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음지에서 양지로 (4)
하지만 최현민의 명령에 강만식은 그저 턱을 긁적이기만 했다.
“그 꼬맹이 부산에 있지 않습니까. 데리고 와서 역추적하라고요?”
“응. 당장.”
“프로젝트는 어떡하고요?”
“잠시 중단한다. 그리고 자네 말이야.”
최현민은 다리를 꼬며, 훈계하는 듯한 손가락질을 다시 보였다.
“내가 자네에게 관리부장직을 준 게 이럴 때 쓰라고 준 거 아닌가? 왜 썩히지? 관리부원까지 전부 풀어.”
“협회장님이 신중하게 활동시키라고 하셨잖아요. 대외적으로 자주 노출돼서 좋을 것 없는 조직이니까.”
“지금은 필요할 때잖나? 정황도, 증거도 포착한 지금 신중해야 할 일이 뭐가 있지? 그 집만 덮치면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데.”
“3년 동안 저희 추적을 피해 온 전력이 있다는 건, 그만큼 도망에는 귀재란 뜻 아닙니까? 거처만 알아냈을 뿐, 신원은 모르는 상태이니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거죠.”
“자네 부원들 능력을 못 믿는 건가,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실력들인 건가?”
“…….”
강만식은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느 쪽도 아니지만, 괜히 대답하면 할수록 이 의미 없는 말싸움을 지속하는 게 그저 싫었을 뿐이다.
“나 협회장이야.”
최현민의 나지막한 한마디.
정말 많은 뜻을 품고 있는 협박이었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협회장인 자신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란 강경한 말이었다.
결국, 강만식은 마지못해 답했다.
“알겠습니다. 꼬맹이 데리고 오죠.”
“얼른 시작해.”
아무리 헌터 중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쥔 강만식이라고 해도, 결국 협회장은 협회장.
계급의 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사태를 고집부려서 강만식에게도 좋을 건 없다.
현재로선 최현민이 가장 믿는 게 강만식이지만, 그만큼 가장 경계하는 것도 강만식.
강만식이 수가 틀리는 모습을 보이면 언제든지 내치고, 다른 녀석을 데리고 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게 저 늙은 너구리, 협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강만식은 이번에 협회장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시간 얼마 없어. 서류를 가져간 놈들이 무슨 작정인지 아예 모르니까. 싹을 피우기 전에 끊어야 해.”
협회장실을 나서는 강만식을 향해 지그시 압박을 넣는 최현민이었다.
“알죠.”
강만식은 협회장실을 나서면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
이지은은 신보미로부터 윤도원의 계획 전부를 전달받았다.
충격적인 소식에 놀랐지만, 옆에 있는 정다훈을 위해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윤도원이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놀라운 게 아닌, 그걸 정다혜가 허락했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요! 나머진 알아서 할 작정인가 봐요.’
신보미의 강조였다.
‘그게 어렵진 않은데…….’
하지만 이지은에게도 걸리는 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편의점에서 정다훈은 누나를 만나고 싶지만, 누나와의 약속을 어겨서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도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윤도원의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정확히 알아야만 했었다.
이에 이지은은 신보미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보미야. 계획 실행하는 거 최대한 늦게 해 달라고 해줘. 내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이요?’
‘중요한 거니까 그러겠지?’
‘얼마나 늦게요? 우리 쪽도 상황이 좋진 않은데.’
‘최대한 빨리 해결할게. 며칠까지 미뤄지지 않도록.’
이지은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왜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까지도.
전부 알아내야 한다.
‘알겠어요. 일단은 그렇게 전해둘게요.’
‘고마워. 그럼 나중에 연락해.’
신보미와의 연락을 끊고, 이지은은 곧장 웃는 얼굴로 정다훈에게 물었다.
이지은도 자신이 이렇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따스한 미소였다.
“다훈아, 배 안 고파?”
“어어… 고파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정다훈은 곰곰이 생각한 뒤, 내놓은 답은 맥이 빠졌다.
“그 아저씨도 없으니까…! 라면이요!”
그 아저씨라 하면 강만식이다.
정다훈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
그런데 억압에서 해방되고 찾는 음식이 라면이라니.
사정을 알고 있긴 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조금 더 특별하고 맛있는 게 좋지 않아? 계속 라면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돈가스 어때?”
보통 정다훈 나이대에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돈가스라서 슬쩍 물었지만.
“저한테 최고로 특별하고 맛있는 게 라면이에요.”
정다훈은 확고했다.
“대신, 컵라면 말고 그 아저씨 없으니까 끓여 먹는 라면 먹고 싶어요. 계란 넣고 끓인 거. 누나랑 헤어지고 한 번도 못 먹었어요…. 그런 라면.”
‘차라리 이게 나으려나?’
애초에 굳이 물어본 이유도, 어떻게 약속을 어겼는지 정다훈이 스스로 말하기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정다혜와의 추억이 서린 음식과 함께라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 그러자. 같이 나갈래? 라면 종류 많잖아. 뭐 좋아하는지 내가 모르니까.”
“나가도 돼요……? 그 아저씨가 알면 큰일인데.”
“어차피 바로 못 와. 서울 갔거든. 바로 온다고 해도 최소 3시간은 걸려.”
“그럼…….”
