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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흑염룡이 산다!-23화 (23/200)

§ 23화. 은둔 고수를 위하여 (2)

늘 말하지만, 그렇게 유용한 게 있으면 제발 좀 미리 말했으면 좋겠다.

왜 늘 이렇게 상황이 닥쳤을 때만 알려주는지 당최 그 속을 모르겠다.

‘아닌가… 지금이라도 안 게 다행인가.’

하기야, 흑염룡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인가.

차라리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마치, 물이 반 정도 든 컵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네, 반이나 있네와 같이 마음가짐의 차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흑염룡에게 그 방법을 묻기로 했다.

‘어떻게 볼 수 있는데?’

[내가 네 능력 보여주는 것처럼. 능력을 보고자 하는 사람 이마에 손을 대고 조금만 집중하면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지.]

‘정령은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애초에 헌터들 능력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잖아. 그러니까 가능하지. 근데 그러려면 네가 그 사람 앞에 있어야 해.]

‘그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어제 같은 경우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지 않았던가?

오늘도 같은 방법을 쓰면 된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엘리베이터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

때로는 원시적인 방법이 획기적인 방법이 되곤 한다.

그 순간, 내 뒤를 지나가던 과장님이 내 책상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쓰고 있어?”

“아, 아닙니다!”

난 황급히 사직서를 가렸다.

본래 내 계획은 강만식이나 박우민의 인사기록부만 확인한 다음에 바로 이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바꿔야겠다.

바로 흑염룡이 강만식의 능력을 알아낸 뒤.

즉, 오후로 미뤄야겠다.

사직서는 일단 고이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박아 넣었다.

‘부탁한다, 흑염룡.’

[알았다.]

***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이다.

난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마다 안을 유심히 살폈다.

어제는 강만식이 타고 있는 걸 모르고 탔지만.

오늘은 그것을 철저하게 노리고 탈 거니까.

그렇게 계속 기다리던 중이었다.

[벌써 1시 넘었어. 점심시간 끝났다고.]

오늘은 강만식이 엘리베이터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뭐가 그렇게 이상해?”

혼자 중얼거릴 때, 조금 늦게 복귀하신 과장님을 1층에서 마주쳤다.

“아,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그래. 너도 사람 많은 곳 갔나 보네? 늦게 온 거 보니.”

“네, 죄송합니다.”

사실 여기서 시간 축내느라 늦은 거지만, 그냥 그렇다고 하기로 했다.

“올라가자.”

또 하필이면 과장님의 도착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말았다.

그렇게 난 거절하지 못하고 과장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이 순간, 이 엘리베이터에 강만식이 타고 있기를.

그러나 나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오늘은 아무래도 길드에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내일모레면 강만식과 이지은은 전국 일주를 나선다.

존재하지도 않은 던전을 찾기 위해서.

그 둘은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아무래도 그 준비를 하느라 길드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아쉽지만, 나중에 알아내자.’

흑염룡에게 말했다.

어차피 강만식은 나중에 또 마주치게 될 사람.

굳이 지금 목메서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 시간 허비하는 것보다 넌 얼른 여기 관두고 능력 레벨 올리는 게 훨씬 낫지.]

흑염룡도 그쪽을 내심 바라는 중이었다.

그렇게, 과장님과 함께 사무실로 복귀했다.

과장님이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자리에 앉았을 때다.

난 서랍에 고이 모셔뒀던 사직서를 꺼내, 과장님 앞으로 다가갔다.

“과장님.”

“응, 도원아. 왜?”

“이거요.”

난 봉투에 담긴 사직서를 건넸다.

봉투 겉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일반 흰색 봉투였지만.

과장님은 내용을 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안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수리해 주세요.”

“흐음…….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사정이 조금 생겨서요.”

“사정? 무슨 사정?”

“개인 사정이요.”

“아니, 그래도 이런 시국에 관두는 게 너무 이상하잖아. 초월석 없어져서 이제 곧 인플레이션 심각하게 올 텐데, 직장을 때려치우다니?”

남들 눈에는 미친 짓으로 보이기 충분하다.

사람들은 지금 단기적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물가가 이제 오를 거니까, 지금 다니는 직장 사수하자!’라고 마음먹고 있을 터다.

난 이지은에게 들었던 말을 인용하기로 했다.

“석유, 전기, 수도 모든 게 비싸지는데… 과장님 출근하실 때 걸어서 오세요?”

“…아니지?”

“네, 이 사태는 장기화 될 게 뻔하고. 해결 방안도 없을 것 같은데. 그때 되면 출근할 돈도 없지 않을까요? 저는 지하철 타고 오는데… 요금이 100배는 넘게 오를 거라고 하더라고요. 지하철도 결국엔 전기로 움직이잖아요”

“…….”

과장님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관두려고요. 사정이 생기기도 했고.”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관둬도 되잖아? 왜 꼭 지금 관둬?”

[너 그래도 일 잘했나 보다. 과장님이 저렇게 말리는 거 보면.]

‘그런가 보네. 나는 몰랐지만.’

과장님도 그저 고집으로 내 사표 수리를 거부하는 건 아니다.

나 하나가 빠지면 피곤해지고, 업무가 수월하지 않으니까 저러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나의 계획이 있고, 지금은 그 계획을 실천하는 게 먼저다.

“그때 관두나 지금 관두나… 결국엔 똑같지 않나요. 어차피 관두는 건데.”

“다르지… 후임 들어올 수 있으니까. 인수인계는 하고 가야지.”

