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음지에서 양지로 (2)
“이 상황에 신동원 길드장은 왜……?”
“이제 길드장 아니잖아. 헌터 자격도 박탈당한 양반이니 신동원 씨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아무튼, 그 사람은 왜요?”
“우리의 든든한 백이 될 사람이니까.”
“엥……?”
당연히, 둘은 내 생각이 정확히 뭔지 모르니 공감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생각해 봐. 신동원 씨가 겪은 상황이라면, 평생 두고두고 협회장을 증오할 것 같지 않아?”
“그렇기야 하죠…? 그거 하나 때문에 헌터 자격 박탈되고 평생 스스로 능력을 억제하며 일반인으로 사는 거. 생각보다 엄청 괴로운 일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접촉하자고. 마침, 신동원 씨는 우리한테 도움도 받았잖아?”
“설마 예전에 저희가 서류 몰래 건넨 거 말하는 거예요?”
“응.”
신보미와 정다혜가 몰래 놓고 간 서류 덕분에.
당시 길드장이었던 신동원은 그 서류를 근거로 협회장과 협상을 할 수 있었고.
가지고 있던 길드 부지를 빼앗길 뻔한 위기에서 헌터 자격 박탈로 끝이 났다.
흔히들 말하는, 싸게 먹힐 수 있었던 협상이었다.
“게다가 너희들 얼굴 모른다고 했잖아? 내가 도와준 거라고 하면서 그때 얼굴 보여주면서 얘기하면, 통하지 않겠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닐 텐데……. 명색이 대기업 총수인 사람인데. 우리 생각대로 움직일까요?”
“움직이게 만들면 되지.”
나도 그 생각 안 한 거 아니다.
이제 헌터 신분을 벗은 그는 아버지의 기업인 태강 그룹의 후계자로서 재계의 주요 인사로 사는 중이다.
그리고 대기업 오너의 직계 가족으로 자라왔으니,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이익만을 보고 움직이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카드가 존재했다.
만나서 협상만 하면 되고, 난 그 협상에서 저쪽도 원하는 걸 얻고, 나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단 확신이 있다.
“신동원 씨에 대해서는 잘 몰라?”
“…모르죠. 그 뒤로는 저희가 따로 관찰할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정다혜는 자신 없게 답했다.
“그래? 괜찮아. 혹시 알고 있을까 싶어서 물은 것뿐이니까. 자, 그럼 다혜야. 태강 그룹 본사는? 가 본 적 있어?”
“네, 가 본 적은 있어요. 안까진 들어가 보진 않았어도 회사 주차장이나 건물 입구 같은 건 지나다니면서도 쉽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그거면 됐어. 어차피 태강 그룹의 아드님이신데, 헌터 은퇴했다고 집에서 빈둥거리겠어? 본사에서 한자리하고 있겠지.”
헌터가 아니면 전부 일반인으로 묶어서 얘기하지만, 신동원의 경우는 다르다.
국내 재계의 구성원이니,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가 있는 인물.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을 통해 ‘신동원’ 세 글자만 입력해도 사진까지 붙어서 인물 정보가 바로 나왔다.
“오호, 지금은 태강 그룹 본사 본부장이셔?”
역시나, 로열패밀리답게 예상대로 한자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태강 그룹 본사로 가면 만날 수 있단 소리다.
짝-!
손뼉을 치며 모두를 집중시키고, 상황을 정리했다.
“보미 넌 여기에서 움직이지 말고 지은 씨에게 자초지종 설명하고. 그리고 다혜 너는 지금 당장 나랑 태강 그룹 본사로 가자.”
“지금요……?”
“응. 바로 시작해야지. 시간 얼마 없다.”
내가 살던 집의 밖에는 이미 SF 길드 헌터들이 진을 친 상황.
최대한 속전속결로 기반을 다져놓고, 양지로 가는 D-day를 맞이해야 했다.
“아니, 너무 급한 거 아니에요?”
신보미도 그 부분을 지적했다.
