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우리들만의 장소 (2)
“협회장님……!”
윤도원과 신동원이 떠난 협회장실.
그들의 협상은 끝났다.
협상 결과로는 어느 한쪽은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웃었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잃은 것만 가득한 협상이었다.
잃은 쪽은 당연하게도 강만식.
이지은은 솔직히 이제 필요 없다. 고작해야 갖고 있는 감지 능력은 일회성에 지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세상의 던전은 사라졌기에, 그녀는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에게 뼈아픈 손해는, 정다훈을 너무 쉽게 잃었다는 점이었다.
그 격분에서 오는 억울함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
하지만 최현민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젠 그의 존재 자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이, 답을 하는 지금도 강만식을 보지도 않고, 혼자서 서류 작업 중인 컴퓨터 모니터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윤도원과 조율한 협상 내용을 정리한 각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최현민이 오늘 오후와 비교했을 땐 상당히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자 강만식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런 조건을 어떻게 넙죽 수용한단 말입니까? 너무 파격적이었던 조건이라고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게다가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다훈만큼은 저한테 꼭 필요한 녀석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귀찮은 일 만들지 않기 위해 직접 실종 처리에도 도와주셨으면서?”
그들이 정다훈을 실종 처리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정다훈의 가족들.
특히 그의 친누나 정다혜 때문이었다.
사전 조사를 통해 정다혜의 부친인 정훈섭과의 관계도 파악했다.
헌터 출신인 것에 비해선 그의 삶은 한없이 초라했다.
아니, 초라했다는 표현은 오히려 좋게 보일 수도 있으니 형편없다는 쪽이 훨씬 알맞았다.
빚쟁이에 쫓겨 사는 삶. 그렇다 보니 자식들과의 유대관계도 다른 가정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엄마는 정다운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
따라서 정훈섭은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엄마처럼 믿고 따랐던 정다혜였다.
시간이 계속 흐를 경우, 정다혜는 강만식을 찾아올 것이며, 정다훈과 만나게 해달라고 보챌 것.
하지만 정다훈은 관리부원.
보안이 생명인 부원이다. 그런 부원을 누나와 만나게 해줄 마음이 처음부터 강만식에겐 없었다.
정다혜가 찾아올 때마다 갖은 핑계로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아예 처음부터 실종되었다고 해 버리면 모든 게 편해진다.
그래서 계획한 일이었고, 이에 협회장 최현민도 손을 거들어 주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아예 과거를 싹 잊은 것처럼 행동했기에 강만식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최현민도 슬슬 짜증이 났는지, 강압적인 어투로 강만식을 또렷하게 노려봤다.
그러면서 작업을 마친 서류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네? 협회장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쩌라고. 다른 방법 있었어? 자네한테 게이트 만들 수 있는 능력 있어? 윤도원 그 피라미처럼 싸가지가 없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는 능력이 있냐고.”
“…….”
말문이 턱 막히는 순간이다.
하지만 강만식은 이대로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조금은 추잡해 보이지만, 과거를 들추기 시작했다.
“저는 말이죠. 협회장님을 협회장 자리에 앉히려고 혁혁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뭡니까?”
“그래서 뭐? 달라질 게 있냐고. 현 시국에서 윤도원 같은 능력 없으면 자네도 하찮은 헌터로 전락하는 거, 몰라서 그래?”
“다른 놈도 아니고 정다훈만은 지켰어야 한다고요!”
“누구는 이런 허무맹랑한 조건 들어주고 싶어서 들어줬어? 지금 당장 그 자식의 능력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라고! 자네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던가, 아니면 그놈이 만든 게이트를 눈치채지 못하게 정복하고, 초월석을 다량으로 빼돌리면 모를까!”
“……예?”
그 순간, 강만식은 다른 기운을 감지했다.
과연 최현민이 저런 말을 괜히 할 인물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강만식에게 윤도원이 만든 게이트 속에 있는 초월석을 몰래 약탈해 오라는 것처럼 들렸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그러려면 정다훈이 꼭 필요했다고요!”
“그 꼬맹이 처음부터 자네 말은 잘 따르지 않았잖아? 꼬맹이가 가진 능력이 자네에게 필요하다곤 했지만, 다루기엔 너무 피곤하지 않았나?”
사실이다.
실제로 정다훈의 태도는 늘 비협조적이었고, 그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해 굶기기까지 했던 강만식이었으니까.
“자네한테 필요한 건 워프 능력 아니야? 윤도원이 만든 게이트 속에 있는 초월석을 몰래 약탈하기 위해서 말야.”
“협회장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혹시나 싶어서 강만식은 재차 확인했다.
“내가 괜히 이런 말을 한 것 같은가?”
드디어 인쇄가 된 서류.
그중에서도 마지막 조항을 가리켰다.
강만식은 해당 조항을 소리 내어 읽었다.
“윤도원이 부서장으로 있는 부서. 이하, ‘신설 부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협회장과 무관하며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오직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놈은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니 넙죽 고개를 끄덕였겠지.”
강만식은 알았다.
최현민이 저렇게 증거물인 서류까지 남겼다는 뜻은.
그가 방패막이로 삼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뜻이니까.
최현민은 모든 것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칠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저 조항대로 간다면.
강만식이 아무리 윤도원이 만든 게이트를 멋대로 정복하고, 안에 있는 초월석을 약탈한다고 해도.
이것을 꼬투리 잡아 윤도원이 최현민에게 따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독자적인 부서이니, 강만식을 잡아서 팔다리를 분질러 트리던, 알아서 하라는 뜻이 된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시고……?”