“죄송합니다.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아무리 퇴사가 협의가 아닌 통보라지만… 이건 너무 경우가 없는 거 아닌가? 평소 도원이답지 않게 왜 그래?”

“말 못 할 사정이라 그래요. 저도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관두는 건 회사원으로서 천하의 몹쓸 짓이지만.

지금은 이기적으로 변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론, 사람은 살다 보면.

남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강행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난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과장님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부탁했다.

“수리 부탁드립니다.”

“…….”

과장님은 한참이나 날 위아래로 훑더니, 사직서를 집어 들었다.

“그래, 네가 근무하면서 말썽 피운 적도 없고, 성실하게 한 녀석인데. 그런 네가 이렇게 막무가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목소리는 쾌활하지 않지만, 결국 그는 받아들였다.

난 이래서 평소에 과장님을 좋아했다.

나 같은 부하 직원을 단순 부하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인격체로 대해줬으니까.

내가 겪었던 이전의 막장 회사에서는 부하를 그저 인권도 없는 노예로 부리는 상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 계신 과장님은 그렇지 않아서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런 과장님에게 막판에 뒤통수를 친 느낌이라 나도 기분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단을 내릴 건 내려야 한다.

“네, 감사합니다.”

“네 퇴직금이랑… 잔여 연차에 따른 수당은 내가 처리해줄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 그거밖에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단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후우, 그래. 가 봐.”

그렇게 마지막은 과장님의 한숨으로 끝이 났다.

***

오늘부로 SF 길드에서 퇴사했다.

퇴사하면서 정리한 짐 상자를 집에 던져 놓고, 식탁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이지은에게 온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먼저 연락하기 전엔 아무런 연락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도 신경은 껐다.

대신, 다른 사람의 번호를 보고 있었다.

“신보미… 정다혜…….”

자신과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연락하라고 소개해준 사람.

특히 신보미는 커넥터로 이지은과 연결된 사람이라고 했다.

고로, 이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신보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

느긋하게 흐르는 통화연결음에 맞춰,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업무 목적이 아닌데 낯선 사람에게 통화를 거는 것.

얼마 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몰랐다.

뚜르르르…….

“이상하네, 바쁜가.”

[왜? 안 받아?]

“응. 이따 다시 해야겠네.”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여보세요?!

휴대폰에선 목소리 톤이 상당히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지은 씨 소개로 연락드리게 됐는데.”

-아~ 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일단 목소리는 합격.

합격이란 뜻이, 목소리가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졌을지 유추하는 거다.

보통 사람의 목소리엔 그 사람이 가진 성격도 슬쩍 보이는 경우가 있다.

나도 회사원 생활을 하다 보니 느낀 거다.

전화 태도가 불량하면 십 중 여섯 이상은 그 사람의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신보미라는 이 사람은 통화하는 목소리가 편안한 것이, 꼭 내가 어느 친절한 고객센터 상담원과 전화하는 느낌이다.

하긴, 이지은이 처한 상황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니.

그만큼 성격이건 실력이건.

전부 보장이 된 사람이란 뜻 아니겠는가?

난 그렇게 편안한 통화를 이어나갔다.

-안 그래도 언니가 연락 오면 같이 밥이라도 먹으라고 했는데. 지금은 점심이 지나 버렸으니까. 괜찮으시면 만나서 얘기하실래요?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말씀 나누시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니 내가 다 고마웠다.

“아, 그럴까요, 그럼?”

-제가 어디로 갈까요?

“네? 제가 가도 되는데.”

-언니한테 들었어요. 차 없으시다고. 그러니까 움직이기 불편하시잖아요. 제가 가는 게 낫죠.

그 말은 신보미도 차가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네, 제가 그럼 다혜도 데리고 갈게요. 어차피 다혜한테도 연락하실 거였죠?

고맙게도 이지은이 미리 모든 것을 알려준 것 같았다.

하긴, 나와 흑염룡이 정신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이지은과 신보미도 그런 상태니까 전부 전달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리라.

“아, 네.”

-주소 찍어 주세요. 저희가 그리로 갈게요.

“음… 그럼 제가 바로 보내드릴게요.”

그렇게 통화를 끊고 신보미에게 메시지로 주소를 보낼 때였다.

흑염룡이 슬쩍 훔쳐보듯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야, 그 주소 여기 집 아니잖아? 거기 상가 주소잖아?]

“응. 내 집보다 거기서 만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왜?]

“어차피 이 사람들도 이지은한테 들어서 게이트의 존재는 알 거 아냐? 내 집은 너무 좁기도 하고. 상가 쪽이 훨씬 낫지 않겠어?”

[흐음… 그런가. 너무 서두르는 느낌인데.]

“넌 인간에 대해 너무 불신만 가득해.”

[너도 그랬잖아.]

“…….”

그래, 그랬지.

이지은을 알기 전까진.

세상에 믿을 사람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나의 생각을 확실하게 증명시켜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이지은이 소개해준 사람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가자.”

***

“안녕하세요! 신보미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다혜예요.”

상가 건물 앞에서 두 여성분과 조우했다.

신보미는 꽤 발랄한 성격으로 보였고.

정다혜는 낯을 조금 가리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공통점으론 둘 다 이지은만큼이나 미모가 빼어나단 점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떡하지? 난 이런 사람을 보면 또 터져 나오는 중2병력을 제어할 수가 없는데 말이지.’

[하지 마. 진짜. 어제의 내상 아직 회복 안 됐으니까.]

‘어금니 꽉 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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