“상황이 급하니까 어쩔 수 없지. 나도 이렇게 서두르고 싶진 않았어. 시작하자.”
그렇게 신보미는 정다혜의 집에 놔두고, 나와 정다혜만 외부 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정다혜가 포털을 만들 때, 내가 서둘러 말했다.
한가지 잊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참, 다혜야. 태강 그룹 본사로 가는 길 열기 전에, 내 집부터 들리자. 가지고 갈 게 있어.”
“네.”
***
이지은은 정다훈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차는 이미 강만식이 가지고 갔다.
그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지만,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말 안 해도 너무 쉽게 알아차렸다.
운전 중에 신보미가 협회장을 한 방 먹였단 소리를 하긴 했고, 강만식의 휴대폰으로도 격분한 최현민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눈치껏 아는 게 어렵지 않았다.
호텔에서 정다훈과 함께 무거운 공기 속에서 있던 그때.
‘언니.’
드디어 문제아의 연락이 시작됐다.
“뭐야! 도대체?!”
하도 기다린 연락이었기 때문일까.
이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정다훈은 몸을 발작하듯 움찔거리며 놀랐다.
“아, 미안해. 다훈이 너한테 한 거 아니야.”
“…네.”
마음을 가다듬고, 이지은은 신보미와 대화를 시작했다.
‘뭐야? 사람 잔뜩 불안하게 해 놓고 왜 이제야 연락하는 거야?’
‘그게 말이에요. 이거 지금 전적으로 도원 오빠가 시켜서 하는 건데요…….’
분명히 오후쯤에는 장난기 가득하게 느껴졌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네. 무슨 일인지 알려주려고 연락했어요.’
그렇게 신보미의 설명은 시작됐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이지은은 눈동자가 커지며.
마지막에 이르러선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뭐……? 그럼 다훈이를 여기로 데리고 온 이유가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려고 할 생각이었단 거야……?’
이지은도 드디어 실태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윤도원의 계획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아직 몇 단계 더 남아있기에 신보미는 그것을 강조하며 설명했다.
***
[너 진짜 이러는 거 아니야.]
태강 그룹 본사 건물 주변에 도착하자마자.
흑염룡은 눈을 몬스터처럼 무섭게 뜨며,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지고 온 물건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
난 정다혜에게 놓고 온 물건이 있으니 그걸 챙기기 위해 집에 잠시 들리자고 했다.
그리고 챙긴 물건이 바로 초월석이다.
‘네 상황 이해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놈의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초월석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소비하지 말라고! 또 초월석 필요하면 애써 만든 게이트 소모할 거잖아!]
‘그런 의도 아니다. 지켜봐. 이 일을 해야만 우리가 그렸던 궁극적인 목표로 도달할 수 있으니까. 명령이야. 넌 옆에서 당분간 입 다물고 있어. 내가 입 열라고 할 때부터 열어.’
하지만 이 부분은 나도 양보할 수 없는 일.
흑염룡에겐 가혹하게 느껴질 명령이지만…….
애당초 명령이란 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내려지겠는가?
이건 내가 눈치가 조금 보이긴 해도 애써 무시해야 했다.
“가자. 다혜야. 양지로 가는 관문이다.”
“네.”
난 정다혜를 이끌고 당당하게 태강 그룹 본사 입구를 당차게 열었다.
그리고 직행한 곳은 바로 1층 로비에 있는 안내 데스크.
데스크로 다가가자 안내 직원이 일어나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신동원 본부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자리에 계시죠?”
직원은 내 인상착의를 스캔하듯 훑고서,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은 유지한 채로 되물었다.
“미리 약속하고 오신 건가요?”
“아니요.”
예상한 일이다.
국내 대기업 회장의 아들인데 이렇게 쉽게 만날 리가 있을까.
“본부장님 안 계십니다.”
이제 직원은 내게 시선을 떼며 답했다.
