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우리 기업의 VVIP 고객님 (1)
“뭐야……?”
낯선 남자의 등장에 강만식을 비롯한 헌터들의 행동이 멈췄다.
나도 방 안을 급습한 사람들의 정체를 그제야 확인하게 됐다.
‘태원 서큐리티’라는 검은색 유니폼과 모자를 눌러 쓴 4명의 남자.
모자챙이 눈을 가리고 있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음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어느 테러 조직의 인질이 되었는데, 그런 나를 구하러 와 준 특수부대원들같이 보였다.
“세상에.”
그들 중 선두에 있는 한 사람이 내 상태를 보곤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다가오려고 했지만.
텁.
“뭐냐?”
박우민이 그 사람의 가슴을 손으로 막으며 길을 막았다.
텁.
동시에 그 사람도 박우민의 손목을 잡았다.
“하, 나 이 새끼가. 감히 누구 몸에 손을 올려. 너 박우민 맞지? 몇 년 만에 보는 거냐?”
“뭐……?”
“그리고 우리 고객님 저 지경으로 만든 게 너희들이냐? 강만식도 있네? 어이, 강만식이. 네가 진두지휘해서 우리 고객님 저렇게 만들었어?”
“…….”
그런데 강만식의 반응이 이상했다.
말 그대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저 도깨비는…… 설마…….”
그 말만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나를 고객님이라 부른 남자가 모자를 벗고,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당신은…….”
“그 코흘리개 애송이가 이렇게 화끈하게 다 놀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렇지?”
“장길수……!”
강만식의 태도가 변했다.
연신 건방지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놈이.
상대의 얼굴을 보자 지레 겁먹은 표정이다.
게다가 장길수라는 남자.
나이가 꽤 있어 보였다.
머리는 온통 백발.
그러나 정말 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삭발한 상태다.
밤송이처럼 뾰족 솟은 백발이 저렇게 위압감이 있다는 걸 지금 처음 봤다.
단순히 헤어스타일만이 아니다.
얼굴 여기저기엔 크고 작은 흉터들까지 있어, 정말 전장을 누비는 옛 중세 시대의 군주로 보일 정도다.
“애송아 손 치워라. 그 손 멀쩡히 손목에 붙여 놓고 싶으면.”
그가 박우민에게 말했다.
그저 말 한마디뿐인데, 기가 눌린 박우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치웠다.
그 상태로 내게 다가온 장길수.
내 몸 상태를 살피면서 말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고객님. 여기로 향하는 출입문이 가려져 있어서 찾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4층 천장이 뚫려 있는 걸 확인하고 바로 왔습니다.”
아… 늦은 이유가.
생각해 보니, 도착하자마자 은신을 거두지 않았다.
그거 때문에 약속한 시간보다 지체된 것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장길수란 남자는 박우민이나 강만식에게 말할 땐 정말 생니로 씹어 삼킬 듯한 위압감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나에게 말할 땐 어울리지도 않은 눈웃음을 섞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하니, 어느 장단에 맞출 줄 몰랐다.
“아이구, 말씀 없으신 거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네요. 야. 구급대원 불러. 우리 고객님 치료가 먼저인 것 같다.”
그가 같이 온 팀원에게 말했다.
“예.”
팀원이 답하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작은 체구의, 동그란 안경을 쓴 한 여성이 들어왔다.
여성은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내 몸을 열심히 더듬더니.
“조금만 참으세요.”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흑염룡은 이번에 여성의 이마에서 양피지를 뽑았다.
[재생 Lv 42]
[치유 능력을 가진 헌터야…….]
그렇구나.
장길수가 말한 구급대원은 119 구급대원이 아닌, 태원 서큐리티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치유 계열 헌터였던 것이다.
신동원은 말했다.
태원 서큐리티에 워프 능력자가 있다고.
그 워프를 타고 넘어왔기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리라.
치료는 정말 빠르게 끝났고, 다행히 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저 손으로 여기저기 날 더듬은 게 전부인데,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물론.
