컴퓨터 모니터를 다시 켜고, 드래곤에게 문제의 영상을 보여줬다.
[……왜 직접 보여주는 것인지 알겠구나. 나도 울컥하는군.]
나도 드래곤을 자주 본 건 아니다.
하지만 몇 번 보지 않았어도, 드래곤에 대해서는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정녕, 감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신 침착함을 유지하던 생명체란 것을.
말투도, 표정도, 목소리도.
전부 언제 한 번 분노나 기쁨 등등의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게 특징이었는데.
그런 드래곤의 입에서 ‘울컥’이라는 말이 나오니, 움찔거릴 정도의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이 현상이 무슨 일이길래 그래?”
내가 드래곤에게 물었다.
[시오스의 지도자는 저것을 보고 한순간 분노가 극한까지 치달은 것이다. 당연히 그 분노의 대상은 인간이었고.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크루즈보다 인간을 더 증오하게 된 것이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그러니까 저 영상의 의미가 뭐냐고.”
저 짧은 영상에서 뭘 본 걸까?
게다가 일시적이라곤 해도, 갑자기 크루즈보다 인간을 더 증오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 걸까?
그렇다면 영상 속에서, 흑염룡과 같은 시오스 정령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거고.
그 원인이 순전히 인간에게만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 원인부터 알았어야 했다.
[이유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정령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 같군. 그래서 정령 하나가 폭주했고, 그로 인해 저런 괴이한 형태의 몬스터가 나와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야.]
“정령에게 막대한 피해를 줘……?”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히…… 정령은 내가 가진 능력인 은신과 똑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주인으로 섬기지 않은 자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단, 이지은과 같이 감지 능력이 한계치까지 도달한 헌터는 정령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정령이 보이는 건 아니다.
이 부서에서 3주나 생활한 이지은도 흑염룡의 얼굴은 보질 못했으니까.
“그럼…… 영상 속에 나온 미국에도 정령이 하나 있었다는 게 되는 거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래, 이런 얘기는 전에 흑염룡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크루즈와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피난처를 인간계로 잡았고.
던전을 세계 곳곳에 펼치며, 그런 던전을 관리할 겸, 크루즈에 대항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내가 가진 능력 ‘염력’과 ‘만물’을 품은 초월석이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니까.
흑염룡도 그 과정에서 나를 만나게 된 거고, 나를 주인으로 선택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정령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는 것은…….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피해를 줬기 때문에 폭주한 것으로 보인다.]
드래곤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바로 쑥대밭으로 만들진 않죠.]
흑염룡도 거들었다.
내가 아는 상식도.
던전 속에 있는 몬스터는 일단 어린이는 건들지 않는다.
해당 어린이가 헌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던전 안으로 먼저 침입만 하지 않으면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일도 없다.
그런데 이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일이니, 정령 하나가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혹사당했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흑염룡 네가 이성을 잃고…….”
[같은 시오스의 정령을 건드리는 일은 못 참아. 게다가 저 영상의 몬스터를 네가 직접 봐. 이상하지 않아? 뭐랑 많이 닮았지?]
나도 영상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이다.
“……응.”
[네가 직접 말해 봐. 뭐랑 닮았어?]
“크루즈.”
[보통 몬스터라는 건 말야. 게이트를 여는 정령의 정신 상태에 큰 영향을 받아. 그런데 저 게이트를 연 정령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서, 크루즈의 외형과 섞인 저런 괴상한 몬스터를 만들어낸 거라고. 얼마나 괴로웠으면…… 크루즈의 외형까지 섞였을까…….]
이젠 누군지 모르는 정령을 걱정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난 여전히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런데 흑염룡.”
[왜.]
“이 상황에 어울리는 질문인가 싶긴 한데. 그래도 이건 내가 확실히 알아야겠어서.”
[뭔데.]
“왜 정신이 망가졌는데 크루즈의 외형까지 섞인 몬스터를 만들어냈다는 거야? 크루즈는…… 너희 시오스가 반드시 박멸해야 할 주적이잖아? 그런데 도리어 주적을 닮은 몬스터를 만드는 게 어딘가 이상해서.”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흑염룡은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경이 날카롭다.
내 질문에 사납게 반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니. 시오스의 지도자여. 수행자의 말이 맞다. 수행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군.]
[네, 알겠습니다.]
내가 물을 땐 앙칼진 눈빛을 하고 사납게 반응했으면서.
드래곤이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충신이 따로 없었다.
솔직히 조금은 서운하다.
흑염룡은 한사코 내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했으면서, 정작 지금은 내가 주인이 아닌, 드래곤이 흑염룡의 절대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흑염룡의 설명이 시작됐다.
[정령은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무서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뿐이고. 물론, 그 무서운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난 알 수 없지.]
“빨리 벗어나려고 한 것과 크루즈의 외형이 섞인 몬스터가 나온 이유는?”
[우리 기억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강했던 건 크루즈밖에 없었으니까. 빨리 벗어나고 싶었으니, 그만큼 강한 몬스터가 나오도록 해야 했잖아. 그렇다 보니 크루즈의 외형이 섞인 몬스터가 나온 거지.]
“……그렇군.”
대략 이해는 됐다.
누군지 모를 정령이 처한 상황은.
정말 생명에 크나큰 위협을 느끼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강한 몬스터를 소환할 생각이었다.
즉, 기준은 강한 몬스터가 된다.
그렇다 보니 정령이 경험한 것 중에서 강한 몬스터의 기준이 된 것이.
뜬금없게도 시오스들의 주적, 크루즈가 된 것이고 그런 크루즈를 연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는지, 크루즈의 외형이 섞인 몬스터가 나왔다는 뜻이다.
“인간으로 치면. 맹수에게 둘러싸였을 때 총이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과 같은. 그런 건가?”
[비슷하다고 보면 돼.]
[이제 이해가 됐나? 수행자여?]
“대략적으론.”
[그럼 얘기가 수월하겠군. 시오스의 지도자여.]
[네.]
[그대가 원하는 것은 하나지?]
[물론입니다.]
드래곤과 흑염룡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를 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선, 갑자기 나를 쳐다봤다.
드래곤이 내게 말했다.
[수행자여.]
“뭐야? 갑자기 둘이 무슨 결의라도 다진 것처럼.”
분명히 둘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뭐가 갑자기 또 통한 걸까.
그리고 그 뒤로 왜 나를 동시에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뿜는 것일까?
[너에게 한 가지 명령이 있다.]
“……뭐?”
드래곤의 말에 난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명령이라니. 갑자기 신분이 급격하게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지? 내가 명령을 내리면 안 되는 것인가?]
“그야 당연히. 난 흑염룡의 주인……. 아니, 린느의 주인이잖아?”
[나는 시오스들의 수호신이다. 그렇기에 너는 나보다 아래에 있지. 명령은 충분히 내릴 수 있다.]
“…….”
권력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거였나.
잠시 망각했다.
“뭐, 좋아. 명령이 뭔데.”
[문제가 발생한 곳을 가서 망가져 버린 정령을 네가 직접 데리고 와라.]
“……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미국으로 직접 가서 문제의 정령을 데리고 오라니.
[이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내가 가진 가호 하나를 주겠다. 그래도 지도자의 주인이니. 그런 대우는 있어야겠지.]
가호……?
뭔지 몰라도 뭔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