마치 그 행동은, “잡상인 얼른 나가세요~”라고 느껴질 정도로 매정하고 감정도 없었다.
“에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미리 약속한 거냐고 물은 거 아니에요?”
“안 계십니다.”
내가 집요하게 물어 늘어져도 한사코 직원은 앵무새처럼 “안 계십니다.”만 반복했다.
이것도 어차피 예상한 일.
그렇다면 신동원이 반응하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좋아요, 미리 약속한 게 아니라고 너무 냉대하시네. 그럼 대신 이 말씀만 전해주시죠. 3년 전에 본부장님 병원에 계실 때.”
병원이란 단어에 직원은 움찔했다.
3년 전 병원이라면 이 회사 직원은 물론, 전 국민이 다 아는 사건이다.
신동원의 음주운전.
게다가 지금은 대기업 차기 총수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건 회사 이미지 차원에서도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사고가 있었던 일은 사실이지만 회사 내부에선 절대 언급하면 안 되는 사고라고 여기는 중일 게 분명하다.
“그때 본부장님이 서류를 하나 받은 일이 있을 거예요. 누가 준 건지도 모르는 서류. 그 서류 제가 준 거라고 해 보세요.”
“무슨 소릴…….”
“어서요. 데스크 밑에 있는 그 전화기 들어서 얘기해 봐요. 그럼 반응 달라질걸요? 본부장님 지금 본사에 있는 거 알고 이러는 거라니까.”
애초에 본사에 없었다면, 약속을 잡았냐고 묻지도 않았을 게 뻔하다.
오늘 누군가가 그를 찾아올 약속이 있었으니, 본사에서 기다리고 있었단 뜻이 되니까.
“어서요?”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직원을 향해 턱짓으로 전화기를 가리키며 강조했다.
빨리 저 전화기 들어서 보고 하라는 내 압박이다.
“안 하시면 본부장님 곤란해질 텐데.”
“…잠시만요.”
못 이기는 척, 직원은 전화기를 들었고.
“아, 네. 여기 데스크입니다. 본부장님에게 연결 부탁드립니다. 네? 아 그게…. 본부장님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비서 중 누군가가 먼저 받은 모양이다.
명색이 대기업이니, 비서가 없을 리가 없지.
난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슬슬 입질 오기 시작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한참 신동원에게 보고를 하던 직원이 내게 물었다.
“윤도원이라고 합니다.”
“옆에 계신 분은……?”
정다혜는 그 순간 내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철저하게 이름과 얼굴을 숨기며 활동해 왔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공개해도 괜찮냐는 질문을 담은 표정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라는 손짓만 보였다.
“정다혜요.”
우리의 이름을 알아낸 직원은 다시 보고를 시작했고.
침묵은 꽤 오래 유지되었다.
실제로 침묵이 이어진 시간은 약 2분 남짓이지만, 체감상으론 5분이 넘을 정도로 길었다.
드디어 한창 보고하던 직원은 전화기를 내려놨다.
둘이서만 조용히 통화를 이어갔기에, 정확히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직원은 데스크에서 나오더니, 목소리가 변했다.
“따라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우릴 냉대했던 그 직원은 사라지고, 나도 이 회사 임원이라도 된 것처럼.
친절, 행복, 기쁨 모든 걸 다 담은 표정이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건지 신기할 정도다.
난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로 직원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한쪽 손바닥은 슬쩍 펼쳐서 정다혜 쪽으로 들이밀었다.
탁.
정다혜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도록 살포시 하이파이브를 쳤다.
그렇게 도착한 본부장실.
본부장실 안에 있던 비서가 문을 직접 열어줬고, 드디어 신동원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낱 서민이었던 내가 대기업 후계자와 만나는 날도 겪는다.
“윤도원, 정다혜 씨라고 했죠…? 처음 듣는 이름들인데…. 일단 앉아요. 나도 궁금한 거 많으니까.”
다행히, 저쪽도 협조적인 태도다.
‘이거 얘기가 쉽겠어.’
정말 거의 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