“그 능력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니까, 수용할 수 없다고 하면 협상 자체가 진행되지 않으니, 내가 살 궁리도 필요하지 않은가? 다량의 초월석만 가지고 오면. 내가 자네를 위해 힘써볼 의향이 있네만.”
잃어버린 권력이나 부서원을 되찾고 싶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요, 제가 만약 그렇게 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이미 윤도원의 부원이 된 정다훈을 무슨 수로 다시 데리고 옵니까? 협회장님도 관여할 수 없는, 정말 말 그대로 독자적인 부서인데요.”
“쯧쯧, 자네도 멀었구먼.”
이번엔 최현민이 혀를 차면서 가장 위에 있는, 첫 번째 조항을 가리켰다.
역시 강만식은 소리를 내며 읽었다.
“현 협회장(최현민)이 협회장직을 유지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조항이 지켜지도록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어……?”
어딘가 이상했다.
협회가 아닌, 협회장 최현민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한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강만식은 윤도원과 최현민이 협상을 진행하던 당시, 최현민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협회장 자리에 있는 한, 꼭 지켜주지.”
그 말 역시, 괜히 뱉은 말이 아니었다.
“설마……?”
“내가 협회장직을 물러나면 이것도 아무런 효력이 없어지게 된다는 뜻이지. 물론, 아직 서로 서명하지 않았지만, 서명하게 만들면 돼. 그 애송이는 이 뜻을 모를 거니까.”
“그렇게 호락호락할까요? 그놈 옆에는 신동원까지 있는데.”
“그래봤자 은퇴한 헌터야.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건 신동원과의 협상이 아니니까, 그놈이 나설 구멍도 별로 없지.”
“태원 서큐리티가 있지 않습니까……?”
“태원 서큐리티가 경호 업체지 법무법인은 아니잖아? 물론, 신동원이 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겠지. 하지만 놈은 곧 정식 헌터가 돼. 놈들 모르게 헌터법 살짝 수정하면 돼.”
“그, 그래요…… 그렇다고 치는데…… 협회장님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누가…… 그 자리에 있습니까?”
이게 가장 중요했다.
협회장 최현민이 이 각서를 깨기 위해 직접 협회장 자리를 물러난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자네밖에 더 있어? 내가 협회장 후보였을 시절부터, 나의 우군이었잖나. 차기 협회장도 내가 믿을 놈을 데려다 놔야지. 난 자네를 믿어.”
“……예?”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초월석을 다량으로 빼돌리기만 하면, 정다훈을 되찾아주는 것은 물론, 헌터들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협회장 자리까지 넙죽 주겠다고 하니, 강만식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대신, 내가 그렇게 기반을 닦아서 자리를 넘겨줬으면, 적어도 자네가 내 노후는 책임지겠지. 자넨 의리가 가득한 사람 아니던가? 다른 놈들과 달리.”
최현민의 은근한 뒷거래가 시작되었다.
“물론이죠.”
하지만 차기 협회장.
이 생각에 사로잡힌 강만식은 표정이 금세 밝게 변하며 답했다.
방금까지 있던 분노는, 빗물이 하수구에 빨려 사라지듯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다량의 초월석은 몇 개면 되는 겁니까?”
“모르지. 상황 따라 다른 거니까.”
“하긴, 전세계에 초월석 공급이 막혔으니 정말 많은 수가 필요하겠네요. 그런데 실력 좋은 워프 능력자를 또 어디서 구한담……. 제가 데리고 있는 녀석들은 그렇게 실력이 좋은 건 아닌데.”
강만식은 정말 할 생각이었다.
협회장이라는 자리에 눈이 먼 채로.
“멀리 갈 게 있나? 피는 물보다 진하단 말이 있는데.”
최현민이 넌지시 말했다.
“그렇군요. 그게 제일 확실하겠어요.”
강만식도 그 뜻이 뭔지 곧장 알았다.
“서명 완전히 마치고 나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전 제 나름대로 준비 좀 해야겠네요.”
“수고하게.”
강만식은 분노로 시작했지만, 끝은 만족감으로 장식했다.
발걸음부터가 신이 났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강만식이 나간 뒤, 최현민은 중얼거렸다.
“역시, 쟤도 멍청해. 다루기가 너무 쉬워.”
최현민한테도 다 생각은 있었다.
***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치고, 신동원의 차를 타고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고객님. 소집했던 우리 법무팀까지 올 일은 없었으니까요.”
신동원은 그 부분이 안심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아무리 우리 법무팀이라도 협회 상대로 딴지를 걸기엔 어려움이 많아서 걱정했거든요.”
협상 내내 평온한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저런 고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잘 된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묻자, 그도 이제야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죠, 고객님.”
“네, 왜요?”
“아무리 생각해도 최현민 그 양반이 한 소리가 내내 걸리네요.”
“뭐가요?”
“대표적으로 두 개요. 자신이 협회장 자리에 있는 한 지켜주겠단 것과. 고객님의 부서에서 일어난 일은 협회와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 게…… 구린내가 너무 난다고 할까요?”
“아~ 그거요?”
나도 똑같이 생각하던 거다.
마치, 다른 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걸 모르고 협상했던 것 같은가?
“저도 당연히 알죠. 전 애초에 협회장 안 믿었어요.”
“……그런데 너무 쉽게 승낙하던데?”
“그거야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랬죠.”
최현민 협회장.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나도 여차하면 판을 엎어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