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크루즈 (2)
[잠깐, 이 목소리는…….]
그런데 흑염룡은 익히 아는 목소리인 듯했다.
적어도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처럼 절망적인 목소리는 아니다.
“뭔데? 흑염룡!”
[드래곤……!]
드래곤이라 하면, 내가 던전에서 봤던 그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를 죽이려 들었던 그 드래곤이 왜 지금은 내게 말을 거는 중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이 던전은 이미 크루즈에게 점령당한 던전이라면서, 어떻게 드래곤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 모르던 때.
[네 안에 있는 힘 덕분이지. 결코 가벼운 힘이 아닌데, 너는 가볍게 여긴 모양이군.]
드래곤이 나를 훈계하는 듯했다.
“내 안에 있는 힘이라니……?”
[시오스들이 ‘만물’이란 능력을 만들고 내게 주입하려고 했던 것을 모르나?]
이건 내가 만물이란 능력을 얻은 직후, 흑염룡에게 들었던 사실이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오스들이 크루즈를 완벽히 없애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인 만큼, 결코 가벼운 게 아니란 뜻이지. 그런데 너는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군.]
이런 상황에 훈계하는 드래곤이라…….
드래곤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 얼떨떨함이 있지만, 그런 드래곤이 나에게 훈계를 한다는 것도 상당히 얼떨떨하다.
아니, 오죽 답답했으면 저런 소리가 나올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건 분명 주입 실패했다고 들었는데.”
옆에 정다훈이 있건 없건, 지금 상황이 그런 사소한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정다훈이 어떻게 생각하건 신경 쓰지 않고, 드래곤과의 대화를 이었다.
[나도 왜 실패했는지 모르겠더군. 내 몸에만 들어오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거부하는 느낌이었으니까.]
흡사,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것과 비슷한 것일까?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아예 알 수가 없으니 그렇게만 추측했다.
[그러나…….]
쿵!
쿠웅!
드래곤이 이어서 말할 때, 다시 충격이 시작됐다.
쩌저적-!
이번엔 금이 생기는 소리가 전보다 훨씬 더 컸다.
“이대로는 부서져요…….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
이 공간의 주인은 정다훈.
그런 그가 만든 곳이니, 상태도 어떤지 잘 알 것이다.
버티는 게 한계까지 온 상황이니까 얼른 뭐라도 해달라는 애원으로 들려왔다.
난 드래곤에게 말했다.
“그러나 뭐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지금의 드래곤은 던전에서 나를 죽이려던 그 드래곤이 아니다.
같은 드래곤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드래곤은 나를 살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긴급한 상황에 목소리를 들려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 보니 공손한 말투가 나갔다.
[시오스들이 그 만물이란 능력을 계속 내 몸에 주입하다 보니, 나에게도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지.]
“무슨 변화요?”
[만물이라는 그 능력을 담은 키스톤이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그 말은……?”
[그래, 아무래도 그 덕에 내가 너에게 말을 거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야. 마치 만물이란 능력이 너와 나를 연결하는 전도체가 된 것처럼.]
“이 상황도 다 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
[정확히 말하면. 보이진 않지만, 느낄 순 있지. 너와 시오스의 지도자가 하는 말이 다 들렸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는 건, 도와주겠단 뜻으로 들리는데요?”
어느 쪽이건 제발 확실한 답을 줘라.
그래야 뭐라도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 생기지 않냔 말이다.
[상황을 보니 내가 필요한 것 같더라고. 아직 너에겐 크루즈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됐는데 크루즈가 나타나 버렸으니까.]
“필요하다란 뜻은……?”
[네가 있는 곳으로 가겠단 뜻이다. 네가 나를 소환하는 형태로.]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에요?”
그게 말처럼 될 수만 있다면.
시오스의 수호신이라는 드래곤이 이 자리에 나타날 수만 있다면.
저 크루즈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더스티라는 크루즈는 크루즈들이 만든 기계와 같은 것.
최약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시오스가 크루즈에게 패색이 짙어져 인간계까지 넘어온 배경이 있지만.
설마 시오스의 수호신이라 하는 드래곤이 크루즈의 최약체 하나 제압할 수 없을까.
이것에 기대를 걸어야 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불러낼 수 있단 뜻이죠?”
[나를 만드는 게 아닌, 불러낸다고 생각해 봐. 네가 가진 ‘만물’이라는 시오스들의 최종 병기를 이용해서. 이미 너는 나를 본 적이 있잖아?]
하지만 레벨 0짜리 능력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먼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현재로서는 쓸모가 없는 능력이다.
[시오스들의 게이트처럼 내가 너에게 갈 수 있는 문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해도 될 거고.]
쿵!
쩌저저적-!
[드디어 열렸다.]
그 사이, 더스티는 정다훈이 만든 별도의 공간을 완전히 부쉈다.
그 직후 들리는 더스티의 목소리.
서둘러야 했다.
[어서! 지금으로선 네가 기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시도해 보는 방법밖에 없어!]
그래,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드래곤의 말대로, 현재 믿을 구석이라곤 ‘만물’밖에 없다는 것을.
드래곤이 시키는 대로, 상상해 봤다.
‘다른 공간에 있는 드래곤이 내게 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다…….’
그것만을 생각했다.
문의 형태는 어떨까, 드래곤처럼 거대한 몸집이면 문도 커야 하지 않을까?
이런 잡념들은 전부 지워 버리고 오직 게이트와 같은 통로.
드래곤이 내게 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언가.
그것만을 생각했다.
[만물을 이용해서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만드는 게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내게 다리를 만들어주는 거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드래곤은 내가 정신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수 있게 응원했다.