살이 뚫린 상처까지 말끔하게 사라졌단 것이다.
“괜찮으세요? 고객님?”
“네, 덕분에.”
“잠깐, 잠깐. 장길수. 당신 헌터 은퇴하지 않았나? 분명히 마지막에 있던 길드가…….”
강만식이 다시 나섰다.
“태강 길드였지? 너랑 협회장 씨가 작정하고 먹으려고 했던 곳.”
“그건 중요하지 않고. 지금 중요한 건 저년이지.”
강만식이 나를 치유해준 헌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허허, 말조심해야지, 애송이. 년이라니? 우리의 소중한 팀원인데.”
“됐고. 방금 한 거. 치유 능력 아닌가? 헌터 은퇴한 것들이 지금 헌터 능력을 사용해? 협회장 직할 관리부장으로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데?”
“넘어갈 수 없으면?”
오싹.
장길수가 답한 직후.
그의 몸체 주변에 몽둥이를 든 도깨비 형상들이 더 나타났다.
그 크기는 흑염룡처럼 작지만,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쩌려고?”
“장길수 당신도 헌터 은퇴했으면서 지금 헌터 능력을 사용하는 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는 건가?”
“그래서. 어쩔 거냐고. 애송아.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건가? 기억 안 나? 네놈이 막 헌터계에 발 들이밀었을 때.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나한테 호되게 당하고 오줌까지 지렸던 거? 많이도 컸네?”
“…….”
강만식은 주변 반응을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관리부장이라는, 헌터계의 최고 실세에게.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치부를 들킨 게 여간 불편한 모양이었다.
“관리부장으로서…….”
역시, 꽤 충격은 있는 듯하다.
말을 더듬기까지 시작했다.
“은퇴한 헌터들이… 능력 사용한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특별한 사유도 없이 능력을 사용하는 건 명백히 헌터관리법 위반…….”
“글쎄요.”
그 순간, 출입문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잘 아는 목소리다.
바로 태강 길드의 본부장.
신동원이다.
유니폼을 입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말끔한 정장 차림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우리는 우리 고객님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능력을 사용한 건데, 그게 문제가 크게 될까? 강만식 길드장.”
“……신동원 길드장.”
“아니지. 길드장은 이미 3년 전에 관뒀으니까. 호칭 제대로 하셔야지. 본부장님이라고. 나 태강 그룹의 후계자잖아?”
“아까부터 고객님, 고객님 그러는데. 무슨 개소리를…….”
팔랑.
신동원은 종이 한 장만 보였다.
저 종이는 여기에 오기 전, 내가 사인했던 그 계약서다.
태원 서큐리티의 정예팀이 인질을 구하는 특수부대원이라면.
지금 신동원의 모습은 정식 영장을 보이며 수사 협조를 요청하는 점잖은 검사처럼 보였다.
“내용 전부는 말할 수 없으니까 요점만 짚을게. 강만식 길드장. 잘 들어. 의뢰인 윤도원을 갑이라 칭하고, 태원 서큐리티를 을이라 칭한다.”
“뭐?”
“을은 갑이 별도 계약 해지를 요청할 때까지 성심성의를 다하여 갑의 안전을 보장해야만 한다. 갑이 선택한 경비 상품은 ‘스페셜 특+ 코스’. 이용료는 월 50억.”
이 사기꾼이……?
그게 월 50억짜리 계약이었다고?!
“저기요…… 아저씨. 50억이라니.”
“그러게 계약할 땐 내용 읽어 보고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도원 씨. 아니, 고객님. 그래도 우리 고객님은 월 50억쯤은 충분히 납부 가능하시니까 문제없으시잖아요? 저것들이 있는데.”
내 뒤에 펼쳐진 게이트를 가리키며 한 답이다.
이용료를 저걸로 받아먹겠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우리는 경비 업체로서, 의뢰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능력을 사용한 거 아니야, 강만식 길드장. 자네도 알고 있잖아? 은퇴한 헌터라고 해도. 특별한 경우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대부분 그 특별한 경우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고.”