정다훈은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 살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꼭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정다훈이 이렇게 발랄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낯설 정도였다.
“좋아요!”
“나가자.”
이지은은 그렇게 정다훈을 데리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
정다혜는 정말 몇 분도 걸리지 않아 복사를 해 왔고, 그 사이 신동원이 비서에게 지시한 차도 준비되었다.
신동원이 직접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차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한 번 마셔 보시죠. 커피보다는 훨씬 나은 거니까.”
“예, 감사합니다.”
향을 맡아봤지만 무슨 차인지 알 수 없었다.
신동원의 말대로 주로 커피를 마셨지, 차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나였기에 아무리 고급 차를 내어줘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에 지나지 않았다.
슬쩍 정다혜의 표정을 살피니,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자, 그럼 복사해 온 그걸 이제 보여줄 차례 아니실까요? 처음부터 그거 보여줄 생각 아니었나? 복사까지 해 온 것은 일종의 담보…… 같은 게 아닌가?”
“잘 아시네요.”
난 그렇게 신동원에게 중국 협회 비문 복사본을 건넸다.
제목을 보자마자 신동원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분명하게 놀랐다고 말하는 중이다.
그럴 거다.
나도 처음 봤을 때 같은 반응이었으니까.
신동원은 그렇게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서류 한 문장, 한 문장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고.
우린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겸, 차나 음미하고 있었다.
“저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이거랑 연관이 있는 겁니까?”
드디어 그가 서류 내용 전부를 확인한 뒤에 물었다.
“네.”
“이걸 이용해서 뭐 어쩌시려고?”
“어쩌긴요. 아시다시피 저흰 정식으로 협회 인증을 받은 헌터가 아닙니다. 정식 헌터로 신분을 전환하면서, 그 문서를 가지고 협박할 거거든요. 협회장이 어린이를 던전으로 밀어 넣을 생각이라는 거. 외부에 알려지기 꺼려할 거 같은데요.”
“확실히… 협박하기엔 이만한 카드가 없죠. 이건 말 그대로 비리의 증거니까. 게다가 이 서류는 중국 협회 비문. 외부에 알려지면 중국 협회 항의도 감수해야 하니까요.”
“저희도 어떻게 중국 협회 비문을 한국 협회장이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한창 설명하려고 하던 순간.
“하하하하, 정말 정식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신동원은 우릴 비웃는 것만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 말씀은, 본부장님은 왜 중국 협회 비문이 한국 협회장에게 있는지 알고 있단 말로 들리네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나도 한때 길드장이었는데.”
“알려주실 수 있나요?”
“뭐, 어차피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니까 내가 말해도 상관은 없겠지. 헌터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자원 뻥튀기 기술이 개발되면서 세계의 경제 강대국 기준이 바뀌었으니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 세계 협회들은 해커까지 고용해서 서로를 털고 털리는, 시궁창 형태의 사이버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러지요. 자, 그럼 여기에서 문제. 국가가 보유한 던전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엇을 뜻하는 거죠?”
“복제하는 에너지가 많아진다. 즉, 정말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게다가 복제한 에너지가 넘쳐, 팔 수도 있으니 절대적으로 국가의 힘이 된다.”
“그렇죠. 그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보유한 던전의 개수를 숨기고, 실상 뒤에선 실 보유 던전 개수를 알아내기 위해 사이버 전쟁도 펼치니까요.”
“…….”
역시, 내가 까맣게 몰랐던 사실이다.
그저 평온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던 세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선 그런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게.
“한국 협회는 아마 땅이 넓은 중국 협회를 털다가, 이걸 발견하고 습득한 거겠죠. 안 봐도 뻔하지.”
그렇다면 최현민이 저 비문을 입수한 경로도 납득은 된다.
신동원은 이제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이용해서 최현민 그 늙은 너구리를 협박하려면, 그 전에… 결국 동원 씨와 다혜 씨가 원하는 건 정식 헌터로의 신분 전환인데…….”
“그렇죠?”
이에 신동원은 검지로 나와 정다혜를 번갈아 가며 지목하더니, 표정이 변했다.
또 불편한 기색의 그 표정이다.
“듣다 보니 이건 확실해지네요? 내가 도울 이유가 없어진다는 거.”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태도가 갑자기 변하자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다 예상 속에는 있던 일.
그저 이렇게 급변할 줄은 몰랐던 것뿐이다.
“내가 두 사람을 돕는다고 해서. 나한테 얻는 게 없지 않나요? 이러면 도울 이유가 없어지는데? 두 사람이 정식 헌터로의 신분 전환이 되면, 두 사람도 이제 나를 찾지 않을 거니까. 그렇다면 결국엔 태강 그룹의 후계자인 나를. 이용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 누가 기업인 아니랄까 봐.
예측도 빠르다.
하지만 그의 예측은 완벽한 오판.
나는 그를 일회성 기회로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그의 이면성은 지적하고 싶었다.
“본부장님. 아까는 분명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며, 들어보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말 그대로 들어보겠다고 했지. 내가 언제…….”
신동원은 잠시 고개를 숙여, 찻잔 가장자리를 매만지다가.
이내 다시 눈도 깜빡이지 않는 그 시선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해 달란 대로 해 준다고 했습니까?”
오호라.
조금 세게 나오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