[레벨이 0인 건 잊어. 그건 단순히 활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해. 네가 가진 만물이란 능력은 다른 시오스들의 능력과 달리 레벨이 올라간다고 할 수 있는 범위가 올라가는 게 아니란 생각으로.]
비록, 드래곤은 자신이 완벽히 흡수하진 못했어도.
‘만물’이란 능력이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가 나간 적은 많았기 때문일까.
능력의 사용법도 직접 내게 알려줬다.
그런 드래곤의 지침을 받아, 그대로 실행했을 때.
쩌저적……!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더스티가 정다훈이 만든 별도의 공간을 부술 때와는 달랐다.
번쩍-!
왜냐.
새롭게 생긴 빗금에서는 칠흑의 어둠을 걷어내려고 하는 듯이, 눈이 부신 빛의 광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더 집중을 이어갔다.
쩌저적!
쨍그랑-!
마치 거울이 완전히 박살이 난 것처럼.
빗금이 깨졌고.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은.
[거봐, 할 수 있었잖아.]
바로 내가 던전에서 봤던 그 드래곤과 똑같이 생긴 드래곤이었다.
드래곤 강림과 동시에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칠흑의 어둠으로 깔린 이곳에 마치 구원자가 나타난 것 같았다.
[수호신님……!]
반가움에 소리치는 흑염룡.
“저게… 뭐예요……? 새로운 몬스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정다훈의 어리둥절함.
그리고 그 순간.
쉬이익-!
드래곤을 향해 다수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이제야 촉수가 선명히 보인다.
촉수는 지렁이와 같이 꿈틀대지 않았다.
마치 칼날처럼, 올곧게 뻗었고 그 끝은 날카로웠다.
펄럭-!
촉수가 다가오자마자 드래곤은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나와 정다훈을 감쌌다.
티잉-!
밖에서 들린 소리.
분명, 더스티의 촉수가 드래곤의 날개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간 소리다.
[고생했다. 수행자여.]
드래곤이 나를 보고 한 소리다.
그간 연신 나를 칭할 땐 ‘네가’라고 했는데, 지금은 갑자기 그 호칭이 바뀌었다.
“수행자라니……?”
[시오스의 주인을 나는 수행자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호칭이 된 건지……?”
[이제야 수행자의 자격을 갖춘 것 같으니까. 그전까지는 솔직히 별로 못 미더웠거든. 네 스스로가 가진 힘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잖아.]
“드래곤 당신을 여기로 불러낸 것으로 그 자격을 충분히 입증했단 소리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직 보여줘야 할 게 많이 남았지만. 어쨌든…….]
드래곤은 나와 정다훈을 자신과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더스티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드래곤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맞섰고, 우리는 그런 드래곤의 등만 바라보게 됐다.
펄럭-!
다시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서 날갯짓을 힘차게 하자, 새로운 틈이 생겨났다.
틈은 이내 갈라졌고 내가 드래곤을 부를 때와 똑같이 깨지는 소리가 나며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를 만들어주었다.
[여긴 내가 맡지. 어서 나가.]
[누구 마음대로! 얼마 만에 온 먹잇감인데!]
격분한 더스티가 다시 촉수를 뽑아 드래곤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제야 더스티의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올곧은 구 형태의 바위에 가운데만 공허하게 뚫린 듯했다.
그 가운데가 바로 내가 봤던 더스티의 입이 있는 자리다.
더스티가 촉수를 뽑자 올곧은 구 형태는 이제 밤송이와 비슷해졌다.
[나에게 너 하나쯤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촉수를 뽑은 더스티를 바라보며 드래곤이 한 말이다.
그 직후, 드래곤은 더스티를 향해 날아갔고.
그대로 거대한 더스티의 몸체를 전부 물어 버렸다.
더스티도 몸체가 상당히 큰 편인데, 드래곤은 그것보다 더 크다 보니 그 광경이 마치 작은 초코볼 먹는 듯했다.
[어서 나가!]
드래곤이 소리쳤다.
[나가자! 윤도원!]
흑염룡도 나를 재촉한 끝에, 난 정다훈의 손을 잡고 그대로 드래곤이 만들어준 게이트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이렇게…… 나가도 되는 거예요?”
불안한 정다훈의 물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응. 괜찮아. 이제 누나 만나러 가자.”
더스티는 드래곤에게 맡기면 된다.
우린 그대로 더스티가 있는 던전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
“다훈아!”
나오자마자, 감정에 복받친 정다혜가 소리쳤다.
“…누나?”
그제야 정다훈도 정다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누…나아…….”
정다혜와 똑같이, 감정이 복받쳐서였을까.
어린 정다훈은 금세 눈물을 보였다.
몇 년 만에 보는 걸까. 저 둘.
아, 벌써 5년이나 됐겠구나.
5년 만에 가족을 만났으니, 저런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재회의 기쁨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정다훈을 데리고 나오자, 강만식이 우릴 향해 다가오려고 했다.
“강만식 길드장? 경솔한 행동 하지 말자니까?”
신동원이 그런 강만식의 앞길을 막으며 경고한 순간.
[얼마 만에 보는 먹잇감인데!!]
방금 우리가 나온 게이트에서 더스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이상한 목소리는?”
심지어 여기 있는 사람 전부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 직후.
“우왁! 저게 뭐야……!”
우리에게 다가오려던 강만식이 뒷걸음질을 치다 넘어질 정도로 놀란 모습이다.
“꺄악……!”
심지어 정다혜, 신보미도 똑같이 겁에 질린 목소리다.
‘설마…….’
드래곤이 당하기라도 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더스티의 목소리가 여기에서 들릴 리가 없는데……?
난 천천히 게이트를 확인했다.
게이트는 소멸하지 않았고, 크기가 작아진 더스티가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