강만식이 신동원에게 말한, ‘특별한 사유도 없이 능력을 사용하는 건 명백히 헌터관리법 위반.’의 정체가 저것이었다.
“웃기는군.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사용할 수 있지. 단, 그건 개인에 한해서다. 저기 장길수나 저년이 생명에 위협을 느꼈어? 아니잖아?”
“나 참. 최현민 그 늙은 너구리는 왜 너같이 무식한 놈을 신뢰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뭐?”
“헌터관리법에 명시된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게. 개인과 사람의 생명만이라고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거든.”
“지금 뭐라는…….”
“의뢰인이 우리에게 거금을 주고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의뢰를 했는데. 너희들이 지금 그걸 망쳤잖아? 돈은 받고 안전은 보장 못 하면 어떻게 되겠어? 우리 태원 서큐리티라는 기업 생명이 위태위태하잖나? 게다가 의뢰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대가 헌터. 그러니 어떡해? 같은 헌터의 능력으로 맞서야지.”
솔직히.
기업인이라면 연신 어려운 말만 쓰고, 생각하는 수준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신동원이나 나나 크게 다를 부분이 없다고 느껴졌다.
저걸 저렇게 유치하게 끼워 맞출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따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논리가…… 청문회에서 통할 것 같아?”
청문회?
아무래도 은퇴한 헌터가 일상생활에서 능력을 사용하다 적발되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청문회를 하는 모양이었다.
“뭐,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없는 소리라고 하겠지. 그런데 내가 누구야? 태강 그룹 후계자야. 우리 법무팀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커버 가능한데? 명시를 명확히 하지 않은 협회 책임이지, 우리 책임은 아니거든.”
“…….”
“그리고 월 50억짜리 거금을 들인 윤도원 씨는 우리의 VVIP 고객님. 정말 말 그대로 목숨 바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존재거든.”
이제 계약서를 고이 접어서 재킷 안 주머니에 넣고.
여유만만한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마치 자신이 방패가 되는 듯이, 내 앞을 든든하게 지키는 중이다.
신동원은 다시 강만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탓에 난 신동원의 등만 쳐다보게 된 꼴인데.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신동원의 등이…… 이렇게 믿음직스러웠나?’
저 재벌 아저씨한테 이런 신뢰를 다 느끼다니.
내가 내색은 안 했지만, 강만식과 그 부하들에게 당한 것들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던 건 확실하다.
신동원이 강만식에게 선고하듯, 말했다.
“더 할 거야? 그러면 우리도 진심으로 맞설 건데. 나까지 합세해서.”
“…….”
“네가 데리고 온 놈이 네가 거느린 관리부원들이지? 나도 늘 궁금했는데. 관리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때? 해볼래? 네 관리부원 대 나의 태원 서큐리티 정예팀.”
“저놈이 협회장 금고를 털고 문서를 가져갔다. 우린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웬일로 강만식이 꼬리를 내리는 듯한 말을 했다.
꼭 사나운 개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신경전을 벌이다가, 질 것을 예상하고 꼬리를 마는 것과 같이 보였다.
“그럼 훔친 문서만 돌려주면 되겠네?”
“아니지. 헌터가 감히 협회장 금고를 턴 것은. 중범죄. 헌터법 재판까지도 받아야 하지. 우리가 체포하고 협회로 데려가야지.”
“나, 참. 정말 저렇게 멍청한 놈이 최현민 옆자리에 있다니.”
신동원은 다시 계약서를 꺼냈다.
“어이. 이 계약서의 의미 몰라? 우리에게 의뢰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냐고.”
“……설마!”
그제야 강만식은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다.
“그래. 헌터는 협회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계약은 할 수 없지. 그런데도 그냥 했다는 건?”
“저놈 정식 헌터가 아니었다고?!”
참 빨리도 알아차리네.
강만식은 여태껏 내가 정식 헌터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