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이게 카론이란 말이냐.”
“네. 그 사람 맞아요.”
“한데 어찌 이렇게…….”
노화된 카론의 주검을 앞에 두고 빅터는 계속해서 질문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안 그랬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에요. 갑자기 저렇게 변하면서 숨이 끊어졌으니까요.”
마지막 상황을 설명하던 나는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기억을 봤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와 카론을 동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 역시 시대의 피해자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와 얘기를 나눴더냐.”
“얘기보다는 기억을 봤어요.”
“기억을 봤다고?”
“네. 죽기 전에 저와 기억을 공유했어요.”
이해가 부족했던지, 빅터는 그레이시를 보며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카론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 특기였잖아요. 정신적인 부분에 다가서는 거.”
그레이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감정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보고 느꼈던 카론의 감정을 천천히 전달했다.
사적인 생각을 배제한 채.
기억하는 그대로만 덤덤하게 말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갔다.
피륙이 지천에 깔린 살풍경한 이곳에서 빅터와 그레이시는 조용히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을 전했을 때엔.
“후…….”
그레이시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그러했듯.
그 또한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참으로 죄 많은 나라로구나.”
나직이 말을 꺼낸 빅터는 찢겨진 로브를 가져와 카론의 얼굴을 덮었다.
* * *
메인 게이트가 무너진 이후, 잔존한 모든 게이트는 스스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대륙에 산재한 마족의 일당을 소탕하는 일뿐.
목숨을 바쳐 거듭난 나는 흩어진 마족을 찾아 남을 생을 거두었다.
해치우고.
또 찾아내 숨을 끊었다.
죽는 게 더 힘들어진 규격외의 존재.
“그사이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의 전투를 지켜보던 술은 하던 싸움을 멈추고 기함을 질렀다.
그게 어디 저 녀석 혼자만의 일이었을까.
한때 적으로 만났던 카리프와 바스코도 곁눈질을 해 가며 전투에 동참했다.
그렇게 쌓인 시체가 너른 평원을 가득 채우고 난 뒤.
“나의 아버지는 이 검술을 가리켜 처형의 검이라고 말씀하셨다. 무스타파류 검술의 오의라고 할 수 있지.”
“이름은 멋있네.”
“후회할 수도 있다.”
“상관없어. 그럴 일 없으니까. 약속대로 난 가만히 있을 거야.”
“이반이라고 했나.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원망하지 마라.”
적들이 사라진 전장에서 마지막 싸움이 이어졌다.
일종의 서열 정리랄까.
피로 물든 대지 위로 카리프의 기운이 폭발하듯 뻗어 나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흐름 속에 소리마저 삼켜 버린 녀석의 검이 반짝거리며 사라졌다.
짧게 이어지는 묘한 침묵.
제자리를 찾아간 카리프의 검이 검집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시작됐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
멈췄던 봇물이 터지듯, 농축된 녀석의 검기는 수백 걸음이 넘는 대지를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이것이 녀석의 저력이었던가.
서로가 떨어져 있던 사이, 카리프 역시 엄청난 경지의 상승을 이루었다.
단지 상대가 나라는 것이 운이 없던 거지.
“너도 많이 강해졌구나.”
녀석의 공격을 막아 낸 나는 들어 올린 해머를 내리며 소감을 전했다.
이제 다시 나의 시간.
슈악―
순간이동으로 모습을 감춘 나는 녀석의 뒤를 잡아 가볍게 해머를 휘둘렀다.
“크윽!”
장난치듯 휘두른 해머 앞에 카리프는 검을 움켜쥐며 경직됐다.
하지만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
“사라센에서 왕 노릇을 하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턴에 당한 녀석을 향해 나는 느긋하게 손을 내밀었다.
“짜증 나는 얼굴이군.”
고개를 돌린 카리프는 얼굴을 구기며 푸념을 내뱉었다.
“네놈도 만만치 않지.”
그런 녀석의 말에 반응한 건 내가 아닌 바스코였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형편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하나.
카론이란 목표를 잃은 두 남자가 한곳에 모인 탓이었다.
이렇게 남은 것도 인연일 터.
나는 정리되지 못한 은원을 여기서 마무리 짓자고 제안했다.
하여 우리는 대결을 펼쳤고.
“바스코 너도 마찬가지야. 이 땅에서 살려면 행동을 바꿔야 할 걸.”
두 녀석 모두 나에게 처참히 농락당했다.
심지어 단 한 번도 반항하지 못한 채 말이다.
“제길, 스턴이라니. 그런 건 반칙 아닌가?!”
“그게 아니면 이길 수 있고?”
“뻐큐.”
바스코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
두 개의 중지를 세운 나는 강자의 여유를 담아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부어 봐. 나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건방 떨지 마라.”
“아니. 그 정도 해택은 줘야 할 것 같은데. 대신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너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끝나면 뒈져 있을 테니.”
말 끝나기 무섭게 핏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끔찍한 살기가 주위를 잠식했고, 지켜보던 병사들은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상태 이상 저항으로 인해 공포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런 잔재주론 나를 어쩔 수 없다.
애초에 공포심이라는 것도 상대가 나보다 강해야 생길 것 아닌가.
바스코는 펼쳐진 안개를 끌어모아 태연히 서 있는 나를 에워쌌다.
무력이 통하지 않으니, 놈은 다른 방식으로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이것도 의미 없는 짓.
“캬악, 퉷!”
“이게 끝?”
원기로 가득한 나의 몸은 눈곱만 한 생명력도 놈에 빼앗기지 않았다.
카리프의 호쾌한 검술도.
바스코의 괴상한 비기도.
대지를 뒤집던 그들의 검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비결이 뭐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거냐.”
“그냥 혈통이 다른 거다. 그러니 헛꿈 꾸지 말고 협조해. 약속은 지킬 테니까.”
그렇게 메인 게이트의 싸움은 끝이 났고.
“이제 브라함으로 가 볼까.”
인마대전을 끝내기 위한 길고 긴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 * *
메인 게이트가 사라지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사라센은 말할 것도 없고.
핵심 정치인을 잃은 브라함 또한 사실상 중앙 정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일 터.
빅터는 내정을 살피기 위해 참모들과 함께 황궁에 잔류했다.
따라서 토벌군을 이끄는 건 나의 몫이 되었고, 브라함과 사라센에 퍼진 마계의 생명체들은 지난 주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종결된 상황.
브라함 황궁에서는 사라센의 재건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생존한 사라센 귀족에게 넘길 이유는 없습니다. 인마대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사라센의 주요거점은 브라함 손에 떨어진 상태였으니까요. 사라센 영토의 절반은 브라함의 관리를 받는 게 정당합니다.”
“그건 맞습니다만, 전쟁의 승패가 완전히 결정 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활동 가능한 사라센 귀족에게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세로 떠오른 두 가지 의견은 이랬다.
사라센은 사라센 손에 맡기자.
다른 하나는 주변 국가에서 분할통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얼토당토 않는 얘기였다.
“애초에 침공을 시작한 것이 사라센 아닙니까. 이제와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라면 전쟁 배상금 먼저 지불하세요. 거기에 마족들을 소탕하는 데 사용되는 경비도 포함해서요.”
지켜보던 나는 답답함을 못 참고 끼어들고 말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더니.
“흐음, 그건…….”
“브라함이 점령한 영지를 제외한다고 해도 잔존한 사라센 귀족이 국가를 재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북부의 땅은 카리프 공에게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남은 건 고작 서부의 영지 몇 개인데, 그걸로 어떻게 사라센을 재건한단 말입니까.”
권리를 주장하는 사라센 귀족에게 쓴소리를 날렸다.
“명맥이라도 유지할 생각이면 서쪽의 영주끼리 소박하게 지내세요.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마시고.”
“크흠…….”
“그리고 카잔은 무슨 권리로 분할통치를 주장하는 겁니까? 당신들이 뭘 한 게 있다고. 하다못해 사라센 땅에 발이라도 들여놓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그건 어디까지나 국제정치 관례상…….”
“됐고요. 이번 인마대전에 힘을 보탠 국가는 브라함과 아리안, 그리고 반투족와 엘브족이 포함된 리베였습니다. 분할통치를 하더라도 이 국가들이 해야 합니다.”
서슬 퍼런 나의 주장에 각 나라의 대표들은 입을 닫았다.
역시 힘이 최고지.
“반대 의견 없으시면 찬성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대륙 최강자의 한마디는 이렇게나 강력했다.
이후 논의는 나의 의견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브라함이 점령한 모든 지역은 브라함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점령되지 않은 서쪽의 영지 네 곳이 사라센의 영토로 인정되었다.
문제는 수도와 북쪽이었는데.
“바빌리안과 수도, 어느 쪽을 택할래.”
“수도를 택하겠다.”
카리프는 자신의 점령지를 포기하고 엘하즈라를 선택했다.
하여 수도와 주변 영지 네 곳이 카리프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남은 것은 북부의 요충지 바빌리안.
“이곳은 리베의 영토로 편입될 것입니다.”
“하면 말씀하신 소수민족과 아리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렇게 되면 그들은 논공행상에서 제외되는 것 아닙니까.”
리베에 대한 보상이 발표되자 의문을 담은 낯선 목소리가 나의 귓가를 울렸다.
“네, 맞습니다.”
“허, 그들은 동의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바빌리안을 비롯해 반투족과 알브족의 땅 역시 리베의 영토로 귀속될 것입니다.”
“네? 그렇다면 두 부족이 리베의 통치를 받는다는 겁니까?”
“그럴 리 없죠.”
나는 회의실에 걸려 있는 대형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대수림.”
그러고는 대륙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좌중을 둘러봤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나의 몸짓에 의뭉스런 표정만 늘어갈 뿐.
“반투족과 알브족은 저와 함께 이곳에 신생국가를 만들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나는 전대미문의 계획을 선언했다.
그것은 바로 대수림의 개척.
웅성거리는 소란 가운데 카잔의 대표가 손을 들었다.
“대수림이면 중립 지역이 아닙니까. 그걸 멋대로 영토화하는 건 국제법상 문제의 요지가 있습니다.”
“누가 중립 지역이라 했습니까?”
“그야 오래 전부터…….”
“아니죠. 개척할 수 없으니 버려진 것뿐입니다.”
“허… 크흠…….”
“카잔도 능력이 되시면 개척을 시도하세요. 하지만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마족이 사라졌다고 해도 대수림의 토착종은 계속해서 나타날 테니까요.”
소환자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까.
그들이 남아 있는 한, 대수림의 몬스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종류가 토착화될지도 모르고.
나는 무감정한 눈으로 카잔 대표의 답을 기다렸다.
하나 돌아온 것은 마른침 삼키는 소리뿐, 무언가 챙겨 보려던 카잔의 대표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한숨만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아직 언급되지 않은 아리안에 대한 처우를 말할 차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발언은 내가 아닌 로제의 입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안 또한 이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합니다. 아리안의 각료는 참전을 거절했기 때문이죠. 반크스 경의 참전은 저희 카슈타르 가문의 개인적인 참여일 뿐이며, 이반 공의 참전 또한 아리안의 의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아리안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요구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
말끝을 흐린 로제는 좌중을 둘러보며 호흡을 다듬었다.
잠시 틈을 두어 긴장감을 끌어올리고는.
“이반 공의 원대한 계획에 카슈타르의 이름으로 동참할 생각입니다.”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목숨 99개